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94화 (194/425)
  • 난 가마니가 아니야 (2)

    이대봉의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만화책을 살펴본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익숙한 구성이다.

    내가 직접 그린 그림이 아니라서, 정확한 장면을 모두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익숙하다는 건 분명하다.

    그때 박상식이 서둘러 파시엔시아 단행본을 가져와 내게 내밀었다.

    "이거."

    "어. 고마워."

    그것을 받아든 내가 페이지를 펼쳐 하나하나 확실하게 비교해 본다.

    초반부분의 거대한 경기장 같은 디테일 한 장면은 몇 개를 건너뛰었다.

    그런 식으로 조금 손이 많이 간다싶은 장면은 대부분 건너뛰거나 혹은 삭제, 아니면 다른 그림으로 채워 넣었다.

    중심인물 몇 명만 자신의 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로 바꿔놓았을 뿐, 장면연출, 화면배치까지 완벽하게 그대로 옮겨 그렸다.

    다만 일본연재만화라는 것을 생각하면 배치가 반대라는 것만 다를 뿐이다.

    곁에서 그림을 번갈아가면 비교하는 걸 지켜보던 박상식이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진짜, 심하네. 이 정도면 그냥 완전히 베낀 만화잖아."

    한때 해적만화를 그렸던 실버까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해적만화랑 똑같아."

    "맞아요. 이정도면 해적만화지, 이게 자기이름 걸고 내는 만화야?"

    어시들도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는 다가와 같이 바라본다. 그리고 정미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박길상이라면 꽤 유명한 만화가 아니에요?"

    "네. 맞아요. 대본소에서는 제법 알려진 만화가죠. 문하생을 수십 명이나 데리고 있는 제법 큰 규모의 화실을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대본소에도 자주 만화가 나올 정도로 이름도 있는 편이고요."

    박상식이 대답하자 모두가 황당해 한다.

    "그러니까. 이름 있는 만화가가 일본에 연재중인 만화를 몇 장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체를 베꼈다는 건가요?"

    "얼굴만 빼고요."

    "그리기 귀찮은 배경도 빼고."

    "어이가 없네. 한국 만화계가 이 정도까지 썩은 건가?"

    "뭐, 따지고 보면 표절은 아예 흔할 정도니까요."

    박상식의 말처럼, 만화 속에 아예 일본 만화를 베껴 그린 그림은 너무도 많아서 일일이 다 찾아 지적하기도 버거울 정도다.

    그러다보니, 보물성처럼 유명한 만화잡지에 연재중인 만화에도 가끔 그런 만화가 실리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물론 그것을 일반인인 독자가 알아채는 건 너무 어렵고,

    출판사도 외국의 유명 만화를 아무런 판권 계약 없이 그냥 잡지에 싣기도 하니까, 뭐.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해적만화가 아닌 바에야 이렇게 몽땅 다 베끼는 건 정말…….

    도대체 막장의 끝이 어딜까 궁금해질 정도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사건이 있다.

    바로 '침묵의 함대'를 그대로 베낀 '제국의 함대'라는 만화의 등장이다.

    만화관련 책자에도 등장할 만큼 유명한 사건이었는데.

    물론 지금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몇 년 후 미래의 일이긴 하지만,

    "해적판 만화보다 더 악질이네. 자기 이름을 걸고 만화가로 활동 중인 기성작가가 이런 짓을 해도 되나? 얼굴이 얼마나 두꺼운 거야?"

    박상식이 분통터진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몇 번 두드리더니 이대봉을 보며 말했다.

    "이것도 그냥 구경만 해야 되는 거야?

    이런 놈들은 완전히 만화계에서 추방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도 어쩔 건데? 지금 일본잡지사에선 해적판도 손을 쓰지 못하고 있어. 그런데 이걸 어떻게 막을 거야?"

    "아, 짜증난다. 짜증나. 다른 만화도 아니고 우리가 이렇게 당하니까 더 화가 나. 전에 일본에서도 비슷한 만화가 등장해서 피곤하게 만들더니."

    "그래도 거긴 그림체랑 스토리를 비슷하게 가져가면서도 다르게 진행시키기나 했지. 이건 그냥 대놓고 베낀 거니까."

    "진짜, 무슨 일이래? 전엔 삼사라 해적 판이 돌아다니더니, 이젠 파시엔시아까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내가 곧장 이대봉이게 물었다.

    "대봉이 형, 혹시 이 박길상이라는 만화가에 대해 아는 거 있어?"

    "뭐, 직접 그 양반 만나본 건 아니지만 거기 화실에 출퇴근하는 애들 몇 명은 알고 있지."

    역시 마당발.

    "그래서, 형이 아는 건?"

    "그냥, 월급 안 밀리니까. 크게 평판이 나쁜 건 아니지. 일하는 사람들이야 일 수월하고 월급 잘 주는 사람이 좋은 만화가잖아."

    "그럼 혹시, 전상길 선생님은 박길상이라는 사람 잘 아셔?"

    "뭐, 협회 모임에서 가끔 본다고는 하던데, 자세한 건 상길이 형한테 물어봐야 알지."

    잠시 생각하던 이대봉이 손바닥을 짝하고 쳤다.

    "아, 그러고 보니까, 며칠 후에 모임이 있다고는 하더라."

    "그래?"

    "응. 그런데 왜?"

    "그 모임 나도 가면 안 될까?"

    "뭐,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렇게 대단한 모임이거나 하진 않은 모양이야. 식당 하나 빌려서 만화관련 사람들이 모여 밥이나 먹으며 노는 회식같은 자리라서, 참석하고 싶으면 상길이 형에게 말하면 되겠지. 그 형이야 뭐, 너한테 진 신세도 많으니까."

    "그럼 부탁 좀 해볼까?"

    내 말에 이대봉이 가재미눈을 하고는 날 본다.

    "가서 뭐하게?"

    "그 사람 어떻게 생겼는지 낯짝이나 좀 보려고."

    "야, 설마 무슨 사고 치려는 건 아니지? 너 인간시장의 장총찬 아니다. 현실에서는 그런 거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바보야? 그런 사람 때문에 내 인생 종칠 짓을 하게?"

    "하긴, 우리 윤환이가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지."

    이대봉이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끄덕인다.

    *

    며칠 후 전상길과 함께 방배동에 있는 식당으로 찾아갔다.

    이대봉 말로는 그냥 만화 쪽 관계자들끼리 모이는 회식정도라더니, 생각보다 식당의 규모도 크다.

    안으로 들어갔더니, 식당에 자리가 꽉들어차있다.

    그런데 실내에 계단도 있는 걸 보면 2층짜리 식당인 모양이다.

    1층에도 이렇게나 많은데, 2층도 보나마나 사람들이 득실거릴 것 같은 느낌이다.

    하긴, 이렇게 보니까 무슨 잔칫날에 모인 사람들처럼 북적이는 모습이 회식 같아 보이기는 하네.

    "어서 와요. 전 선생."

    "안녕하세요. 전 선생님."

    "어이쿠, 선생님."

    전상길도 제법 이름이 있는 양반이라 그런지 아는 체를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이대봉에게 들은 말이긴 한데, 최근평발 스트라이커 덕분에 전상길이 방귀 꽤나 뀐다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대봉에게 들은 것이랑은 달리 별로 그런 티를 내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아무튼 나로서는 아는 얼굴의 거의 없다보니 누가누군지 전혀 모르겠다.

    하긴, 이젠 한국보다 일본에 아는 사람이 더 많으니,

    그런데 모임의 특성인지, 대부분 30대 이상으로 보인다. 그리고 상당수는 40대 이상이고, 전상길은 1층을 둘러보다 곧장 2층으로 올라간다.

    아마도 이곳에서는 박길상이라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곧장 그의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식당 2층으로 올라가니 1층과는 달리 방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저기 있어."

    사방을 둘러보던 전상길이 날 툭 치더니 창가 쪽 자리를 가리킨다.

    그가 가리킨 자리엔 세 명의 남자들이 앉아있다.

    두 사람은 30대 초중반 정도의 느낌이고, 맞은편에 앉은 한명의 남자는 40대 정도로 보이지만, 벗겨진 머리 때문에 정확한 나이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자리를 확인한 전상길이 그곳을 향해 걸어가자, 나도 그를 따라 간다.

    가는 도중에도 전상길을 알아보는 사람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며 곧 창가 쪽 테이블에 도착했다.

    근처까지 다가가자 머리가 벗겨진 남자 하나가 벌써 취했는지 혀가 약간 꼬인 채로 떠들고 있고, 맞은편에 앉은 두 남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아주고 있다.

    "……이러니까, 우리나라 만화계가 발전하지 않는 거라니까. 씨발, 이놈이나 저놈이다 그림도 비슷, 내용도 비슷, 어디서 좀 인기 끌었다하면 너도나도 같은 이야기로 뛰어들고, 그러니 수준 높은 독자들이 안 질리겠냐고."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래도 이번 선생님의 축구만화는 대단하던데요?"

    "아, 그거. 뭐 그렇지."

    "배경이 한국도 아니고, 스페인이면 조사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 정도 조사는 당연한 거야. 당연한거."

    뭐야, 스페인?

    저거 혹시 파시엔시아 베꼈다는 그 만화 얘긴가?

    그럼, 저 머리 벗겨진 사람이 바로 그 박길상이라는 인간인 모양이군.

    내가 황당해하며 그들을 바라보는데, 그때 알딸딸하게 취한 남자가 전상길과 나를 번갈아본다. 그리고는 곧장 전상길에게 시선을 주고는 반갑다는 표정이 되었다.

    "아, 전 선생 아니오? 어여 여기 앉아요, 앉아."

    그렇게 말하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두 사람은 마치 구원자를 본 사람처럼 표정이 밝아졌다.

    "아,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안 그래도 아직 인사드려야 할 분들이 계셔서."

    "오, 바쁜 친구들을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아 둔 모양이네. 그래 그럼 어서들 가봐."

    "네. 선생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서둘러 일어서더니 전상길과 박길상에게 인사를 하고는 부리나케 자리를 빠져나간다.

    하기야, 술 취한 사람의 끝없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건 보통일이 아니지.

    아무튼 두 사람이 자리에서 물러나자마자 나와 전상길이 그 자리에 대신 앉았다.

    전상길에게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그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런데 이 젊은 친구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누구……?"

    "아는 동생입니다. 만화스토리를 쓰고 있어요."

    "아……. 스토리? 안그래도 여기 스토리 쓰는 친구들 좀 많이 와있던데."

    그렇게 말하더니 곧 뭔가가 생각났는지 눈을 크게 떴다.

    "혹시, 그거 아니요, 거 뭐시냐, 평발 스트라이커?"

    "눈치 빠르시네. 맞아요, 그거 쓴 친구."

    전상길의 대답에 '오'하며 감탄사를 연발하더니 내게 손을 쭉 뻗었다.

    "우리 악수나 한번 합시다. 나, 혹시 알란가 모르겠는데, 박길상이요. 만화가."

    "네,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마주잡은 손을 보니 만화가 특유의 손가락 잉크자국이 보이지 않는다.

    "혹시 왼손잡이세요?"

    "응? 아닌데, 왜요?"

    "아닙니다."

    전상길과는 달리 깨끗한 손이다.

    선희도 가끔 펜을 사용하고 있지만 잉크 자국이 있다. 그런데 늘 만화만 그리는 사람이 손이 이렇게 깨끗하다는 건, 역시 그림엔 거의 관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뭐, 잉크 펜을 사용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기엔 일반 연필을 사용하는 흔적도 별로 없으니, 이 양반은 그냥 이름만 걸어놓을 뿐 그냥 공장사장의 역할만 할 뿐인 게 틀림없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짐작일 뿐이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는 여전히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날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평발 스트라이커 정말 재밌었는데, 나 그거 끝났을 때 엄청 아쉬웠잖아. 나라면 그렇게 재밌는 만화는 절대 못 끝냈을 텐데. 그런 거 보면 전 선생은 참 대단해요. 어떻게 그런 인기 만화가 끝나게 내버려 둘 수 있어요? 제대로만 이어갔다면 제 2의 지옥의 외인구단이 될지도 모를 작품이었는데."

    "이 친구가 만드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내 마음대로 되나요?"

    "에이, 그래도 그건 아니지. 돈을 더 줘서라도 길게 가게끔 하는 게 만화가의 능력인데."

    그렇게 말하면서 날 다시 은근한 눈으로 바라본다.

    술 취한 사람의 저런 시선을 받고 있으니 기분이 더럽다.

    그때 전상길이 나를 슬쩍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 화장실 좀."

    "뭐 드실 거요? 내가 시켜놓을까?"

    "아뇨, 갔다가 식당여직원에게 직접 말할게요."

    "그러실라우?"

    "네"

    "그래요. 그럼."

    곧장 전상길이 자리를 피해준다.

    그러자 그 뒷모습을 보던 박길상이 혀를 쯧쯧 하며 찬다.

    "으그, 참. 어떻게 그런 작품을 그리 일찍 끝내나 그래. 내가 다 아깝네."

    그렇게 말하더니, 날 돌아본다.

    "안 그래요? 나라면 절대 그렇게 안 끝내지."

    "……."

    "그나저나, 신작 계획은 없어?"

    구렁이 담 넘어가듯 반말로 슬쩍 넘어간다.

    "또 괜찮은 거 있으면 내게 가져올 수 있어? 내가 전 선생 저 답답이 보다는 더 줄게. 권수만 보장되면 일시불로 천만 원. 어때?"

    이 인간이 갑자기 뭐라는 거야?

    "아직 대본소 만화 쪽엔 계획이 따로 없어서요."

    "에이, 뭐야? 그럼 설마 보물성 같은 그런 만화 쪽? 거기 돈 안 돼. 한 달에 딸랑 20페이지 밖에 작업하지 않는 곳에 스토리 줘봤자, 얼마 받지도 못하잖아. 아직 젊다고 뭐 이거저것 따지는 거 아니야?"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혼자서 김칫국부터 벌컥벌컥 잘도 들이키고 있다.

    내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한참 들뜬 채로 지껄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그래? 돈이 모자라서 그래? 에라, 기분이다. 천삼백. 나도 그 이상은 힘들어."

    "저기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응? 뭔데?"

    "부끄럽지 않으세요?"

    "……뭐?"

    순간 그의 표정이 멍해진다.

    마치 자신이 뭔가를 잘 못들은 게 아닌 가하는 그런 표정.

    "지금 그리고 있는 '축구의 신' 말이에요. 그거 일본에서 지금 연재중인 만화 아닙니까? 그런데 그걸 대놓고 베껴 그리셨던데."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