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83화 (183/425)

요란법석 사인회 (5)

"이걸로 하고 싶어."

선희가 고른 헬로키티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냥 얼굴을 숨기는 가면정도를 구할 생각으로 나왔는데, 저렇게 커다란 인형 탈이라니.

스미레를 돌아보니 얘도 좀 황당한 얼굴이 되어있다.

표정을 보니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보다. 헬로키티 이거……. 머리통만 덜렁 놓여 있을 뿐, 다른 곳에는 비슷한 물건도 보이지 않는다.

이거 파는 거 맞나?

"여기에 저런 것도 팔아?"

경희도 가게를 슬쩍 둘러보며 얘기한다.

여기는 인형가게가 맞고, 여러 가지 인형들이 판매가 되고 있다.

테디베어도 보이는 것 같고, 바비 인형도 보인다.

물론 헬로키티 인형들이 많기도 하고, 그러나 어디를 둘러봐도 이렇게 사람이 뒤집어써도 될 만큼 커다란 인형 탈은 보이지 않는다.

그제야, 이게 뭔지 알 것 같다.

"이거 파는 거 아닌 것 같네."

"그럼 뭐야?"

"아마도 여기 서서 홍보하는 사람이 쓰던 물건이겠지."

경희는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선희도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머리를 끄덕인다.

하지만, 표정은 아쉬움이 남아있다.

"선희야, 이거 파는 거 아니라니까 그냥 포기해. 이 언니가 더 멋진 가면 찾아볼게."

"내가 언니야."

"야, 오늘만이라도 좀 내가 언니 해보자."

"……싫어."

"쳇."

그렇게 투덜거리던 경희가 곧 뭔가를 봤는지 멈칫한다. 그리고는 가게 옆 골목 쪽을 향해 시선을 보낸다.

"어?"

나도 그런 경희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골목으로 시선이 간다.

"……?"

좁은 골목 어둑한 자리에 누군가 붉은 옷을 입고 앉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빛 때문에 자세히 보이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눈이 적응되자 앉아있는 사람이 젊은 여자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런 여자가 담배를 뻑뻑 피고 있다.

뭐, 여자가 담배를 핀다고 해서 우리의 시선을 끈 건 아니다.

바로 그녀의 붉은색 복장이 이유였다.

여자가 입고 있는 건 두툼한 옷으로 이런 여름에 입기엔 한눈에도 이상해 보이니까.

그리고 순간 그 옷이 헬로키티의 복장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역시, 가게 앞에 놓여있는 저 머리통의 주인인 모양이다.

그나저나 여자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얼핏 봐도 머리칼은 땀에 흠뻑 젖어있고, 표정도 짜증이 잔뜩 묻어있다.

잘은 모르지만 대충은 짐작이 된다.

이 더운 날씨에 저런 걸 뒤집어쓰고 있으려니 미치고 환장할 테지.

아직 점심시간 전임에도 날씨가 이렇게 후끈한데.

보나마나 속으로 잘못 걸렸네, 똥 밟았네.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름 심각한 표정인데 저 모습을 보고 상황이 짐작되니 저절로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기분이다.

그런데 그때 뒷문이 열리며 중년남자 한명이 나온다.

그러더니 잔뜩 화난 표정으로 앉아있는 여자에게 뭔가 한소리 한다.

상황으로 보면 '야, 일 안하고 여기서 뭐해?' 정도의 느낌이다.

그런데도 여자는 아무 말 없이 계속 앉은 채로 담배만 피고 있다. 표정은 아까보다 더 짜증이 나 있다.

그런 여자에게 남자가 또 뭔가 이야기를 한다.

그러자 이야기를 더 듣기 싫었는지 여자가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고는 곧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남자를 노려보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 해! 안한다고! 나 참 더러워서 !"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옷을 입은 채 우리가 보고 있는 골목의 맞은편으로 걸어가 버린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남자가 뭐라고 소리쳤지만, 들은 채 만 채다.

보나마자 '옷은 벗어놓고 가!' 였겠지.

"……."

"……."

그때까지 이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던 우리 중 경희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여자, 열 받을 만하네. 이 더운 날 이런 일을 어떻게 해? 나라면 1분 만에 쓰러지고 말거야. 안 그러니?"

"그래. 나도 솔직히 이 정도 날씨라면 죽을지도 몰라."

스미레가 경희의 말에 동조한다.

하기야 이렇게 도로변에서 저런 걸 쓰고 있다고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긴하다. 아무리 가게 그늘 밑에서 하라고 해도 저건 무리지.

"선희야, 넌 저런 걸 보고서도 쓰고 싶니?"

"맞아. 다른 계절이면 모르겠는데, 여름이면 좀 힘들잖아. 그러니까 다른 걸로 하자."

나도 경희를 거들고 나서자 선희는 잠시 생각에 빠진 모습이다.

역시 이 날씨에 저걸 뒤집어쓴다는 건 본인도 상상하기 싫을 테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선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 머리. 이제 쓸모없는 거 아닌가?"

"뭐?"

"그러니까, 저거 이제 쓸 사람이 없잖아. 옷도 아까 그 여자가 가져가 버렸고."

"……."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나?

***

서점 내에서 사인회가 시작되었다.

두 개의 테이블 마련되고 그 곳에 키도와 니시다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들의 뒤편엔 최근 연재중인 작품의 커다란 일러스트와 제목이 쓰여 있다.

곧 운영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신호를 보내자 서점이 오픈 할 때부터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각자 서점에서 구입한 두 만화가의 작품을 들고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선다.

생각보다는 모인 사람들의 숫자가 상당하다.

얼핏 봐서는 두 만화가들의 테이블 앞에 선 사람들의 숫자는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런데 다른 게 있다면 니시다 쪽엔 여자들이 많이 보인다는 점이고, 키도에게 남자 팬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거다.

[지금부터 '진심의 남자'의 키도 죠타로 선생님과 '에스퍼 존'의 니시다 유키 선생님이 사인회가 시작되겠습니다. 한분씩 앞으로 나오셔서 사인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줄을 선사람들이 한사람 씩 앞으로 나선다.

그와 동시에 팬들이 내민 책에 니시다와 키도가 사인을 시작하고, 이내 사인한 곳에 특별히 준비된 미니 일러스트 스티커를 한 장씩 붙인다.

"어머, 이 스티커는 뭐죠? 너무 예뻐요."

"아, 네. 서비스입니다."

니시다가 팬의 질문에 태연히 대답한다.

그런 니시다에게 키도가 시선을 보낸다.

서비스 좋아하네.

이 스티커의 본래 목적은 누가 사인을 더 많이 했나하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 준비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진짜 목적을 이야기할 수는 없는 일이라 키도는 혀를 한번 쯧 하고 찰뿐이다.

그때 오오타게가 음료수를 가져와 니시다와 키도에게 하나 씩 준다. 그리고는 니시다에게 다가가서는 조용하게 말했다.

"선생님,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여기 담당하시는 분께도 혹시 사인시간이 길어지면 중단할 수도 있다는 말씀 드렸으니까요."

"키도 씨 쪽은 뭐라고 하던데?"

"아, 그게………, 저쪽은 끝까지 하겠다고……."

"그럼 나도 끝까지 간다."

"네? 진심이세요?"

"그래."

"원고마감이 내일까지입니다. 오늘 무리를 해 버리면 내일까지 완성하기 힘들어요."

"까짓 거 밤새지 뭐."

"선생님."

"그만, 지금은 사인 중이잖아."

그렇게 대답한 니시다가 다가오는 팬 때문에 표정관리를 하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렇게 말하며 다가온 여자 팬의 책을 받아 사인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옆을 힐끔거린다.

키도가 묵묵하게 사인을 하다 니시다쪽을 돌아본다.

순간 시선을 거두고는 피식 웃으며 여유 있는 척을 하며 사인을 계속 해나갔다.

분명 키도 쪽도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여기서 절대 밀릴 수는 없는 일이다.

***

음, 그래도 생각이상으로 서점 실내가 시원해서 다행이네.

솔직히 더위 때문에 많이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정도면 괜찮지 싶다.

이 시절에도 에어컨은 빵빵하구나.

그때였다.

"준비되었습니다."

지로가 다가와 이야기를 한다.

이젠 선희만 나가면 되는 건가?

"자, 준비 됐지?"

내 질문에 옆에 있던 커다란 헬로키티머리통이 끄덕거린다.

여기선 되도록 말을 하지 말라고 미리 말해 둔 탓인지 대답은 하지 않는다.

사실 어제 저녁에 지로에게 연락을 했을 땐 그도 깜짝 놀랐다.

-네? 사인회를 하고 싶다고요?

"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얼굴을 숨길 수 있다면 상관없을 것 같기도 해서요. 일단은 말이죠……."

대충 우리의 계획을 설명했는데도 지로는 여전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누가 봐도 어설픈 방법이니 당연하려나.

무슨 복면가왕도 아니고,

아무튼 결국 사인회에 참석하기로 결정을 내렸지만, 지로 입장에서는 큰일이었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준비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당연했겠지.

일단 선희가 나갈 준비를 마친 상황에서 난 서점 내에서 한참 사인회가 열리는 모습을 넌지시 구경했다.

사람이 잔뜩 몰려 길게 줄을 서고 있다.

미리 홍보를 잔뜩 해 둔 상황이니 당연하겠지만, 그만큼 인기작가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에 비해 우리는 예고도 없이 거의 즉흥적으로 시작한 사인회라 어떨지 모르겠다.

그나마 갑작스런 우리의 요구에 오히려 서점 측에서 환영했다니 다행이긴 한데.

잠시 후 테이블이 준비되고 곧장 사인 회가 열리고 있는 곳 근처에 세팅이 된다.

그러자 사인을 열심히 하고 있던 키도와 니시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더니 사인을 멈추고 곁에 있는 담당들과 뭔가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담당들도 사정을 모르긴 마찬가지다.

그나저나 저 사람이 니시다구나.

나이가 30대라고 하던데, 생각보다 동안이다. 잘생기기도 했고, 그런데, 화장도 한 모양이네?

이대봉보다는 못해도 저 정도 얼굴이면 여자들이 좋아할 것 같다.

쩝, 부럽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길거리에서 키도가 만났던 사람이 입었던 복장과 같은 양복차림이구나.

이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갑작스럽게 준비되는 테이블에 관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잠시 후 선희가 헬로키티의 커다란 머리통을 까닥거리며 테이블 쪽으로 걸어간다.

그 독특한 모습 때문인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몰린다.

키도와 니시다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사인을 하는 것도 잊은 채 선회 쪽을 바라보고만 있다.

둘 다 표정이 '뭐야 저건?'이라고 하는 것 같다.

그 때문일까 이 묘한 상황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하기야, 사인회장에 새롭게 나타난 인간이 머리통에 저런 걸 얹고 왔다는 것 자체가 황당할 테니까.

선희가 자리에 앉자마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린다.

"뭐야? 사인회 마스코트 인가?"

"그럼 더 이상하지. 저거, 헬로키티인데, 만화가들이랑 관계없잖아."

"뭔지는 모르지만, 눈길을 엄청 끄네."

"이것도 이벤트 중 하나인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사이 직원들이 테이블과 배경 세팅을 시작했다.

그리고 세팅이 완성되려는 순간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저, 저거. 진짜야?!"

"악! 뭐야? 거짓말!"

"우왁, 책부터 사와야겠다."

줄을 섰던 사람들이 대열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가방에 들어있던 책을 꺼내고, 대부분은 단행본 코너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갑자기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직원들도 이런 상황에 당황한다.

그리고는 곧장 사람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때 키도와 니시다 역시도 놀란 표정으로 선희 쪽을 바라보고 있다.

선희의 뒤쪽에 커다란 삼사라 일러스트와 작가의 이름인 '써니'가 영어로 대문짝만하게 적혀있는 것을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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