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가마니가 아니야 (1)
한국으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다.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건 신문과 뉴스를 살피는 거였다.
하지만, 한국에선 일본만큼 큰 비중을 가지고 일본여객기추락 사건을 다루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먼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쯤으로 취급하는 느낌이 컸다.
물론 나름 신문에서도 기사가 제법 나고는 있었지만, 사건의 중심은 한국인 사망자 6명에 더 집중하는 느낌이었다.
신문에선 사망자 가족들이 오열하는 사진, 그리고 이런 저런 흥미성 기사가 많을 뿐이다.
지금 한국의 관심사는 다음 달에 남북최초로 이산가족상봉에 맞춰져있다. 그 덕분에 남북이산가족이 만난다는 사실에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
사실, 이 이산가족 상봉이 가능해진 이유는 작년에 북한에서 보내준 수해이재민을 돕기 위한 구호물품이 계기가 되어 올해 있었던 회담의 결과였다.
그리고 자잘한 사건들과 스포츠 소식에 묻힌 느낌이다.
그 때문일까.
일본에서 돌아온 나와 쌍둥이들도 거기서 겪은 일들을 조금씩 잊어가고 있었다.
-다음은 권두컬러입니다. 이번 컬러를 도와줄 분은 저번과 다른 일러스트레이터입니다.
"아, 네. 부탁드릴게요."
-네. 그리고 저번에 부탁하신 더티페어랑 Z건담 녹화테이프도 오늘 중으로 보내겠습니다.
최근 더티페어가 일본에서 방영을 시작했고, Z건담의 인기는 최고다.
특히 더티페어의 경우엔 며칠 전 코미케에서 봤던 코스프레를 보고 떠올려 부탁한 일이었다.
더티페어는 지금 일본에서 엄청난 핫한 만화니까, 이 시기엔 반드시 챙겨봐야 할 중요한 애니다.
"번번이 감사합니다."
-하하, 뭘요. 혹시 다른 건 없으십니까?
"아뇨. 지금은 괜찮아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또 전화 드리겠습니다.
"네."
지로와의 통화를 끊고 나자마자 갑자기 화실 문밖에서 소리치는 소리가 들린다.
"야, 문 열어줘! 얼른! 이러다 쩌 죽겠어!"
갑작스런 큰소리에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작업을 멈추고 바라본다.
"빨리! 어여! 죽는다니까!"
거실 창밖으로 이대봉의 얼굴이 보인 뭘 들고 있는 건지 낑낑대며 버럭 소리 친다.
"나 죽어!"
"저 인간, 갑자기 왜 저래?"
"내가 나가볼게."
내 맞은편에 있던 박상식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서둘러 거실 문 쪽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랬더니 이대봉이 커다란 수박 한통을 양손으로 붙들고 낑낑거리고 있다. 그리고는 문을 연 박상식에게 버럭 했다.
"뭘 그렇게 멀뚱멀뚱 쳐다보냐? 어서, 받아줘. 지금 손가락에 감각이 없어, 빨리!"
놀란 박상식이 그것을 받아들자 이대봉이 정말 손가락이 아픈지 폈다 오무렸다를 빠르게 한다. 그리고는 머리를 들며 한 탄했다.
"으아, 이렇게 더운 날 어쩌자고 이렇게 문을 꽉 닫고……, 오. 시원한데?"
갑자기 외부와 다른 시원한 공기 때문에 익어가던 이대봉의 얼굴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그리고는 거실 턱에 털썩 주저앉더니 그대로 축 늘어졌다.
"아, 좋구나, 좋아."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널브러진 이대봉이 허우적거린다.
하긴, 며칠 전부터 폭염으로 에어컨을 열심히 틀고 있어서 화실 안은 늘 쾌적한 상태였으니까.
그 때문에 화실 사람들도 작년처럼 일단 출근하면 화실에 살다시피 한다.
올해 이층방중 두 곳에 벽걸이 에어컨도 설치해 두었다.
혹시라도 일이 급하거나, 아니면 작년처럼 이곳에서 생활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미리 준비해 둔 것이다.
방 한곳은 남자, 다른 곳은 여자용으로,
"여긴 완전히 천국이네, 천국. 와 너희들. 이런 곳에서 일하다니 정말 비겁하잖아. 반칙이다."
이대봉이 되도 않는 말로 때를 쓴다.
"비겁은 무슨, 형도 사면되잖아. 요즘돈 많이 벌었을 텐데."
내 말을 듣던 이대봉이 누운 채 그대로 위로 손을 들어 허공에 휘적거린다.
"에이, 아직은 멀었지. 전에 차를 산 덕에 돈도 별로 없어."
"그러게 차를 왜 이렇게 급하게 사."
"야, 너는 방랑벽에 걸린 사나이의 마음을 몰라."
"별로 알고 싶지는 않네. 그딴 건."
"너는 말을 해도 꼭 정떨어지게 하냐? 섭섭하게."
이대봉이 머리를 살짝 들어 올리고 날 쳐다본다. 찌푸린 얼굴로, 그때 부엌에서 여러 가지를 챙겨 가지고 온 경회가 곧장 수박을 쪼개 뭔가를 열심히 만든다.
그 모습을 보던 이대봉이 소리쳤다.
"야, 당장 먹으려고?! 밖에 있던 수박이라 미지근할 텐데."
"얼음 가져왔어. 수박화채 해먹으면 돼."
경희가 쇠그릇 안에 담긴 조각얼음을 들어 보이며 싱글싱글 웃는다.
그제야 이대봉이 피식 웃었다.
"오, 수박화채 좋지. 얼음 넣으면 시원할 테고."
"당연하지."
그때 성준희랑 박수미가 나섰다.
"나도 도와줄게."
"저도 도울게요."
두 사람이 경희에게 다가가 같이 칼과 숟가락을 이용해 수박을 해체하게 시작했다.
"그나저나 수박 진짜 크다. 이거 사려고 새벽시장에 간 거야?"
경희가 수박을 요절내면서 묻자, 이대 봉이 어깨를 들썩이며 대답했다.
"내가 거길 왜 가냐? 그리고 지금 시간까지 새벽시장 열었을 리도 없잖아."
"그럼 어디서 샀어?"
"오다가. 트럭에 잔뜩 싣고 왔더라고. 아줌마들이 잔뜩 모여 있길래. 맛도 직접 보고 가져온 거지."
"아, 그렇구나."
머리를 끄덕이던 경희가 한 조각을 들어 입에 넣는다.
"오, 엄청 다네. 맛있어."
"방금 말했잖아. 먹어보고 산거라고, 트럭아저씨가 장사 수완이 좋은지, 아줌마들도 맛보더니 막 사가더라니까. 그래서 다 팔릴까봐 서둘러 사왔지."
이젠 더위가 좀 가셨는지 거실로 올라오며 말한다.
"바람잡이 아줌마들로 사기 치는 장사꾼도 제법 있다잖아. 그러니까 사람들 모습에 혹 해서 사면 안 돼."
"어허, 이 오라버니를 뭐로 보고, 내가 그깟 사기꾼들한테 당할 사람으로 보여?"
"응."
"야, 너."
"뭐, 그래도 맛있는 거 골랐으니까, 잘했다고 칭찬해 줄게."
그 말에 이대봉의 표정이 대번에 풀린다.
"땡큐."
"아무튼 트럭 아저씨들 중에 사기 치는 사람 얼마나 많다니까 조심해. 전에 듣기론 주사기에 설탕물 넣는 사람도 있다던데."
"그거, 헛소문이야, 헛소문."
"그런가?"
"그래. 그게 말이 되냐? 주사기라니. 그 나저나 넌 그런 이상한 소문은 어디서 듣냐?"
"학교에서."
"나 참, 신성한 교육의 현장에서 그런 헛소문이 돌다니."
"이왕 사 올 거면 한통 더 가져오지. 여기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이걸로 되겠어?"
"방금 사기가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그리고 아까 내 모습 안 봤어. 하나도 겨우 들고 온 거? 두 개를 들고 왔다면 입구에서 쓰러져 죽었을 거다."
그 말에 경희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찬다.
"쯔쯔, 남자가 그렇게 힘이 없어서야. 실버 오빠라면 다섯 개는 들고 왔을 걸?"
"내가 그 괴물이랑 같냐? 그놈은 사람이 아니야, 털 없는 바야바라고."
그 말에 경희가 뭔가를 떠올렸는지 자지러지게 웃는다.
"하하하, 오빠가 그렇게 말하니까 어쩐지 닮은 것 같아."
"그렇지?"
그렇게 말하며 같이 웃던 이대봉이 멈칫하더니 실버의 자리 쪽으로 시선을 보낸다.
아마도 실버를 의식한 탓일 것이다.
하지만, 실버가 자리에 보이지 않자 이 내 안심을 하더니 곧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 실버가 안보이네. 이 인간은 이 시간에 일 안하고 어디 간 거야?"
"응, 아까 점심 먹고 놀러나갔어. 그리고 지금 아마 오락실 아니면 만화방에 있을걸? 뭐 둘 다 일지도 모르고, 오늘분량의 일은 다했으니까. 늦게 올지도 몰라."
"그 자식은 이렇게 시원하고 좋은 화실을 두고 그런 곳을 왜 가?"
그때 박상식이 끼어들었다.
"우리 동네 만화방, 에어컨 있어. 엄청 시원하던데. 전에 가보니까, 요구르트도 주더라."
"음, 그렇다면 이야, 뭐."
그렇게 말하다가 박상식 자리에 있는 여자연예인 코팅사진을 보고는 한마디 한다.
"뭐야? 너 왕영은 좋아하냐?"
"그럼. 요즘 뽀미언니 그만둬서 얼마나 섭섭한데."
"뭐? 너 아직도 뽀뽀뽀 보냐? 니가 유치원생이니?"
"무슨 소리야? 뽀뽀뽀는 국민방송인데."
박상식은 지금도 아침에 가끔씩 뽀뽀뽀를 본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가끔씩 뽀뽀뽀 주제가를 부르기도 하고, 내 입장에선 그게 왜 국민방송인지 이해하기 힘들지만, 뭐, 그래도 노래가 중독성 있다는 건 인정.
"왕영은 보다는 얼마 전까지 하던 길은정이 더 좋지 않아요?"
이번엔 성준희가 끼어들었다.
성준희의 경우엔 준모 때문에 한 번씩 같이 보다보니 잘 알고 있는 것 같고,
"에이, 그래도 뽀미언니하면 왕영은이죠."
"길은정 인기 얼마나 많았는데요."
"왕영은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아닌데."
두 사람이 은근한 목소리로 다투자 이 대봉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뭘 그런 바보 같은 걸로 싸워?"
"바보 아니거든! 이거 중요한 거야."
"맞아요."
이상한데서 의견이 일치한다.
"그럼 지금은 누군데?"
"지금은 몰라."
"저도요."
그때 가만히 작업을 하고 있던 화실 막 내 김기철이 입을 열었다.
"강석란요."
순간 모두의 시선이 김기철에게 몰렸다.
그러자 주변을 슬쩍 돌아보던 김기철이 머리를 푹 숙이고 작업에 열중한다.
그 모습을 보던 사람들이 풋 하고 웃었다.
이대봉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한숨을 푹 쉰다.
"에이, 관두자."
이대봉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선희가 작업을 멈추고 슬그머니 경희 곁에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
수박에 홀린 눈을 한 채로,
그러자 그 모습을 본 경희가 피식 웃는다.
그리고는 조각 하나를 들어 내밀었다.
"자, 아."
"아."
선희가 날름 받아먹더니 조그마한 입으로 오물거리며 잘도 먹는다.
"야, 같이 먹어야지."
"그러게 두 개는 사왔어야지."
"못 든다니까?"
그때 박상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사올게. 그 트럭 어디 있어?"
"벌써 갔을지 모르니까, 빨리 가봐. 아, 지금 소리 들리는 거 보니까, 근처에 있나보다."
"그래. 알았어."
"돈 줄게."
"넣어둬. 나도 이젠 돈 많아."
그렇게 말하며 박상식이 화실을 나가려 한다.
그때 거실 창으로 실버가 보인다.
검은 봉지를 들고 오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오자, 이대봉이 웃었다.
"야, 너, 먹을 복 있구나. 딱 맞춰 왔네? 그래 어디 갔다 왔어?"
그런데 실버는 그런 이대봉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곧장 내게 다가와서는 들고 있던 검은 봉지를 내밀었다.
"어? 그게 뭔데?"
"만화책."
"응? 만화책? 대본소에서 빌렸어?"
"어."
"그런데 그걸 왜? 재미난 만화가 있어?"
"일단 봐봐."
실버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의구심이 일었다. 그래서 그가 내민 봉지를 받아 만화책을 꺼냈다.
전형적인 대본소만화의 표지다.
주인공이 축구공을 차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제목은 축구의 신이다.
제목은 흔하고 평범하지만, 뭐, 어그로는 나쁘지 않아 보인다.
"박길상 만화가 꺼네. 이게 왜?"
"내용을 좀 읽어봐. 우리랑 연관이 있어."
"……?"
무슨 소리지?
곧 어깨를 으쓱이며 책을 펼쳐봤다.
박길상은 인기 만화가라고 하긴 뭐해도, 대본소만화 쪽에선 제법 이름이 있는 작가인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우리와 무슨 연관성이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전개도 평범하고……, 어?
순간 내가 페이지를 넘기다 멈칫했다.
아주 익숙한 전개, 그리고 스토리다.
문제는 이게 그냥 익숙한 정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거……."
"맞아. 내용이 파시엔시아를 그대로 베낀 만화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