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81화 (181/425)

요란법석 사인회 (3)

고토 씨가 조금 격하다 싶을 정도로 놀라며 묻는다.

진짜 몰랐나?

스미레가 전혀 말하지 않은 모양인가보다.

아무리 그래도 부모님한테까지 비밀로 할 줄을 정말 몰랐다.

아무튼 고토 씨의 질문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뭐, 그렇습니다."

"……."

두 부부가 입을 동시에 벌리며 날 쳐다보고 있다.

내가 눈알을 굴리다 곧 덧붙였다.

"아무래도 삼사라 작가가 한국인이라는 게 알려지면 출판에도 좋지 않을 거라고 판단해서요."

내 말에 곧 정신을 차린 고토 씨가 수긍하는 표정이 되었다.

"……아, 그렇겠군요. 이해합니다."

정말 이해를 한 건가?

아무튼 사과부터 해야겠다.

"죄송하네요. 본의 아니게 스미레에게 그런 사실까지 숨기게 해서요."

"아닙니다. 삼사라의 작가시라면, 아무리 부모라도 쉽게 알려주면 곤란하지요. 스미레가 잘 한 거예요."

"아……."

참 엄격하게 자라왔구나.

어쩐지 애가 참 예의 바르다 싶더니.

그런데 곧장 고토 씨가 당황하는 얼굴로 말한다.

"그렇다면 저희가 괜히 일본으로 초청을 한건 아닙니까? 삼사라 연재로 바쁘실 텐데."

"작업은 여유가 많아서 상관없어요. 그보다 오히려 저희가 이렇게 초대까지 해주셨으니 감사하죠. 초청하려면 이래저래 귀찮은 일이 많았을 텐데."

고토 씨가 이내 양손을 휘저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닙니다. 귀찮다니요. 저희 스미레가 받은 도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요."

아무래도 삼사라 작가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부담이 되는 건지 두 부부의 표정이 처음보다 많이 굳어있다.

그때 위층에 올라갔던 스미레가 계단으로 내려오면서 내게 말했다.

"오빠, 같이 위층에 올라가세요."

"위층은 네 방이잖아. 또래끼리 노는데, 방해하고 싶지 않다."

"방해는요, 그리고 제 방 말고 지금 애들 옆방에 있어요."

"옆방?"

"네. 작업실에요. 오빠에게도 보여드리고 싶은데, 어떠세요?"

그렇다면야.

"어, 그래. 그럼 봐야지. 나도 궁금하네."

곧장 자리에서 일어서서 위층으로 올라 간다.

그러자 스미레가 앞장서며 계단으로 되돌아 올라간다. 그런데 그때 고토 씨가 작은 목소리라 말했다.

"스미레, 잠시만."

고토 씨가 스미레를 향해 손을 까닥거리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려온다.

그리고는 계단을 올라가려다 멈칫한 내게 말했다.

"먼저 올라가 계세요. 금방 올라갈게요."

"어.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올라가자 날 스쳐 스미레가 내려간다.

무슨 얘기를 나눌지 대충 감이 오긴 하지만, 가족 간의 대화에 내가 끼어들 수는 없는 일이다. 굳이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곧장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좁은 나무계단으로 올라간다.

발밑에서 약간 삐걱거리는 소리가 올라온다.

난간역시도 약간 흔들거리는 게 그리 튼튼한 느낌은 아니다.

오래된 건물이라서 그런 건가?

아무튼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다 올라가고 나자 마주보는 방이 두 개가 눈에 들어온다.

어느 쪽이 스미레의 방이고, 어느 쪽이 작업실인지는 모르지만, 방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때문에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문 앞에 섰다.

여긴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리 크지 않은 실내공간이 드러난다.

한쪽 벽이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책장, 거기엔 죄다 책으로 가득 차 있고, 책상 두 개도 눈에 들어온다.

만화가의 책상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게 해주는 경사진 나무판과 잉크병, 그리고 펜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그런대 책상 하나는 오래된 느낌이 강하고, 다른 하나는 그리 오래된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역시 부녀가 함께 사용하는 작업실인 모양이다.

내가 실내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들어가자 선희에게 뭔가를 한참 떠들던 경희가 날 돌아본다.

"오빠, 여기 봐봐, 정말 대단하지? 책이 엄청 많아."

경희가 감탄한 표정으로 책장을 둘러보|며 말한다.

그런데 선희는 그런 경희와 달리 두 개의 책상을 둘러보고 있다. 특히, 책상위에 놓인 오래된 만화도구들을 만져보는 등 호기심을 보인다.

아무래도 각자 관심분야가 달라서 그럴 테지.

아무튼 경희는 책장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책을 한권 꺼내 조심스럽게 펼쳐보기도 한다.

"아, 어려운 한자가 너무 많아서 못 읽겠다."

읽는 실력도 많이 늘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어설프니까.

그래도 뭔가 신기한지 계속 살펴본다.

선희도 도구들을 하나하나 들어보며 손에 쥐어보기도 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나도 쌍둥이들과 함께 방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다 한쪽 편에 있는 오래된 느낌의 단행본이 5권 놓여있다.

사나이의 하늘이라고 적혀있다.

그런데 작가이름이 고토 미노루다.

고토 미노루…… 아마도 고토 스미레의 아버지 이름인 모양이다.

발행 연도는 1967년,

그것 말고도 3권짜리, 4권짜리 등등, 다섯 질의 만화책들이 있었는데, 모두 같은 작가의 작품이다.

책들의 발행 연도를 확인해 본다.

스미레의 아버지는 60년대에 데뷔해 70년대까지 주로 활동한 모양이다.

책들을 살펴보니, 당시 유행했던 그림체의 전쟁만화가 대부분이다.

60년대는 일본에서 전쟁만화가 유행하던 시기다.

미국코믹스도 50년대에서 60년대까지 전쟁만화들이 많았기 때문에 아마도 그런 영향을 받았지 않나 싶지만,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른다.

내가 살던 시대에도 60년대에 대한 자료는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그 시절 그렸던 만화가 아직 잘보관되어 있는 걸 보니까, 새삼 오랜 만화의 역사 한가운데에 들어온 것이 실감난다.

모처럼 덕후 감성을 건드리는 이곳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더불어, 시간나면 5-60년대 만화에 대한 조사를 해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고토 씨가 그리 유명한 만화가가 아니라고는 했지만 이정도면 꽤나 활동은 열심히 한 모양이다.

그런 아버지를 어릴 적부터 봐 왔다면, 스미레가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도 이해가 된다.

"……?"

그때 한쪽 책상 옆 벽에 즐비한 액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사진은 모두 흑백.

지금보다 젊은 고토 씨의 모습이다.

그런 그가 예전의 동료들로 보이는 사.

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서 눈에 익은 얼굴이 보인다.

"어?"

고토 씨와 함께 서 있는 사람은 빵모자에 검은 뿔테안경을 쓴 남자, 바로 철완아톰의 아버지 '데즈카 오사무' 다.

데즈카 오사무야 너무나도 유명해서 따로 이야기 할 필요도 없는 만화가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만화의 신’으로 불리는 남자.

만화가였지만 무시프로덕션을 세워 '철완아톰'이라는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었고, 그 이후로도 셀 수 없이 많은 명작을 만들어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토리야마 아키라도 '두 번째 만화의 신'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일본에선 만화의 신은 오직 데즈카오사무 단 한사람뿐이다.

내가 살던 시절에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전설적 인물이지만, 이 시절엔 아직 생존해 있다는 걸 생각하니까, 어째 기분이 이상하기도 하고, 어쨌거나, 데즈카 오사무뿐만 아니라, 도라에몽의 작가 후지코 F. 후지오와 찍은 사진도 있다.

문득 내가 이들의 전성기 시절에 이곳에 왔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에이, 그럼 일본에 오기가 더 힘들었겠지.

"왜?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경희가 책들을 둘러보다 내게 슬쩍 다가와 액자 속 사진들을 같이 보며 물었다.

"어. 몇 사람은."

"정말?"

"뭐, 개인적으로 아는 건 아니지만."

그때 갑자기 다른 목소리가 끼어든다.

"오빠도 그분들을 아세요?"

스미레가 음료수와 과자가 담긴 쟁반을 들고 들어오며 말했다.

"아, 뭐. 몇 사람만. 나도 사진으로만 봤지, 실제로는 못 봤어."

"예전에 아버지가 그분들 어시생활도 좀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오, 그래?"

"네. 그나저나 한국에도 많이 알려진 분들인가봐요?"

"아니, 그건 아니고, 물론 만화책이나 애니는 좀 알려졌지만."

그 말에 스미레가 테이블에 쟁반을 올려놓고는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한국에는 뭐가 알려졌는데요? 궁금해요."

이거야 원, 부끄러운 해적판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좀 난감하니까, 애니만 얘기하자.

"애니는 작년에 돌아온 아톰이라는 제목으로 철완아톰이 방영되었어. 그리고 몇 년 전엔 리본의 기사도 했고, 물론 한국에서 방영한 제목은 낭랑기사고."

내 말에 이번엔 경희가 끼어든다.

"어머, 나 그거 봤는데, 둘 다 같은 만화가가 그린 작품이야."

"어. 이 사람."

그렇게 말하며 사진속의 한 사람을 가리켰다.

"이분 작품은 더 재미있는 것도 많은데. 특히 불새라든가, 블랙잭 같은 거요."

"알아."

"와, 역시 오빠는 안 본 게 없나봐요."

"우리 오빠가 이정도야. 에헴!"

경희가 코를 바짝 세우며 거드름을 피우자 스미레가 웃었다.

"역시 오빠는 만화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아요."

너무 사람을 띄워주니까 전신이 오그라들 것 같다.

내가 이번 분위기를 거북해 하자 그것을 눈치 챘는지 스미레가 테이블 위에 놓인 과자를 가리키며 말한다.

"좀 드시면서 구경하세요."

"아, 그래."

"맛있겠다. 선희야, 너도 얼른 와."

"……."

"집에서 만든 쿠키야. 맛이 어때?"

"이걸 만들었다고?"

"응."

"어디."

경희가 쿠키 하나를 집어 입에 넣더니 눈을 크게 뜨며 곧장 스미레를 돌아본다.

"와, 이거 엄청 맛있다. 네 어머니 실력 엄청 좋으시구나."

그 반응에 선희도 서둘러 쿠키를 입에 넣는다. 그리고는 멈칫 하더니 곧장 머리를 좌우로 까닥거리며 먹기 시작한다.

얼마나 맛있으면 저렇게 리듬까지 타

"이거 내가 만든 거야."

"뭐? 네가?"

"응, 과자나 케이크는 가끔 만들거든."

"와아아앙, 부럽다아아."

"내가 가르쳐줄까?"

"정말? 진짜?"

"그럼."

"나도 가르쳐 줘."

선희도 끼어든다.

갑자기 다시 애들이 수다가 시작된다.

그러다 스미레가 갑자기 뭔가 떠올랐는지 손뼉을 짝하며 친다.

"아, 맞다. 내일 모두 만화가 사인회 가볼까요?"

그 말에 경희가 쿠키를 우적우적 씹으며 말한다.

"일본에는 만화가 사인회가 많은가봐. 키도 오빠도 사인회 한다던데."

"맞아. 키도 죠타로 선생님이랑 니시다 유키 선생님 사인회야. 역시 알고 있었네?"

"어? 그게 내일이야?"

"응. 코미케는 모레니까 내일 가면 어때?"

"가보고 싶어!"

"나도."

경희가 손을 번쩍 들며 찬성하자, 선희도 한쪽 손을 반만 올리고 동의한다.

사실, 스미레가 우리를 초청한 이유 중 하나가 코미케였다.

작년 코미케의 경우엔 책만 발행해 판매했을 뿐, 참여하지는 않았었다. 그리고 겨울에 열렸을 땐 지로에게 대충 이야기만 들었고, 아무튼 쌍둥이들이 찬성하자 스미레가 이번에 내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오빠 생각은 어떠세요?"

스미레의 물음에 턱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나야 뭐, 안 그래도 가볼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럼, 내일 같이 가는 거야?"

"뭐. 그러자."

"와아, 오랜만에 키도 오빠 만나보겠네."

경희가 좋아라 하며 소리치는데, 곁에 있는 선희의 표정이 어째 묘하다.

그래서 물어봤다.

"왜?"

내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선희가 입을 열었다.

"나도 사인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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