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가마니가 아니야 (3)
박길상이 눈을 부릅뜬 채로 날 본다.
얼굴을 보니 술이 확 깨는 모양이다.
그런 그가 흥분한 표정으로 버럭 했다.
"너 이 자식,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제가 없는 말을 한 게 아니라는 거 본인이 더 잘 아시잖습니까? 얼마 전에 나온 축구의 신 그거 일본만화인 파시엔시아를 베낀 만화잖아요. 그건 해적만화라고 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내 말에 박길상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다.
그리고는 눈동자가 사정없이 요동친다.
"……너, 임마! 내가 누군 줄 알아? 협회 이사야, 이사! 정말 한국만화계에서 매장당하고 싶어?!"
한국 만화계? 매장?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온다.
지금 내가 활동하는 곳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니 저런 협박이 통할 리 없다.
저런 말을 듣고도 전혀 내가 전혀 동요하지 않으니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다.
"협회 이사란 분이 그런 짓을 저질러도 될 만큼 협회가 개판인건가요? 도대체 어디까지 썩어있는 거죠?"
"너, 정말. 밥줄 끊기고 싶어?"
내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네. 끊어보세요."
"……."
"뭐, 어차피 밥줄 끊는다고 하니까, 끝까지 가보도록 하죠. 알아보니까. 그쪽도 이번 축구의 신 말고도 표절 만화가 몇 개 더 있던데. 그것도 이참에 다 공개를 해보도록 하고요."
"………너, 이 자식. 진짜……."
"제가 기회를 드릴게요."
"뭐?"
"책 다시 수거하세요. 그리고 다음부턴 이런 짓 하지 마세요. 협회 이사라는 분이 부끄럽지도 않나?"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날 보면서 박길상이 버럭 소리쳤다.
"너 이 자식, 내가 가만 둘 줄 알아? 내가 넌 책임지고 만화계에 발도 못 붙이게 해 주겠어."
"네. 꼭 그렇게 하세요. 이참에 누가 잃는 게 많은지 한번 가보자고요?"
"미친……!"
"내가 아까 한 말 그대로 하세요. 안 그러면 두고두고 표절작가라는 낙인이 찍힐지도 모르니까요."
"뭐라고!"
난 그냥 그 자리에서 벗어나 버렸다.
나를 보며 버럭 하던, 박길상이 들고 있던 컵까지 깨며 지랄하기 시작하는 소리를 뒤쪽에 듣긴 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1층으로 내려가자, 전상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벌써 끝났나보네, 2층이 저렇게 시끄러운 걸 보면."
"네. 할 말은 다했어요."
"그래. 그럼 됐어. 같이 나갈까?"
"그러죠."
소란스러운 2층 소리에 1층에 있던 사람들도 웅성거리며 위를 쳐다보고 있다.
그런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바깥으로 나왔다.
사실, 전상길과는 이미 이곳에 오기 전부터 미리 이야기해 둔 부분이었다.
특히 그는 예전부터 협회의 이사들, 그 중에서도 저 박길상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이제 겨우 합동출판사의 미친 독과점에서 벗어나나 했는데, 다시 저런 부류들이 창궐하고 있다며 한탄했다.
거기다 만화가로서 기본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작자가 이사라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지 배 불리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튼 대략적인 그의 주변 상황과 성향을 듣고 온 상황이었던 것이다.
솔직히 이 정도로 뭔가 크게 성과를 낼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냥 낯짝을 보고 멘탈이나 흔들어 볼까하는 기분으로 온 것뿐이다.
그냥 이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당하기만 할 걸 생각하니까, 잠도 안 오는 기분이라서.
솔직히 처음엔, 출판사의 힘을 좀 빌려 볼까 하는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다.
변호사를 고용해 제대로 고소를 시도해볼 수도 있을 테고, 언론에게 내용을 흘리는 방법도 생각해 봤다.
하지만, 결국 그런 방법은 저 작품을 유명하게만 만들어 어그로를 잔뜩 끌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럼 크게 얻는 것도 없이 저 사람 돈벌이만 도와주는 꼴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한번 시작하면 시간, 돈이 무지막지하게 소모된다.
설사 이긴다고 하더라도 상처뿐인 영광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바에야 그냥 직접 만나 분이라도 풀자는 생각에 나온 것이다.
그리고 저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니까, 솔직히 마음이 안정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잡념에 빠져 있을 때였다.
박상식이 날 넌지시 바라보며 묻는다.
"넌 괜찮냐?"
"네? 제가 왜요?"
"저런 놈, 흔들면 속은 좀 시원할지는 모르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면 네게 좋지 않을 수도 있잖아."
"괜찮아요. 영향 안 받으니까."
내 말에 전상길이 피식 웃었다.
"하기야, 넌 한국만화계랑은 상관없으니."
"전 오히려 선생님에게 저 작자가 지랄을 하지 않을까 걱정인데요."
내 말에 전상길이 웃는다.
"하하, 그런 건 걱정하지 마라. 저런 멍청이에게 당할 만큼 내가 허술하진 않지. 그리고 네가 보기엔 어떨지 모르겠는데, 나도 나름 이름이 알려졌다고."
"아, 네."
"그래도 반응이 그게 뭐냐? 내가 네 스토리 도움 받았다고 그러냐?"
"전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끄응."
전상길이 조금 삐진 듯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후 피식 웃는다.
"하기야, 네가 이런 우물 같은 한국시장이 눈에 차겠냐?"
그렇게 말하더니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을 물고는 멋지게 성냥으로 불을 붙인다.
저 모습을 보고 있으니, 왜 예전 사람들이 특히나 담배를 많이 폈을지 알만하다.
미래엔 방송에서 담배 태우는 장면이 별로 없지만, 이 시대엔 드라마는 물론 담배를 피우며 인터뷰를 하는 장면도 흔하다. 그 만큼 사회전체가 담배라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당장 이곳 길거리만 봐도 사방에 쓰레기통과 길거리 담배꽁초 버리는 모래 통이 널려있을 정도니까.
아무튼 그가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고는 후 하며 내뱉는다. 그리고는 곧장 다시 입을 열었다.
"일본에 비할 수야 없지만 요즘 한국도 많이 좋아졌어. 만화가들 벌이도 좋아졌고, 만화방도 전국에 계속 늘어나고 있는 모양이고, 연재 쪽도 잘 나간다고 하더라. 내년엔 아시안게임도 있고, 3년 후엔 올림픽도 열리는 덕분에 정부에서도 뭔가 외국에 보이기 위해서 문화 쪽 지원을 늘 리려고 하는 모양이고."
"……그렇군요."
"지금은 좋은 시절이야. 앞으로는 더 좋아지겠지. 앞으로는 만화가들도 제법 살만할 거야."
"……."
전상길의 말에 내가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살던 시절이라면 그나마 웹툰으로 제법 명성을 날리는 작가들도 있고, 방송에도 나와 유명세를 타는 사람들이 있지만,지금 기준으로 보면 꽤나 먼 미래의 일이다.
당장 10년 정도 지난 후부터 본격적으로 암흑기가 와서는 거의 20년간 만화계는 엉망이 되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을 전혀 모르니, 전상길은 장밋빛 미래만 보이는 모양이다.
뭐,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지금 시절은 분위기가 이랬으니까.
사람이란 희망을 먹고 사는 생물이라고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나는데, 지금 이 시대는 그야말로 미래가 밝다는 것이 하나의 정설처럼 통용되는 세상이다.
몇 년 후엔 당연히 한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할 거고, 21세기엔 엄청난 과학문명의 발전으로 우주여행을 하게 될 거라는 둥, 미래엔 모두 소득이 높아져 누구나 집, 자동차 같은 건 쉽게 살수 있다는 둥.
미래에 일어날 나쁜 변수에 대한 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소련과 미국의 대립하는 냉전시대라 핵전쟁에 대한 공포가 있는 건 사실이긴 하지만, 아무튼 현실은 힘들어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 넘치는 시대임은 분명하다.
*
다음날 오후,
전상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침부터 전화를 해서는 어제 자신이 얼마나 모욕을 당했는지 장황하게 늘어놓더구만.
"그래서 뭐라셨는데요?"
-내가 뭐라고 할 게 뭐 있어? 그냥 '아이구, 저런, 그 친구 안 되겠네, 그렇게 안봤는데, 네, 언제 만나면 잘 타일러 보겠습니다.'라고 맞장구만 조금 춰 줬지.
그렇게 말하며 웃는다.
"그러셨어요?"
-응.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언젠가 자네를 다시 만나게 되면 혼꾸녕을 내 주겠다며 벼르더라고. 그리고 만화계에 절대 발도 못 붙이게 하겠다더라. 내가 그거 듣고 얼마나 웃었던지.
상황이 어쨌을지 눈에 선하다.
아무튼 전상길과의 통화를 끝내고 나자 화실 식구들이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궁금해 한다. 특히 이대봉이 집요하게 캐물었다.
그래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했더니 낄낄대며 웃었다.
"와, 속이 다 시원하다. 잘 했어."
다른 사람들도 꽤나 재밌어하는 눈치다.
하지만 박상식은 조금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괜찮을까? 협회이사라는데."
"우리랑은 상관없는 곳이잖아."
"그럴까?"
그때 미령이랑 준모가 경희의 손에 이끌린 채 거실 마루로 들어온다. 방금까지 마당에서 놀다가 더위 때문에 들어온 모양이다.
"엄마."
"어, 잘 놀았니?"
"응."
소파에 앉아있던 미령이 엄마가 아이를 꼭 껴안는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미령이 엄마가 화실 한쪽 소파에 앉아 있던 걸 깜빡했다.
워낙 조용히 있으니 가끔 있다는 것도 까먹을 때가 있다.
그런데 며칠 후 전상길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그런 그가 재미있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거 들었냐?
"네? 뭘요?"
- 박길상이 그 작자, 갑자기 세무조사를 받은 모양이야.
"네? 세무조사요?"
갑자기 무슨 일이지?
-그래. 뭐 당연하지만 탈세도 걸린 것 같고, 그런데 사실 이런 게 흔하지는 않은데 말이지.
"그렇겠죠."
-마침, 자네와의 분쟁이 있은 뒤에 생긴 것도 공교롭고,
"……."
- 혹시 자네, 아는 고위 공직자 있는 거 아니야?
"에이, 공무원하고 인연도 없는 제가 무슨……."
-정말 없어? 확실해?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니,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
전상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예전에 그 뭐냐? 평발 스트라이커 작년 어린이날에 막 불태워졌었잖아. 그리고 불량만화 리스트에 올라갔던 거, 기억안나?
"당연히 기억나죠. 그런데 그게 왜요?"
-그때 갑자기 그 리스트에서 빠졌다고 했잖아. 오히려 그때 날 엿 먹인 그 인간이 되레 당했고.
"네. 맞아요."
-그때 솔직히 누군가 개입했다는 느낌이 강했거든.
그 말에 내가 미간을 좁혔다.
"그럼……."
-그래. 그때랑, 지금이랑 공통점이 뭐겠어?
"저랑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군요."
-맞아, 그거 말고는 공통적인 게 없잖아.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기는 하지만,
에이, 그래도,
"우연이겠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아는 공무원은 한명도……."
어?
뭐지?
그러고 보면 아는 공무원 쪽이 아예 없는 건 아닌가?
미령이 아빠가 무슨 고위 공직자라고 듣긴 한 것 같은데.
하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서, 그걸 인맥이라고 할 수 있을지 어떨지.
그건 그렇고,
생각해보니까 며칠 전에 미령이가 놀러 왔었다는 것도 떠오른다.
잠시 생각하다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약이 너무 심하다.
- 갑자기 왜 말이 없어? 혹시 뭐 생각난 거 있어?
그래도 굳이 전상길한테 이야기 할 필요는 없겠지. 혹시라도 괜한 오해가 생길지도 모르고.
적당히 둘러대야겠다.
"아뇨. 생각해보니까, 아는 사람 중에 동사무소 직원이 한명 있더라고요."
-동사무소 직원?
전화기 너머에서 어이없다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래. 네 말대로 그냥 우연이겠지.
"맞아요. 그냥 우연일겁니다."
그래, 우연일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