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4)
낙하산이라니.
솔직히 지로는 미치코를 조금 의심하고 있었다.
성격은 밝고 구김살이 없어서 친근하긴 하지만, 그래도 신입인 주제에 갑자기 한국에 일이 있다질 않나, 그러면서 느닷없지 자신을 몰래 따라오질 않나.
이정도면 다른 출판사에서 보낸 스파이가 아닌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그래서 추궁한 건데, 엉뚱한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미치코가 로열패밀리라는 사실.
그보다 사장이 외삼촌이라면······.
그때 지로의 머리에 문득 스치는 인물이 있었다.
고약한 인상의 남자.
곧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혹시 네가 전무님의 따님?”
그 말에 눈을 살짝 떴던 미치코가 곧 머리를 흔들었다.
“에이, 아니에요. 그 쪽은 이모부요. 그리고 이모부 나이에 저처럼 장성한 딸이 있을 리도 없고요.”
“아, 참. 그렇지.”
“우리엄마가 외삼촌의 누나에요.”
“아. 그런 건가?”
하지만 지금 납득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이내 지로가 묘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왜 편집부로 들어온 거야. 미쯔다쇼텐엔 더 좋은 곳도 있을 텐데.”
그 말에 미치코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더 좋은 곳요?”
“그래. 패션잡지 쪽이라든가, 아니면 소설 쪽도 있고. 다른 계열의 출판물도 많은데.”
“전 그런데엔 관심 없어요.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아빠 회사엔 출판사가 없거든요. 그래서 외삼촌 회사로 온 거고요.”
천진난만한 얼굴로 말하자 순간 멈칫했다.
과연 로열패밀리라는 건가하는 표정으로.
미치코의 부모가 하는 사업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런 걸 묻기는 좀 그렇다.
“그럼, 왜 출판사에 관심을 가진 거지?”
“정확히는 만화 쪽이에요. 제가 대학 다닐 때 만화연구회에도 있었고. 아참, 전에 이건 말씀 드렸던가?”
그렇게 말하며 생글거린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눈을 크게 뜬다.
“어머, 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어? 갑자기 어딜?”
“그러니까, 처음부터 말씀드렸잖아요. 저 한국에 일이 있어서 왔다고.”
미치코의 말에 지로가 깜짝 놀랐다.
“설마, 그거 정말이었어?”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럼 제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
미치코가 쀼루퉁하게 쳐다보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뭐, 솔직히 제대로 말씀을 안 드린 제 잘못이긴 하지만요.”
“······.”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여자라고 생각하다 곧 다시 물었다.
“그나저나 너 혼자 갈 수 있겠어? 한국어도 잘 모르잖아.”
“에이, 그 정도는 문제없어요. 혹시 몰라서 적어온 것도 있는데.”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민다.
그곳엔 목적지가 한글로 적혀있다.
읽어보니 명동의 유명호텔 앞이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는 안심하긴 힘들다.
“여기서는 방심하면 곤란해. 외국인이라고 바가지 씌우는 택시도 많으니까, 조심해야 되거든.”
“바가지요?”
“그래. 외국인이라고 가까운 길이 아닌 일부러 둘러가는 사람들도 꽤 있어. 나도 전에 그런 택시기사 한번 만나서 엄청 따진 경험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말에도 미치코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도 괜찮아요. 그냥 시내구경하는 셈 치면 되니까.”
“여자가 겁도 없이. 그러다 혹시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는 거야.”
그 말에는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런 건 조심해야죠.”
“그래.”
“그나저나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거 보니까, 역시 선배가 절 걱정해 주신다는 거군요. 상냥하시네요.”
그렇게 말하며 싱글거린다.
“크음, 어쨌건 원고도 받았으니까. 데려다 줄게.”
“네.”
* * *
밖으로 나갔던 지로와 미치코가 화실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지로가 우리에게 말했다.
“죄송한데, 저희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 벌써요? 아직 시간이 이르지 않아요? 평소엔 좀 늦게 가시더니.”
내 말에 지로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아, 네. 따로 볼일도 좀 있고 해서요.”
“그러시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지로가 말을 끝내자마자 미치코가 주변을 돌며 인사를 한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네. 저희도요.”
“저, 가끔씩 놀러 와도 되죠?”
설마, 일본이 옆 동네도 아니고 진짜 가끔씩 놀러온다는 말은 아닐 테지.
물론 내가 살던 시절이라면 별일 아니지만, 지금은 그렇게 자주 왕래할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지로의 경우는 좀 특별한 거고.
경희가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야 언제든 환영이죠. 기회가 된다면 자주자주 오세요.”
“정말 자주와도 되요?”
“그럼요. 그런데 정말 자주 오실 수 있으려나?”
“당연하죠.”
그렇게 말하며 해맑게 웃는다.
그때 이대봉이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언제 따로 불러줘요. 나도 내 만화에 나오는 요리 좀 먹어보고 싶으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중원요리왕의 요리를 제대로 재연하게 되면, 그때 꼭 제임스 선생님 부를게요.”
“진짜?”
“그럼요. 아, 그리고 또 말씀드릴게 있는데.”
“뭔데요?”
“그거 요리 완성되면 그거 판매할 권리 주시면 안 될까요?”
“요리를요?”
“네. 어쨌건 만화에 등장하는 요리니까 원작자님께 허락은 맡아야 할 것 같아서요.”
그 말에 이대봉의 표정이 밝아진다.
“나야 상관없죠. 그런 건 알아서 하세요.”
“로열티는 반드시 드릴게요.”
“로열······.”
이대봉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고 있다.
하기야, 만화 스토리에 등장하는 요리를 만든다는 것도 신기한데 로열티까지 운운하니, 좀 얼떨떨한 모양이다.
나도 솔직히 그런 걸로 로열티를 받는다는 건 처음 듣는 일이기도 하고.
“많지는 않아요. 요리 당 판매액의 1퍼센트 정도거든요.”
“액수는 상관없지. 진짜로 만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괜찮아요.”
“아, 감사합니다. 나중에 따로 계약서는 보내드릴게요, 아니다. 일본에 오시면 그때 계약해요.”
“뭐, 그러죠. 그나저나 부모님이 식당을 하시는 건가요?”
“아, 네. 비슷해요.”
“아.”
이대봉이 머리를 끄덕인다.
어쩐지 요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싶더니, 집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구나.
아는 사람이 요리사라고 하는 걸 보면, 집에서 운영하는 식당의 주방장 쯤 되려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미치코가 이대봉과 대충 이야기를 마무리하고는 다른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눈다.
“그럼 모두 안녕히 계세요.”
“네, 잘 가요.”
어시들도 한마디씩 인사를 건넨다.
물론 한국어라 알아듣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지로와 미치코가 화실을 나서자, 경희가 대문까지 따라 나갔다가 곧 화실로 들어온다. 그리고는 조금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카와다 씨도 일본 아저씨랑 같이 우리 담당이었으면 좋겠는데.”
같이 식사할 때 이야기를 나누다 그새 정이 든 모양이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넌 키도 형이라 작업하니까, 담당은 테고시 씨잖아.”
“에이, 거기 아저씨랑은 따로 대화도 없는데, 그리고 난 가끔 짧은 에피소드만 하고 있어서, 정확히 담당은 키도 오빠야.”
“그런가?”
“그나저나 우리도 언제 일본에 다시 가게 되면 꼭 카와다 씨 식당에 놀러가는 건 어때?”
“뭐 다시 일본에 간다면, 그러자.”
“아싸!”
* * *
서울의 명동 인근 한 호텔 앞에 택시가 멈춰서고, 그곳에서 지로와 미치코가 내려섰다.
“여기에요.”
“어? 한국에 처음 온 거 아니야?”
“에이, 설마요. 벌써 네 번짼데.”
“······그래?”
“자 안으로 들어가요.”
“이 호텔에서 묵는 건가?”
“묵기도 하고, 다른 볼일도 있고.”
“다른 볼일?”
지로의 질문에 미치코가 히죽 웃더니 그의 팔을 끌어당긴다.
“일단 들어가요.”
“······나도?”
“네. 여기까지 왔으니까.”
“어이, 이봐 이건 좀 곤란해······.”
“네? 뭐가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저 선후배고 말이지······.”
지로가 얼굴이 벌겋게 변한 채로 말하자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피식 웃는다.
“뭐라는 거야?”
“······?”
“실없는 소리하지 말고 들어가기나 해요.”
그렇게 말하며 다시 그를 끌어당긴다.
“어, 어. 그러니까 곤란하다고.”
잠시 후.
지로가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빳빳하게 세우며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의 이마에 땀이 삐질 삐질 흐르고 있다.
“왜, 음식이 맞지 않나?”
“아, 아닙니다. 맛있습니다.”
“그럼 먹지 않고 뭘 해?”
“아, 네!”
그렇게 말하고는 포크를 들어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슬쩍 앞쪽에 있는 남자를 힐끔거린다. 그리고 그 곁에 있는 미치코도.
“미치코 너는 네 아버지 일이나 배우지 출판사 말단 일을 배운다고 그러니. 그것 때문에 누나가 요즘 틈만 나면 내게 전화를 걸어서는 잔소리다.”
“미안해요, 외삼촌. 내가 늦게 얻은 외동딸이라 엄마가 걱정이 많아서 그렇잖아요. 좀 이해해 주세요.”
“그야, 뭐 잘 알고 있으니, 이해고 뭐고 할 건 없지. 그리고 너보다 우리 신이치가 더 늦둥이지.”
“아, 맞다. 신이치 지금 소학교 1학년이죠?”
“그래.”
두 사람이 같이 앉아 친근하게 대화하고 있다.
맞은편에 앉은 40대 중반의 사내는 바로 미쯔다쇼텐의 사장인 미쯔다 히로유키였다.
“그나저나 매형도 참 대단하지. 언제 한국에 이런 레스토랑 사업까지 진출한 건지. 여기도 나쁘지 않고. 음식 맛도 괜찮고. 넌 가업을 안 이을 거냐?”
“난 관심 없어요.”
“그럼 진짜로 출판 쪽으로 진출할거야?”
“만화 쪽 만요. 그 외엔 별로에요.”
“너도 참.”
그렇게 말하다가 다시 사장이 건너편에 앉은 지로를 슬쩍 넘겨본다.
그 눈빛에 깜짝 놀란 지로가 서둘러 자르던 고기를 입에 쑤셔 넣었다.
“맛은 괜찮나?”
“아, 네. 맛있습니다.”
실은 지금 그는 고기 맛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자네가 담당하고 있는 선생님들은 요즘 어떠신가?”
“네? 아, 네. 순조롭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혹시 불편한 게 있다면 언제든 편집장을 통해 이야기해. 회사차원에서 지원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지원하라고 얘기해 뒀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외삼촌 그런데 써니 선생님에 대해선 왜 안 알려주셨어요?”
“아, 그래도 회사차원에선 비밀이니까 당연하지. 왜 실망했니?”
“아뇨. 반대에요. 그게 외삼촌다운 거니까.”
“이해해 줘서 고맙다. 하지만, 너도 몰래 뒤를 밟아서 찾아간 건 잘못이지.”
“그건 죄송해요.”
“아니다, 이참에 그냥 결정을 짓자, 너도 좋아하니까.”
“정말요?”
지로는 두 사람이 뭘 결정짓는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냥 고기만 입에 넣고 씹을 뿐이었다. 상대는 사장이 아닌가.
그때 사장이 지로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미치코랑 같이 담당을 맡도록 하게.”
“네?”
“편집장에게 듣기론 자네가 지금 담당한 선생님들 작품이 많아서 업무가 꽤 많다고 들었어. 나도 누군가를 자네 후임으로 붙여줄까 고민했는데, 이참에 여기 미치코랑 같이 해보게. 뭐, 굳이 내 조카라고 어렵게 대할 건 없고, 그냥 보통의 후배처럼 대하면 되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
미치코의 말에 지로가 사장을 힐끔거리며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