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84화 (184/425)

요란법석 사인회 (6)

뒤늦게 진행자가 마이크를 입에 가져갔다.

[삼사라 작가이신 써니 선생님의 사인 이 곧 시작되겠습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선희가 앉은 자리 쪽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제일 앞줄에 선 사람들은 이미 단행본을 손에 쥐고 있다. 아마도 미리 사둔 모양이다. 그리고 뒤늦게 단행본을 사들고 뛰어오는 사람들도 있다.

실은 그보다 주변에 모여 있는 구경꾼들이 더 많아 보인다. 일반인뿐만이 아니라 직원들까지 구경하려고 몰려드는 바람에 온통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자자, 줄을 서 주시구요. 주변에 계신 직원들은 고객분들 통제 부탁드립니다.]

진행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자 같이 구경하던 직원들이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통제를 시작한다.

애초에 일반 직원이라 통제하는 것이 어설픈 탓에 주변에 있던 일반인중 몇몇은 불만 섞인 음성으로 짜증을 부리기도 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직원들의 지시에 잘 따라주고 있다.

덕분에 금세 주변이 정리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 시선은 여전히 귀엽고 커다란 탈을 쓴 선희를 향하고 있다.

그것을 보던 경희가 한국말로 조그맣게 말한다.

"와, 선희의 인기가 많은 건지. 저 인형 탈의 인기가 많은 건지 헷갈리네."

"……?"

스미레가 알아듣지 못해 쳐다보자 다시 일본어로 설명한다. 그러자 스미레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헬로키티가 이렇게 인기가 많을 리가 없잖아."

스미레의 핀잔에 경희가 피식 웃었다.

"하긴, 그럼 아까 길거리에서도 난리 났겠지."

경희의 말을 들으니 문득 골목에 앉아 있던 여자가 떠오른다.

땀에 흠뻑 젖은 머리를 한 채 피곤한 얼굴을 하던 여자 알바생.

이 더운 날 개고생을 하고는 그대로 가버렸으니 알바 비는 못 받았으려나?

나도 참 오지랖은.

갑자기 왜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떠오른 건지.

그때 진행자가 선희 쪽으로 준비가 되었냐는 신호를 보내는 게 보인다. 그러자 선희 뒤에 있던 지로가 머리를 끄덕인다.

[자, 그럼 사인회를 시작…….]

그때였다.

"잠깐만!"

갑자기 실내에 여자목소리가 크게 들린다.

줄이 서 있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는 곳에서.

그 때문일까, 사람들의 웅성거리던 소리가 삽시간이 사라지며 실내가 조용해진 사람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다 다시 웅성거린다.

진행자도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어깨를 으쓱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죄송합니다. 그럼 이제 사인회를…….]

"아 씨, 잠깐만 기다리라니까요!"

[…….]

다시 들린 여자의 음성.

그때 어딘가에 몰려 있던 사람들 쪽에서 웅성거리더니 그곳의 사람들이 서로 간격을 벌린다. 그러자 그 가운데에서 여자의 모습을 드러났다.

저 여자앤가?

갈색으로 염색된 머리칼의 여자인데, 얼굴이 좀 날카롭게 생겼다.

아니, 눈빛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드는 건지도, 조금 어려 보이는데, 정확한 나이를 가늠하진 못하겠다.

대충 20대 초반정도?

그나저나 저 얼굴……. 익숙하네.

그러다 순간 어디서 봤는지 떠올랐다.

"……어?"

내가 놀라고 있는 사이 여자애가 앞으로 나서며 큰 소리로 따지듯 말했다.

"그 헬로키티 머리 쓴 분, 진짜 삼사라 작가 써니 맞아요?"

그 순간 진행자가 뭔 황당한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을 짓고는 뭔가를 말하려다 아차 하며 다시 마이크를 입에 가져간다.

그리고는 표정 관리를 하며 말했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이렇게 소란을 피우시면 곤란합니다. 일단 저희는 행사를 진행해야 하는 입장이고…….]

"저 사람이 쓰고 있는 저 인형 머리, 저거 내가 아까 쓰던 물건인데."

[……네?]

그녀의 말대로다.

아까 길거리에서 봤던 그 헬로키티 알바생이니까.

머리가 흠뻑 젖어 있던 모습이랑 좀 달라보여서 금방 못 알아봤는데.

저렇게 보니 골목에서 봤을 때보단 좀 어려보이긴 하네.

아무튼 알바생의 말에 모두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진행자도 당황스러운지 눈알을 사방으로 데굴거리기만 할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하기야, 저 양반이 그런 걸 어떻게 증명을 하겠어.

진행자가 전혀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여자가 곧장 선희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물었다.

"그거 시내에 있는 인형 가게에서 가져온 거 맞죠?"

그 말에 잠시 가만히 있던 선희의 커다란 머리통이 위아래로 끄덕여진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 커진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알바생 덕분에 상황이 좀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저 깜짝 사인회 정도가 될 줄 알았는데.

그때 선희 뒤 쪽에 있던 지로가 입을 열었다.

"네. 말씀대로 인형 가게에서 인형 탈을 빌려온 건 사실입니다."

지로도 우리에게 대강 사정을 들었기 때문에 알고 있는 일이었다.

사실, 저 헬로키티 머리통은 보증금으로 얼마의 돈을 주고 인형가게에서 잠시 동안 빌려온 것이다.

어차피 가게 주인도 알바생이 옷까지 가져가버린 데다가 할 사람도 없는 상태라고 생각했는지 선뜻 빌려주긴 했고.

아무튼 그렇게 쓰고 온 것인데, 저 머리통을 썼던 알바생을 여기서 만날 줄이야.

어쨌거나 지로의 설명을 듣고 난 알바생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제대로 된 사인회 맞아요? 저분은 진짜 써니 작가가 맞는지도 의심스럽네."

우리가 자신이 쓰던 머리통을 빌려왔다.

고 불만인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건가?

"맞습니다만."

"그걸 어떻게 믿죠? 얼굴을 저렇게 뒤집어쓰고 있으면 작가 본인인지 아닌지 알게 뭐야?"

알바생의 말에 사람들이 수긍한다는 듯 머리를 끄덕인다.

하기야, 삼사라 작가랍시고 웃기는 커다란 인형 탈을 쓰고 앉아 있으니 쉽게 믿기는 어렵겠지. 거기다 애초에 얼굴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으니.

대충 여자라는 건 이름 때문에 알고 있을 테지만, 그래도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따지는거 아닌가?

"작가님이 얼굴을 공개하는 걸 꺼려서 그런 것이니까, 좀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가만히 상황을 지켜만 보던 선희가 지로를 쳐다보자 그가 다가갔다. 작은 목소리로 뭔가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이내 지로가 근처에서 커다란 스케치북 하나를 들고 온다.

그것을 선희에게 건네자 곧바로 스케치 북을 펼치고는 사인용으로 준비해둔 매직을 이용해 그림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선희의 손 움직임이 느리다.

매직이 손에 익지 않아서는 아닐 텐데, 그러다 순간 왜 그런지 이해를 했다.

아, 저거 인형 탈이 문제구나.

아무래도 시야가 좀 가려져서 제대로 그리기가 힘들 테지 거기다가 머리통이 까닥거리고 있으니 신경도 쓰여서 평소처럼 머리를 처박고 그리는 것도 안 될 테고,하지만, 수없이 그렸던 관성이 있어서 그런지 좀 느리긴 해도 능숙하게 그림을 완성시켜 나간다.

잠시 후, 선희가 스케치북을 들어올렸다.

삼사라의 주인공, 켄과 다크 프린세스의 칼파나가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는 모습이다.

매직으로 그려서 좀 단순하긴 해도 특징을 잘 살려서 그려서 평소의 포스가 그대로 전해진다.

그것을 보고 나자 사람들이 다시 수긍하는지 머리를 끄덕인다.

"써니가 맞네."

"와, 그림 진짜 잘 그리긴 한다."

"저 그림 얻어 가면 좋겠는데. 나중에 달라고 해볼까?"

"아서라."

그러다가 누군가 끼어든 알바생 여자애를 나무라는 듯 말한다.

"설마, 사인회에서 사기라도 칠거라고 생각한 건가? 너무하네, 저 애."

"맞아. 여기 와서 괜히 물 흐리고 있어."

하지만 다른 목소리도 있다.

"팬으로서 진짜인지 의심하는 건 수긍이 돼. 나도 솔직히 좀 그랬거든."

"맞아, 합당한 의심이지."

그렇게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리며 대충 상황이 정리되어 가는 분위기가 되자, 다시 진행자가 마이크를 들고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사인회를…….]

"잠깐 있어 봐요!"

아까 그 알바생 여자애가 또 나선다.

아, 재는 진짜 왜 저래?

아직도 안 끝났어?

저 정도면 대충 된 거 아닌가, 또 뭐가 불만인지?

어쨌건 저 여자애 때문에 말을 더 잇지 못한 진행자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다. 그리고는 그래 또 뭐냐, 하는 표정으로 팔짱을 낀다.

이쯤 되면 저 양반도 열 받을 만하지.

그런데 여자애가 이번엔 선희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그 앞에서 멈춰 선다.

"저기요. 그걸 로는 그쪽이 써니가 맞다는 거에 동의 못하거든요."

"……?"

동의를 못하다니,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나도 그 정도는 그릴 수 있으니까."

뭐?

쟤가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사람들도 웅성거리고 있다.

그때 여자애가 선희 앞에 있는 스케치 북을 집어 들고는 뒤쪽으로 한 장 넘기고는 선희 곁에 있는 매직을 들어올린다.

그리고는 이내 그곳에다 그림을 슥슥그려대기 시작했다.

그리는 동작만으로는 아까 선희의 그림보다 더 능숙해 보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가 그림을 다 그렸는지 이내 그것을 사람들을 향해 번쩍 들어 보인다.

선희처럼 켄과 칼파나를 그렸는데…….

어?

분명 다른 동작을 하고 있는 그림임에도 선희의 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나도 그냥 아무생각 없이 보면 선희 그림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사람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다.

"와, 진짜 똑같네?"

"그러게. 아까 그림이랑 비슷하지?"

"삼사라 그림 맞잖아."

"이거 미묘하네."

"와, 지금 이 상황, 흥미진진하다. 너무 재밌어."

방금까지만 해도 선희를 당연히 삼사라의 작가로 받아들이던 분위기가 갑자기 이상해져버렸다. 하기야, 저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또 등장해버렸으니 당연한 반응인가.

어쨌건 나도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곁에 있던 경희와 스미레도 마찬가지 표정을 짓고 있다.

얘네들이야 당연히 선희가 써니 본인이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문제는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 하냐는 것이다.

아니, 애초에 설득이고 뭐고 그럴 이유도 없었는데, 쟤가 등장하면서 갑자기 상황이 복잡해져 버렸다.

여기서 뭐, 코난이라도 등장해야 하나?

미래소년 말고, 명탐정 코난,

"자 이제 뭐로 본인이라는 걸 증명할 거죠? 설마, 사인이 똑같다고 말하고 싶다면 관두세요. 저도 사인 정도는 흉내 낼수 있으니까."

그 때 선희 뒤쪽에 있던 지로가 입을 열었다.

"제가 삼사라 담당 편집자인데요. 이분맞습니다."

"써니가 나오기 힘들어서 그림을 대충 비슷하게 그리는 사람이 대신 나온 건지 어떻게 알죠? 출판사에서 나왔다고 해도 믿기 힘드네요."

이젠 점점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의심하는 듯한 눈빛으로 변해가고 있다.

뭐야?

왜 이런 분위기가 된 거지?

"내가 써니와 친분이 있는데, 그걸로는 부족하겠소?"

이제까지 구경만 하던 키도까지 나섰다.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 내 얼굴까지 확인한 탓인지, 탈을 쓰고 있는 사람은 선희라고 확신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 여자애는 도무지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자세다.

쟤 진짜, 우리랑 원수진 거 있나? 왜 저렇게 집착하는 거지?

실내 분위기도 이젠 좀 혼란스럽다.

그런데 선희는 아까부터 머리를 숙이고 있다.

얼핏 보면 저 큰 머리통이 아래로 숙여져 있어서 어쩐지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뭔가 잘못을 뉘우치는 듯한 느낌도 준다.

왜 저러지?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알바생 여자애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있다.

그러더니 곧 연습장을 넘기고는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다.

얼핏 봐도 그림은 아닌 것 같은데, 글자를 쓰나?

잠시 후 종이를 번쩍 든다.

그러자 이번엔 사람들의 시선이 스케치 북 쪽으로 쏠린다.

글자가 쓰여 있다.

물론 한글은 아니다.

그런데, 내용이…….

엇!

그 순간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확 커진다.

여자애는 아직 선희가 들고 있는 스케치북을 안 보고 있다.

그런데 주변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느낀 탓인지 여자애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리고는 곧장 시선을 뒤쪽으로 머리를 돌린다.

그다음 선희가 들고 있는 스케치북으로 시선이 가더니 표정이 굳어버렸다.

"……!"

스케치북에 써진 글은 이랬다.

[당신, 좀비 사무라이 그린 사람?]

그 순간 여자애가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더니 곧장 사람들 사이로 뛰어들어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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