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법석 사인회 (7)
여자애가 사람들 사이로 뛰어들고 나자 곧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뭐야? 방금 그 여자애. 그리고 좀비 사무라이는 또 뭐고."
"그거 있잖아. 전에 소년매거진에서 연재했던 삼사라 복제만화라던 그거."
"그런 만화가 있었어?"
그때 누군가 그 대화에 끼어든다.
"아, 그거 저도 알아요. 만화 제목은 생각 안 나는데, 아무튼 그거 스스로 스토리가 꼬여서 대충 마무리 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맞아요. 그거. 대놓고 그림체에 배경설정까지 베껴서 말이 많았어요."
"그러니까, 아까 그 여자애가 그거 그린 만화가라는 거죠?"
"네. 그런데 그걸, 저기 저 써니 선생님이 단번에 알아차린 모양이에요."
"와, 역시 본인 맞는가 보네. 그림만 보고 단번에 쉽게 알아버린 걸 보면."
"아무래도 그렇겠죠. 본인 그림이니까. 그나저나 진짜 대단하다 가짜를 만든 주제에 여기 와서 깽판을 치려했다니. 무슨 낯으로 저런 뻔뻔한 짓을……."
그렇게 사람들이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임에도 친한 사람들처럼 이야기에 빠져있다. 아무튼 덕분에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
어쨌거나 나도 아직 얼떨떨한 상태다.
곁에 있던 경희나 스미레도 마찬가지 모습이고, 특히 스미레의 경우엔 알바여자애의 실력에 좀 충격을 받은 모양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특히 그림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이라면 이럴 수도 있겠지.
아무튼 진짜 걔 도대체 뭐지?
그냥 그림 좀 잘 그리는 알바생인 줄 알았더니, 좀비 사무라이를 그렸던 만화가라니.
좀 많이 충격적이다.
그래도 우리에게 앙심을 품었다는 건 좀 이해가 되긴 한다.
우리 덕분에 이야기가 꼬여서 망했으니까.
물론 걔 입장에서 보자면 그런 거고, 우리입장에선 도둑질을 당한 거니까 피해라면 우리가 더 큰 거지만,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거랑 같은 건가?
어쨌거나 전에 그 좀비 사무라이 사건 이후, 지로에게 듣기론 그거 그렸던 만화가는 연재중지와 함께 자취를 감췄다고 하던데, 그동안 독자들의 수많은 비난을 감수하던 소년매거진도 결국 꼬리 자르기로 상황을 대충 무마했던 모양이고, 출판사 입장에선 판매만 충분히 된다면 그 정도는 감수하려 했지만, 좀비 사무라 이의 스토리가 꼬이고 인기가 떨어지자마자 서둘러 쳐 낸 거겠지.
이래저래 힘없는 사람이 피해를 보는 건 시대에 상관없구나.
작가로서 자격 여부를 떠나서라는 단서를 붙여야 하겠지만.
아무튼 여전히 실내는 소란스럽기만 하방금 벌어진 황당한 사건으로 인해 서 점 실내가 시장바닥처럼 변해가고 있는 분위기다. 그 때문에 직원들도 좀 당황스러워하는 분위기다.
키도와 니시다도 사인을 멈춘 채로 선희쪽만 보고 있고.
그때 진행자가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자자, 여러분 진정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계속 이러시면 사인회가 제대로 진행 될 수 없으니 조금 조용해 주시구요. 주변에 있는 직원들의 지시에도 좀 따라 주세요. 네,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곧장 진행자가 주위를 환기시켰다. 그리고는 다시 뭔가를 이야기 하려던 때였다.
갑자기 니시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선희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작은 소리로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일단 행동은 좀 조심스럽기는 한데…….
주변 사람들에게야 만화가들끼리 뭔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일 테지만, 애초에 저 니시다와 선희는 안면을 튼 적이 없다.
그나저나 저사람 선희에게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키도는 늘 니시다를 음흉한 놈이라며 말하고는 했는데, 쓸데없는 얘기라면 까짓 거 미친 척 하고 튀어나가서 한 대 쥐어박아버릴까?
그런데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선희의 인형 머리통이 아래위로 살짝 까닥거린다.
어?
이번엔 선희가 뭔가를 수긍한 모양인데.
그런데 그때 선희가 테이블에 놓아둔 스케치북을 다시 펼치며 간단하게 캐릭터그림을 그리고 거기에다 사인을 한다. 그리고는 그 종이를 북 찢어 니시다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그것을 받은 니시다가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꾸벅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엥?
저사람 지금 선희 사인을 받으려고 그런 건가?
그때 주변에서 웅성거린다.
"지금 에스퍼 존 만화가가 써니에게 사인 받고 좋아하는 거 맞지?"
"어. 저 만화가 양반 인지도가 제법 있을 텐데, 어지간히도 써니 팬이었나 보다. 하긴, 내 주위에 만화 그리는 애들 좀 있는데, 걔들도 삼사라만큼은 정말 최고라며 인정하고 있긴 하더라고."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빨리 시작해 주세요! 사람들 기다리고 있는데."
그 말에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며 나서 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진행자가 곧장 시작한다는 소리를 한다.
그리고는 한사람씩 사인을 받기 위해 앞으로 간다.
젊은 여자 한명이 선희 앞으로 다가가더니 웃으며 말했다.
"써니 선생님. 팬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책을 내민다.
이제야 사인회가 제대로 시작되려나 보다.
그런데 선희의 모습이 좀 이상하다.
매직을 들고도 머뭇거리는 모습이 아까 와는 많이 다르다.
본인이 하고 싶어 했으면서도 정작 기회가 왔는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그 모습을 보던 경희가 날 툭 쳤다.
"쟤, 지금 긴장했어. 어떡해?"
"뭐?"
선희가 긴장을 해?
천하의 얼음공주가?
그런데 정말 경회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동작이 부자연스럽다.
그래도 나름 제대로 된 사인을 해보겠다며 팬이 내민 책을 받아든다. 그리고 가장 첫 페이지 하얀 부분에 글자를 쓰기 시작한다.
아까, 그 알바생이랑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잘만 쓰더니, 어째 계속 움직임이 이상하다.
그리고 약간 손도 떨고 있는 것 같다.
"힘내, 선희야."
그런 선희를 보며 경희가 중얼거리듯 한다.
들리지도 않을 텐데, 경희의 응원 때문인지 그제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손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다.
마치, 술을 좋아하는 노인들의 손 마냥 부들부들 떨어댄다.
하지만 어찌어찌 어렵게 책 위에다 사인을 완성해 나간다.
그리고 사인이 끝나자마자 몸을 뒤로 했다.
먼 곳에서 봐도 평소 연습하던 사인과 달리 글자가 비뚤 빼뚤이다.
그 사인을 받아든 여자 팬이 좀 당황하는 것 같더니, 이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감사해요. 긴장하신 모습 보니까, 오히려 친근감이 있어서 좋아요."
얼어있는 선희에게 건넨 한마디에 경직되었던 어깨에 힘이 빠지는 게 보인다.
그러더니 선희가 커다란 인형 머리통을 긁적인다.
그런데 그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럽다.
마치 인형 전문 역을 하는 사람들처럼 익숙해 보일 정도다.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깜짝 놀랐다.
그때 주변에 있던 젊은 여자애들이 꺄악 거리며 좋아라 한다. 남자들도 표현은 안하고 있지만 좀 심쿵 한 것처럼 보이고.
당장 키도 옆에 있는 니시다만 봐도 표정이 다르니까.
그나저나 선희 저 녀석.
평소라면 절대 저런 행동을 할 리가 없는데, 도대체 뭐야?
내가 황당해 하며 바라보는데, 곁에 있는 경희도 나와 비슷한 표정이 된다.
"재, 뭐야? 전혀 다른 사람 같아."
뭐랄까, 가면의 효과 같은 걸까?
평소엔 하지 못하는 행동도 가면을 쓰게 되면 자신의 내면이 나타나는 뭐 그런 종류인 모양이다.
아까 여자 팬이 했던 말로 인해 용기를 얻었던 건지도 모르고.
어쩐지 이제까지 선희의 알지 못했던 모습까지 보는 것 같아 신선한 느낌이다.
아무튼, 그 덕분일까 선희 쪽에 선 사람들의 숫자가 월등히 많아진다.
그 때문에 키도와 니시다는 그런 선회의 들러리가 된 것처럼 어째 애처롭다.
하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그런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저 웃고만 있다.
특히나 선희의 귀여운 행동에 두 사람은 삼촌미소까지 짓고 있다.
아무튼 이런 주변사정에 관계없이 선희는 여전히 인형 캐릭터 같은 귀여운 제스처를 보이며 사인을 즐겁게 해나가고 있다.
마치 진짜 캐릭터 인형의 역할에 충실한 것처럼.
덕분에 사인회의 분위기가 아까보다 더 좋아졌다.
사람들은 선희의 그런 모습을 보며 덩달아 즐거워하는 모양새다.
"나도 저 옆에서 인형 탈 쓰고 서 있을까? 너무 재밌겠는데."
"넌 좀 진정해라."
"히잉."
그렇게 사인회는 약간의 해프닝 이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계속 몰려오는 것도 문제였다.
그럼에도 선희는 여전히 활기찬 움직임으로 사인을 해 나간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인을 받은 사람들이 주변에서 떠나지 않은 덕분이다.
그 때문에 써니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까지 몰려들고 있었다.
이래서야 끝나기나 할는지.
한참을 그렇게 진행하다가 늦은 오후가 되자 어쩔 수 없이 협의하게 사인회를 멈추었다.
몰려든 사람들은 아쉽다는 반응이었지만, 뭐 그래도 무작정 끝없이 사인회만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물론 선희는 더 하고 싶어 하긴 하지만.
그 모습을 보던 경희가 중얼거렸다.
"재, 지금 중독됐어."
"중독이라니."
"사인 말이야. 사인에 중독된 것 같다고, 만화에 빠져서 밤새 그리는 거랑 비슷한 현상."
"아……."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하기야, 선희 저 녀석은 누가 말리지 않으면 밤새 그림을 그릴 정도로 한번 시작하면 정도껏이라는 게 없으니까.
아무튼 사인회를 마무리하고 모두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이동했다.
이동하는 중간에도 선희는 캐릭터 특유의 귀염성 끄는 동작을 하며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고, 그에 반응한 이들이 환호다.
그렇게 이동한 우리들은 직원들이 안내한 실내로 들어간다.
아마도 회의실인지 둥그런 테이블 주변에 의자들이 따닥따닥 붙어있다.
문을 닫고 나서는 창문에 달린 알루미늄 블라인드까지 치고 나자 선회가 헬로 키티 탈을 벗었다.
머리가 잔뜩 젖어 있는데, 표정이 평소보다 밝아 보인다.
뭐랄까, 굉장히 재미있게 놀고 온 애처럼 보인다.
"어머, 머리 좀 봐. 엉망이잖니."
"잠깐, 손수건이랑 빗 있어."
스미레가 자신의 가방을 열어 그것들을 꺼내 경희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경희가 서둘러 선회의 머리를 정리하기 시작한 그러면서 선희의 머리통에 코를 가져가며 킁킁거린다.
그 모습을 보며 내가 한소리 했다.
"야, 냄새를 왜 맡아?"
"그래도 냄새는 별로 안 나니까, 다행이 네."
"나 참."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이 와중에도 어린 동생을 챙기는 언니 같은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고,
"오늘 재밌었니?"
경희의 물음에 선희가 머리를 까닥거린다.
그 모습을 보던 스미레가 부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다.
아, 쟤는 형제, 자매가 없다고 했지.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키도가 들어왔다.
"와, 역시 왔구나, 우리 써니."
"난 경흰데?"
"아, 그렇구만. 미안하다."
그렇게 말하더니 크게 웃는다.
"좀 갑작스럽긴 하지만 너희들을 만나니까 좋구나."
연락 없이 왔다고 화낼 줄 알았더니,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다.
"뭐, 이겼으니까 쓸데없는 부탁을 할 필요도 없고."
"이기다니? 거기다 부탁은 또 뭐고."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렇게 말하며 손을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시 크게 웃었다.
뭐야?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감도 안 잡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