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82화 (182/425)
  • 요란법석 사인회 (4)

    "뭐, 사인을 하고 싶어?"

    "응."

    갑작스런 선희의 말에 멈칫했다.

    며칠 전에 열심히 사인연습을 하던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이 녀석.

    난 왜 일본에 난 뒤에도 전혀 깨닫지 못했을까.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건가.

    내가 그렇게 복잡한 생각에 빠져있는 데, 그때 눈치를 보던 경희가 끼어들었다.

    "아이, 참. 오빠는 왜 그래? 선희가 농담한 거잖아. 맞지?"

    "……응."

    선희가 마지못해 머리를 끄덕인다는 게 눈에 보인다.

    "저기, 오빠는 그런 거 너무 신경 쓰지 마. 선희가 지금 우리 입장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잖아."

    "……맞아."

    경희 때문에 얼떨결에 대답하는 선희.

    녀석, 애쓴다.

    하지만 너희들이 그런 표정으로 말하는 데, 내가 신경을 안 쓰게 생겼냐고.

    그런 우리를 보던 스미레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러니까, 본인이라는 것만 알려지고, 얼굴은 알려지지 않는다면 괜찮은 거 아닌가요?"

    "……어?"

    "……아."

    "아, 죄송해요. 제가 괜한 이야기를……."

    그런데 그 말에 선희와 경희가 반응하고는 날 쳐다본다.

    경희야 뭐 그렇다 치더라도 선희 쟤는 정말……, 내 얼굴이 뚫어지겠다.

    ***

    다음날 오전,

    수많은 차량이 붐비는 도쿄 시내의 도로 한복판, 그 사이에서 느리게 달리는 푸른색 택시가 있다. 그리고 그 안에 키도가 팔짱을 낀 채로 묵묵하게 앉아있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무사 같은 모습을 한 채로 생각에 잠겨있었다.

    -선생님, 서점 주위 주차장에 자리가 없을지도 모르니까, 안전하게 택시를 타고 가세요.

    오늘 아침 일찍 테고시가 전화로 한 말이다.

    사실, 이 전화가 아니었다면 아마 자신의 애마인 86을 타고 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시내의 도로사정을 보니, 담당의 말을 들은 건 잘한 일이었다.

    "……."

    지금 그가 가는 곳은 시내의 유명서점.

    잠시 후 그곳에서 벌어질 사인회 때문이다.

    오늘 사인회는 그냥 단순히 팬들을 위한 이벤트가 아니다.

    니시다와 자존심을 건 싸움이다.

    오랫동안 인기작가로 생활한 니시다였지만, 소년히어로는 키도의 앞마당이나다름없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의 싸움은 절대 질수가 없다.

    앙케이트에서도 앞서고 있지만, 이 사인회를 통해 확실한 우위를 점해야 한다.

    '당신은 할 수 있답니다. 여보, 파이팅~!"

    화실을 나올 때 집사람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입 꼬리를 끌어올린다. 그리고는 혼자 중얼거렸다.

    "당연히 내가 질 리 없지 않소. 걱정 마시오."

    그러자 운전을 하던 택시기사가 룸미러를 통해 키도를 쳐다본다. 그리곤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손님?"

    "아니, 혼자 말이오."

    "아, 네."

    그렇게 말한 택시기사가 머리를 갸웃거리더니 곧장 시선을 전방으로 옮긴다.

    계속 팔짱을 낀 채로 앞을 보던 키도가 시선이 이내 창밖으로 향했다.

    서점까지는 아직 거리가 좀 있다.

    휴일이라 그런지 시내에 사람들이 북적 거린다.

    역시 86을 끌고 나오지 않은 건 잘 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뭔가가 그의 눈에 띄었다.

    "……?"

    순간 차창밖에 스치고 지나간 사람을 돌아보고는 곧장 택시운전사에게 말했다.

    "여기 세워주시오."

    "네? 네, 알겠습니다."

    택시가 멈추자마자 돈을 지불하고는 곧장 내린다. 그리고는 뒤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잘못본거라면 그냥 다시 택시를 잡아타면 될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지나쳐왔던 곳으로 다가가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보인다.

    여러 가지 복장을 한 여자들이 모여 있어서 눈에 확 띈다.

    하지만 키도의 관심은 여자들이 아니다.

    바로 그들 중심에 있는 남자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잘 못 본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바로 남자는 니시다였으니까.

    "……."

    키도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니시다 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의 니시다와는 상당히 다른 복장 때문이다.

    멋들어진 갈색 빛의 양복차림에 머리도 연예인들이나 할법한 화려한 스타일에 염색까지.

    얼굴도 화장을 한 느낌이다.

    주변에 있는 여자들은 인근에서 홍보를 하고 있던 이벤트걸이 대부분이다.

    얼굴이 좀 잘난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정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모양인지 때깔이 완전히 다르다.

    "멋져요, 당신. 이름이 뭐죠?"

    "저희 가게에 꼭 오세요."

    "전화번호에요.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어요."

    도대체 여자들의 이 반응은 뭐란 말인가.

    만화가라는 사실도 전혀 모르는 분위기인데.

    그럼에도 30대인 주제에 저렇게 인기가 있으니 놀랍기만 하다.

    겨우 두 살 차이일 뿐인데.

    하지만 오늘은 정말 키도랑 10살은 차이가 날 것만 같은 외모라 어느 정도 수긍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흥. 남자는 외모가 전부는 아니지.

    거기다 이건 다 화장 때문이다.

    하지만, 이 패배감은 뭘까.

    씁쓸하기만 하다.

    그냥 몸을 돌리려고 하던 그때, 여자들에게 둘러싸여있던 니시다가 키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이 서로 마주치고 말았다.

    "……."

    "……."

    잠시 두 사람 사이에서 스파크가 튄다.

    그러다 니시다가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피식 웃었다.

    "아, 이런. 키도 선생님. 이런 곳에서 우연히 보게 되네요."

    "그렇군. 그런데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사인회에 안 가는 건가?"

    그 말에 니시다가 느긋한 표정으로 시계를 보고는 말한다.

    "뭐,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요."

    "여유가 있다니, 지금도 아슬아슬한데."

    "뭐, 늘 주인공은 늦게 나타나는 법이니까요."

    "……."

    그 말에 주변에 있던 여자들이 눈을 반짝거렸다.

    "사인회? 역시 유명인?"

    "배우인가요?"

    "어쩐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라니."

    "얼굴이 이렇게 멋지니 당연하겠어요."

    여자들이 꺅꺅 거리며 아까보다 더 요란을 떨어댄다.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키도가 미간을 찌푸린다.

    잘 생긴 건 인정하지만 그 정도일까 싶은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것에 평소 관심이 없으니 알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도 한때 폭주족을 잠시 했을 땐 자신도 인기가 있었는데.

    갑자기 그때가 그리워진다.

    그리고 더불어 와이프와 뜨거웠던 그 시절이 떠올라 잠시 여운에 빠진다.

    하지만 그런 감정도 시끄러운 여자들 때문에 금방 깨어지고 만다.

    덕분에 다시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런 키도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니시다는 그저 이런 여자들을 뜨거운 반응에 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는 키도를 다시 보며 입을 열었다.

    "이거 곤란한데요. 이런 분위기라면 조금 늦을지도 모르겠군요. 키도 선생님이라도 먼저 가시는 게 어떠신지."

    "승부는 포기한 건가?"

    "설마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다만 지금 보시다시피 제 상황이 이러니까요."

    능글거리는 니시다를 보고는 쯧 하며 혀를 찬다. 그리고는 곧장 몸을 돌리며 말했다.

    "늦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 팬들까지 모조리 빼앗기고 싶지 않다면."

    "하하하, 명심하죠."

    능청스럽게 말하는 니시다를 뒤로한 키도가 다시 택시를 잡아탔다.

    "재수 없는 녀석."

    그렇게 투덜거리며 곧장 서점으로 출발했다.

    그렇게 멀어져가는 택시를 니시다가 쳐다본다. 그러다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싱글거리던 그의 표정이 이내 굳어버린다. 그리고는 손뼉을 짝짝 쳤다.

    "자자. 그만해도 됩니다."

    니시다의 말에 여자들이 멈칫하고는 그에게서 물러났다.

    "어머, 끝났어요? 난 재미있었는데."

    "저도요."

    "호호."

    그래도 여운이 남은 탓인지 아쉬워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니시다는 냉랭한 표정으로 자신의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

    "자, 여기. 한명 당 하나씩."

    그렇게 말하며 니시다가 여자들 각자에게 돈 봉투를 건넨다.

    여자들이 봉투를 받아 열어보자 그곳에는 천 엔짜리 지폐가 다섯 장이 들어있다.

    그것을 확인한 여자들의 표정이 확 밝아진다.

    "어머, 감사해요.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불러주세요."

    "와아아. 난 그냥 농담인줄 알았는데."

    "전, 그냥 공짜로도 해 줄 수 있어요."

    "저도요. 그냥 아무 때나 불러주세요."

    "이거 제 번호에요."

    "……."

    그런 여자들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짓던 니시다가 곧장 택시를 불러 세운다.

    그리고는 그곳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어머, 부끄러워하는 것 좀 봐. 귀여워."

    "다음에 또 불러주려나?"

    "엄마야, 늦었어. 지배인이 찾을지도 모르겠다. 얼른 가자."

    "응."

    니시다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던 여자들이 곧장 그곳에서 흩어진다.

    택시 뒷좌석에 앉아 있던 니시다가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키도의 모습을 떠올리자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사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은 딱히 계획한 건 아니었다.

    물론 아침 일찍 일어나 유명 헤어숍에서 머리를 하고, 옷도 가장 좋은 양복을 빼입은 건 맞다. 거기다 화장도 전문 가게에서 받기도 했고, 하지만, 여자들은 즉흥적이었다.

    아침 모든 준비를 끝내고 나자 머리에 스친 생각이라 곧장 오오타케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점에서 만나기로 한 오오타케는 다행히 집에 있었다.

    "키도 선생의 화실 앞에 서 대기하고 있어."

    -네? 사인회는 어쩌고요?

    "오늘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그러니까, 무조건 거기서 기다리다가 그 사람 나오면 내게 연락을 해, 베루도모( 友·벨친구)로"

    베루도모는 무선호출기(삐삐)다.

    요즘 슬슬 유행을 타고 있는 새로운 통신기기다.

    물론 무선호출기자체는 이미 70년대에도 사용하고 있었지만, 번호가 뜨는 건 최근이었고 그 때문에 사용자가 늘고 있었다.

    아무튼 니시다의 말에 전화기 너머에서 한숨소리가 들려온다.

    -또 키도 선생님이랑 뭘 걸고 하시는 겁니까?

    "그건 나중에 알려줄 테니까, 담당으로서 자네는 내게 연락만 해주면 되는 거야. 알겠지?"

    -네에~ 알겠어요. 뭔지는 모르지만 이왕이면 이기세요.

    "당연하지."

    그렇게 말하고는 택시를 타고 출발했다.

    그리고 얼마 후 무선호출기에서 숫자가 뜬다.

    출발했다는 뜻이다.

    그는 곧장 그가 지나갈 거라고 예상되는 길목에서 택시를 세웠다. 그리고 즉흥적으로 여자들을 섭외한 것이다.

    혹시나 하고 시작한 일이지만 의외로 여자들은 쉽게 모였고, 운이 좋아 키도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 나서는 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봐야 별것도 아닌 정신승리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일단 이걸로 시작은 좋다.

    ***

    "아까, 키도 오빠 아니었어?"

    "글쎄?"

    그때 거리 주변을 기웃거리던 선희가 입을 열었다.

    "키도 오빠, 맞아."

    "그렇지? 역시. 키도 오빠였구나."

    그 말에 스미레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키도 선생님이었어?"

    "그렇다니까."

    "그런데 같이 대화하던 남자는 누구였지? 혹시 오빠는 알아?"

    "모르겠는데?"

    아까 길 건너편을 얼핏 봤지만 키도라는 것도 확실하지 않았는데, 그런 것까지 알 리가 없다.

    "뭐, 아는 사람인 모양이지."

    "그런가?"

    경희가 머리를 갸웃거리는 동안 선희가 뭔가를 발견했는지 갑자기 빠른 걸음으로 걸어간다.

    "어? 어디가?"

    하지만 선희는 대답 없이 빠른 걸음으로 갈 뿐이다.

    우리들은 하는 수없이 선희를 따가 갔다.

    잠시 후 그런 선희가 멈춰선 곳 앞은 각종 인형들을 판매하는 가게다.

    그리고 선희가 손가락으로 가게 한쪽에 전시되어 있는 것들을 가리켰다.

    "저거."

    "……."

    "……."

    선희가 가리킨 건 바로 헬로키티 인형 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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