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00화 (200/425)
  • 어둠의 클럽 (1)

    점심식사 후, 쉬는 시간.

    대부분 마루 주변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쉬고 있다.

    아무래도 아직은 날씨가 더운 탓에 에어컨 주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때 가장 좋은 자리에 널브러져 있던 이대봉이 시원한 커피를 홀짝거리며 만화책을 보고 있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만화책은 드래곤볼 3권이었다.

    “요즘 드래곤볼은 정말 너무 재밌는 거 아니니?”

    근처에서 비슷한 자세로 소년점프를 뒤적거리던 실버가 대답했다.

    “지금 소년점프에서 1위 다툼하는 만화다. 그러니까 당연한 일이지.”

    그 말에 이대봉이 감탄하며 물었다.

    “오, 이게 벌써 1위 다툼? 얼마 전엔 연재퇴출 위기라고 하지 않았어?”

    “멍청한 녀석, 언제 적 이야기를. 지금은 북두의 권이랑 쌍벽이야, 쌍벽.”

    “왜 또 시비야? 그거 모른다고 왜 멍청하다는 건데?”

    “멍청하니까 멍청하다는 거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구만.”

    “어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그렇게 투덜거리던 이대봉이 곧 뭔가가 떠올랐는지 금방 다시 입을 연다.

    “전에 우리 윤환이와 몇 번 전화도 주고받더니 그 덕분에 감각을 완전히 찾은 건가?”

    “콜록.”

    그 말에 커피를 마시던 내가 기침을 했다.

    내 덕분이라니 그럴 리가.

    어려울 때 몇 번 통화해서 좀 친분을 쌓은 건 맞지만 원래 나올 결과일 뿐이다.

    “너는 말을 그만할 것처럼 하더니, 그새를 못 참고 다시 떠드냐?”

    “너랑은 말 안한 거야.”

    “미친.”

    “안 할 거라고.”

    “닥쳐.”

    “야!”

    지금 현재 드래곤볼은 일본에서 단행본이 3권까지 나와 있고, 연재는 한참 천하제일 무도회 이야기가 나오는 중이다.

    본격적으로 인기가 폭발하기 시작하던 시점이다.

    한참을 실버와 티격태격하던 이대봉이 다시 만화에 몰입한다. 그리고는 다시 중얼거렸다.

    “여기 잭키춘 이양반이랑 결국 손오공이 결승에서 만나겠네. 흐음. 결국 손오공이 우승하려나?”

    “잭키춘이 얼마나 강한데. 지금 손오공 능력으로는 무리지.”

    “너랑은 말 안할 거거든.”

    “무천도사가 벌써 손오공에게 지면 곤란하지.”

    “안 들린다. 안 들린다.”

    “지랄.”

    “아아아아.”

    이대봉이 소리를 지르며 만화책을 보고 있다.

    저렇게 봐도 집중이 된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때 정미자가 내게 노트 한권을 들고 조심스런 걸음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죄송한데. 이거 좀 봐 주실 수 있을까요?”

    “네? 그게 뭔데요?”

    내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다 미간에 힘을 주며 말했다.

    “······콘티요.”

    “콘티요? 혹시 자작?”

    “네.”

    “오, 드디어 만화가 도전이야?”

    드래곤볼에 빠져 있던 이대봉이 만화책을 테이블에 놓으며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나야 최근 정미자가 따로 그림연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벌써 콘티까지 만든걸 보면 조금은 본격적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의외일 뿐이다.

    아무튼 이대봉의 물음에 정미자가 조금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살짝 붉혔다.

    “어, 뭐. 언젠가는 도전해야 하니까, 틈틈이 공부하고 있는 것뿐이야.”

    그 말을 들은 이대봉이 만화책을 내려놓고는 손을 뻗었다.

    “그거 내가 좀 보자.”

    “아니, 오빠는 나중에.”

    그렇게 말하며 날 돌아본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저걸 안 볼 수는 없는 일이지.

    뭐, 저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내 쪽에서 부탁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고.

    “한 번 줘 봐요.”

    “네.”

    그렇게 대답하고는 내게 노트를 내밀었다.

    노트를 넘기자마자 꼼꼼하게 연필로 그려진 표지와 제목이 나온다.

    ‘어둠의 클럽’

    표지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애매한 얼굴이다.

    특유의 순정형 미소년에 가깝다고나 할까.

    처음 화실을 찾아왔을 때 가져온 그림 속 일러스트와는 상당히 달라져있다. 그땐 일반적인 순정 캐릭터에 가까웠는데, 지금은 삼사라 원고작업을 많이 한 탓인지, 꽤나 디테일하면서도 리얼한 느낌으로 변해있다. 거기다 삼사라의 분위기도 있고.

    그나저나 표지에 등장하는 인물의 입가에 흐르는 피는 뭘까?

    묘하게 끌리는 느낌이 드는 그림이다.

    일단 표지가 주는 호기심을 뒤로하고 다음페이지부터 천천히 넘겨나갔다.

    그런데 콘티치고는 디테일이 심할 정도로 열심히 그린 티가 난다.

    그냥 콘티와 데생을 합쳐버린 듯한 느낌이랄까.

    덕분에 눈에는 잘 들어와서 보기엔 좋지만.

    만화 속 배경은 일단, 현대로 보인다.

    하지만 묘하게 암울한 느낌인데, 이것도 삼사라의 영향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대사 없이 어두운 밤 분위기로만 진행해나간다.

    그리고 등장하는 다소 평범해 보이는 여자.

    잠시 후, 그녀를 덮치는 검은 그림자.

    그리고 한국에는 없을 것 같은 대저택의 모습.

    쭉 읽어보니, 표지에 나왔던 정체불명의 캐릭터는 일단 여자인 모양이고.

    수백 년째 살아오고 있는 젊은 여인.

    주인공의 정체는 흡혈귀다.

    어둠의 클럽이라는 건, 아마도 흡혈귀들의 모임인 것 같다.

    피를 마셔야만 젊음과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뻔 한 소재인데, 묘하게 분위기가 흡입력이 있게 전개되고 있다.

    대충 50페이지 분량이고, 또한 단편이다.

    대사가 많이 없음에도 분위기가 있어서 나쁘지 않다.

    물론 후속편으로 이어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흡입력이 있고, 나름 신선하기도 하다.

    그림자체로만 보면 우리화실에서 수련한 결과인지, 어지간한 만화가들보다는 낫다. 물론 한국기준, 아직 일본에 비비기엔 좀 애매한 느낌이다.

    하지만, 스토리가 받쳐준다면 문제는 없어 보인다.

    “어떤가요?”

    내가 다 읽고 난 것을 확인한 정미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거 묘사가 굉장히 좋아요. 이야기 진행도 흡입력이 있고. 단편으로서는 괜찮아 보여요.”

    “······장편은 좀 어려울까요?”

    단편으로서 라는 말이 좀 마음에 걸린 걸까?

    정미자가 약간 아쉬워하는 표정이다.

    “재미는 있는데, 이런 이야기로 장편을 계속 이어나가는 건 쉽지 않아보여서요. 뭐, 그냥 제 의견일 뿐이니까.”

    재미는 있는데, 뭔가 확 땡기는 그런 것도 없는 게 사실이다.

    단편으로서 그런 점을 어필하지 못한다면 장편에 대한 기대감이 없어서 연재를 따낸다는 건 어려울지도 모른다.

    좋은 평가를 받는 것과 많이 팔리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그리고 만화는 어디까지나 대중에게 어필해야하는 숙명을 지녔으니까.

    “아뇨, 사실은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짧은 이야기로는 나름 괜찮지만, 몇 권이 이어나가려면 이 분위기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고요.”

    스스로도 어느 정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면 고치는 건 마음먹기에 달린 거다. 그러니까 가능성이 더 높다.

    호기심에 물었다.

    “목표가 어디에요?”

    “목표요?”

    “네. 어디를 목표로 그린 건지가 중요할 것 같은데. 대본소용이라면 그리 어려워보이지는 않는데.”

    현재 순정만화를 연재할 만한 잡지가 따로 있지는 않다. 그러니까 대본소가 거의 유일한 출구인 셈이다.

    아, 여학생들의 잡지에도 가끔 만화가 실리기도 하니까 아예 없는 건 아니구나.

    그래도 거긴 어디까지나 일반 잡지, 그저 만화가에게 가끔 생기는 아르바이트 같은 일에 불과한 곳이다.

    그러니까, 일반 잡지는 제외.

    “대본소는 아니에요.”

    “그럼 일본?”

    그 말에 정미자가 어색하게 웃는다.

    “일본은 좀 무리구요. 지금 보물성이라는 잡지도 생겼으니까, 조만간 순정만화잡지도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때 도전해 볼 생각이에요.”

    정확한 예측이다.

    앞으로 3년 후에 르네*스가 창간되고 이듬해 하이*스가 창간되니까.

    물론 전성기가 그리 길지 못할 테지만.

    그 이후에도 순정잡지가 생겨나긴 하지만 한국만화계의 전성기가 길지 못하니까 좀 신경이 쓰인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화실 출신 사람들이라면 내가 어느 정도 캐어 해주고 싶다.

    그때 우리의 대화를 듣던 이대봉이 끼어들었다.

    “왜? 너 정도면 해봐도 되지. 이미 일본 편집자들과 안면까지 텄는데. 거기다 우리 윤환이랑 선희라는 좋은 인맥을 이용해 일본으로 진출하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그 말에 정미자가 머리를 흔들었다.

    “내 실력에 무슨······.”

    “미자야, 꿈을 크게 가져라. 이 오빠가 있잖니. 날 믿어라!”

    그때 실버의 자리에서 빠직하는 소리가 들린다.

    어찌나 그 소리가 컸는지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죄다 그쪽으로 돌아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널브러져 책을 보던 실버가 언제 돌아간 건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게 보인다.

    우리의 시선이 몰리자마자 그가 썩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그런 그의 손에는 부러진 펜대가 들려져있다.

    “이런, 힘이 조금 많이 들어갔나? 펜대가 많~이 썩었던 모양이네.”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이대봉 쪽을 슬쩍 흘겨본다.

    “누구의 뼈도 이렇게 썩어 있으면 금방 부러지겠지.”

    실버가 음산한 음성으로 손목을 까닥거린다.

    그러자 그의 그런 시선 끝에 닿아 있는 이대봉이 몸을 움찔거리더니 정미자의 뒤로 숨는다.

    그 때문에 실버의 눈이 더 광기에 물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정미자가 한숨을 푹 쉬더니 실버를 빤히 쳐다본다.

    “······.”

    그러자 실버가 이내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부러진 펜대를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바로 다른 펜으로 다시 작업을 이어갔다.

    그 모습을 본 이대봉이 실버의 눈치를 살피며 작게 중얼거렸다.

    “저 자식은 왜 이렇게 분위기 살벌하게 만들고 그래.”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깐족대는 이대봉도 그렇지만, 정미자의 기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는 실버의 모습도 재미있었으니까.

    그때 내가 정미자에게 말했다.

    “대봉이 형 말이 맞아요. 이 정도면 일본에 도전 해봐도 될 겁니다. 물론, 만화의 장르상 다른 잡지에 도전해야 할 테지만, 스토리를 조금만 더 다듬는다면 한번 해볼 만해요. 틈틈이 저랑 스토리에 대해 의논해 봐요.”

    내 말에 실버를 쳐다보던 정미자가 날 돌아보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정말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뭐 대단한 거라고.”

    “감사합니다.”

    정미자가 감격한 표정으로 콘티노트를 가슴에 품고는 자신이 자리로 돌아가려한다. 그때 내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아니다, 이참에 한번 진짜로 해 볼까요?”

    “네?”

    “그 단편요. 순정만화 잡지에 도전 해볼래요?”

    “······도전요?”

    “네. 쇠뿔도 단김에 빼라잖아요. 어쩌면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고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혼란해하는 표정이다.

    물론 본인이 준비가 된 게 아니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나도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 억지로 권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뭐, 부담스러우면 언젠가 다음에······.”

    “아뇨, 도전해보고 싶어요. 선생님께서 도와주시겠다는데 제가 결정을 미룰 수는 없는 일이죠.”

    결심했는지 정미자가 잽싸게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해보죠.”

    그 순간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이대봉이 다시 끼어들었다.

    “오, 역시 우리 윤환이는 행동력이 좋아. 혹시라도 내가 도와줄 거 있으면 말해봐.”

    “넌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실버의 말에 이대봉이 인상을 팍 썼다.

    “실버 넌 또 왜 끼어들어?”

    “너나 끼어들지 마라.”

    “두 사람 그만 좀 해요.”

    “······.”

    “······.”

    정미자가 눈을 부라리며 양쪽 다 쏘아보자 두 남자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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