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법석 사인회(2)
아까부터 선희가 요란한 표정을 지으며, 원고에 열중해있다.
이마를 찌푸린다거나, 혹은 눈을 크게 뜨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입을 앙다물기도 한다.
쟤 지금 뭐하는 거지?
요란한 추임새까지 넣는 행동을 보다보니 지금 데생작업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겠다.
평소 원고데생 때라면 저런 모습을 결코 볼 수 없으니까.
그때 선희의 책상 근처에 있는 박수미가 힐끔거린다. 그리고는 잠시 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웃음을 짓는다.
그 때문에 다른 어시들도 궁금한지 선희 쪽을 힐끔 거린다.
그런 분위기에도 아랑곳없이 선희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다.
아, 이거 궁금해서 못 참겠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박상식이 메모를 하다가 그런 내 행동을 보며 물었다.
"갑자기 어디가?"
"잠시만."
박상식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곧 어깨를 으쓱하고는 메모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난 자리에서 벗어나 선희 책상 쪽으로 이동했다.
내가 다가가는지도 모른 채 그림에 열중 하고 있다. 그런데 그림을 그린 줄 알았는데 내 예상이 틀렸다.
막 낙서 같은 걸 그리고 쓰고 있는데……, 뭐야? 사인인가?
"그거, 사인이야?"
내 질문에 멈칫하더니 곧장 다시 손을 빠르게 움직인다.
내 물음에도 선희는 머리를 들지 않고 대답한다.
그런 선희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갑자기 그건 왜……. 설마 키도 형 사인 회 때문이야?"
"……."
대답을 안 하는 거 보니까, 맞는 모양이네.
역시, 그곳에 가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냥 좀 더 멋진 사인을 만들고 싶은 건가?
어쩌면 둘 다?
하긴, 한참 자신을 증명하고 싶은 시절이긴 하니까 이해는 되는데.
그때 전화가 울린다.
그리고 전화를 받은 성준희가 곧 반가운 얼굴로 대답한다.
"잠시만."
그렇게 대답하더니 선희를 바라본다.
"경희야, 스미레야. 너 바꿔 달래."
스미레가 어설픈 한국어로 선희를 바꿔달라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스미레도 최근 한국어가 많이 늘긴 했지.
아무튼 성준희의 말을 들자마자 선희가 정신없이 하던 사인연습을 멈추고는 성준희에게 다가가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는 능숙한 일본어로 이야기한다.
"전화 바꿨어."
이번에도 대부분 스미레 쪽이 주로 이야기를 하는 모양인지 선희는 그저 단답형으로 대답하고만 있다.
"응."
"맞아."
"축하해."
"나도 그래."
"즐거워."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묘하게 웃는 듯한 보통사람이 본다면 그저 얼음공주 같은 느낌이지만, 내게는 선희의 미세한 표정 변화가 어느 정도는 보인다.
물론 아직 다른 가족들만큼은 아니지만.
아무튼 선희는 스미레가 반가운지 한참을 그렇게 짧게 대답하며 통화중이다.
그렇게 5분 이상 통화를 한 뒤 곧 전화를 끊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의 표정이 된다. 그리고는 곧장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역시 단순한 안부 인사였나?
미래라면 이정도 통화시간이 별거 아닐 테지만, 지금에 있어 국제통화요금은 상당하다. 그러니 5분이라고 해도 적지 않은 돈이다.
그 때문에 어시들도 그런 모습에 혀를 내두른다.
지금 시대엔 국제전화는커녕 시외전화도 장시간 하는 것도 부담스러우니까.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신문에 읽은 재미있는 기사가 있었다.
한국인의 평균 전화통화시간이 선진국에 비해 너무 길다는 게 주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평균 통화시간이라는 것이 70초정도라는 사실을 알고는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70초면 1분이 살짝 넘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선진국은 30초네, 40초네 하면서 아직 그들을 따라가려면 멀었다니.
이 코미디 같은 기사도 내용만 보면 나름 심각하다는 듯 진지하게 쓰긴 했지만, 하긴 지금 이 시절에 주요 전화통화 관련 슬로건이 '통화는 간단히' 아니면 '용건만 간단히'니까.
아, 그리고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 좀 재미난 기사도 하나 발견했었다.
내가 살았던 미래에만 미세먼지 이야기가 있는 줄 알았는데, 지금 이 시절에도 이미 신문에서도 그 기사를 발견하고는 솔직히 좀 놀랐다.
특히 '중공(중국)에서 대기오염이 편서풍을 타고 10시간 만에 도착'은 뭐 내가 살던 시절에도 통하던 이야기였으니.
미세먼지, 이게 생각보다 역사가 좀 깊구나.
아무튼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선희에게 다가갔던 경희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뭐? 스미레가 일본에 오라며 초청장을 보냈다고!"
"응."
초청장?
그런데 왜 말을 안 하는 거야, 저 녀석.
그나저나 경희 저 녀석 지금 나 들으라고 크게 말하는 거 같은데.
그런데 경희 이 녀석이 다시 한 번 더 크게 말한다.
"우리 여름방학이니까, 잠시라면 괜찮을 것 같기는 한데……."
그렇게 말하더니 곧바로 내 쪽을 슬쩍 돌아보며 처량한 눈빛을 보낸다.
그런데 선희는 전혀 동조하지 않고, 그냥 계속 사인연습에만 빠져있자 경희가 흔들어댄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선희가 머리를 살짝 들고는 날 바라본다.
물론 당연히 별다른 감정 없는 표정으로,그 모습을 본 경희가 인상을 팍 쓰며 경희에게 소곤거리며 말한다.
"야, 호소력이 없잖아. 나처럼……. 어서."
작게 말한다고 하는 모양이지만, 가까워서 다 들린다고, 하지만 선희의 표정엔 전혀 변화가 없다.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한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은 일생에 한번 뿐인데……."
"그렇게 따지면 모두 적용되는 거잖아. 한 살씩 먹을 때마다 그 얘기 할래?"
"아, 그런가?"
경희가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인다.
그렇게 대충 넘어가나 했더니 이번엔 가만히 있던 어시들이 끼어들었다.
"그래요. 저희들이야 한번 나가려면 복잡하고 힘들지만, 선생님들은 초청에다 이미 여러 번 경험도 있으니 이참에 한번 다녀오세요. 요즘 원고작업도 여유 있는데."
"맞아요. 부럽긴 한데, 저희 몫까지 다녀오세요."
맡겨놨냐? 당신들 몫이 어디 있어?!
"나도 데려가라."
실버는 빠져!
*
에휴우우우~.
다굴엔 장사 없다더니.
결국 일본으로 오고 말았다.
"아, 상쾌해, 일본공기는 뭔가 확실히 달라."
"다르긴 뭐가 달라?"
"오빠는 낭만이 없어, 낭만이."
"그게 뭔데? 먹는 거냐?"
"칫."
공항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스미레의 모습을 본 경희가 폴짝거리며 달려간다.
"꺄악! 반가워!"
이산가족상봉이라도 하는 것 같이 요란을 떨자 스미레가 당황하면서도 웃으며 우리를 맞이한다.
"어서들 와."
그리고는 날 보면서도 인사한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
"선생님은 무슨, 그냥 오빠라고 불러."
"네."
그렇게 대답한 스미레는 곧장 쌍둥이들이 들고 온 가방중 하나를 받아들고는 앞장을 선다.
"절 따라오세요."
택시라도 잡으려고 저러나 싶었는데 공항근처에 세워진 승용차 쪽으로 걸어간다.
우리들이 다가가자 운전석 문이 열리며 중년의 사내가 내리더니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갸름한 얼굴에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얼굴이……, 스미레와 상당히 닮은 걸 보니 누구인지 알 것 같다.
"우리 아버지세요."
스미레가 소개하자마자 내가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딸이 폐를 많이 끼쳤다고 들었습니다."
"폐는요, 오히려 저희 쪽 일을 많이 도와줬는걸요."
"아, 그렇습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스미레를 뿌듯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나저나 우리 스미레에게 전해들은 대로 정말 일본어에 능숙하시군요."
"아닙니다. 아직 부족하죠."
"아니요. 모르고 만났다면 일본인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리게 말하며 곧장 승용차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아무튼 피곤하실 텐데 어서 타세요."
"아, 네. 신세 지겠습니다."
"무슨 말씀을요."
"와, 차 좋다."
"고마워."
모두 차에 오르자마자 곧장 공항을 빠져나간다.
"널 다시 보니까, 너무 좋아."
"나도."
"나도 너희들을 일본에서 보니까 꿈만 같아."
"벌써 일본을 두 번이나 오다니, 나 진짜 출세한 모양이야. 우리 선희는 세 번째고."
"아, 그랬니?"
"응. 우리 오빠랑 선희가 좀 능력이 되잖니."
"그건 그래."
경희는 연신 흥분한 음성으로 계속 창 밖을 보며 스미레와 수다를 떨었다.
그렇게 도시외곽지역에 들어선 승용차가 오래되어 보이는 자그마한 2층짜리 목조주택 앞에 섰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스미레가 말했다.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그렇게 스미레의 안내를 받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더니 이번엔 앞치마를 두른 중년의 여성이 우리를 맞이했다.
묘하게 스미레의 눈과 닮은 미모의 중년 여인이었다.
"어서 오세요. 스미레의 엄마랍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안으로 안내를 받자마자 스미레의 어머니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한다.
"집이 좀 많이 좁아서 불편하실 거예요."
"아닙니다."
우리는 근처 숙박업소 쪽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스미레가 며칠 동안 자신의 집에서 지내자고 하는 바람에 결국 그렇게 결정해 버렸다.
"식사를 준비했어요."
어쩐지 들어오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진동하더라니.
"안 그래도 배가 고프던 참이었어요."
"자 이쪽으로."
우리 때문인지 미리 음식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잔뜩 차려져 있었고, 덕분에 거하게 잘 먹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자마자 애들은 곧장 2층의 스미레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던 고토 씨가 나에게 물었다.
"저희 스미레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늘 그 점 스미레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뭐, 별로 가르쳐준 것도 없는데요. 저보다 더 많이 가르쳐 준 사람도 있고요."
"아, 실버라는 선생님 말씀이군요."
실버는 그냥 우리끼리 부르는 말인데, 스미레는 그게 진짜 이름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뭐, 그런 사실이야 중요한 것도 아니고,
"늘 그분에게도 감사해하고 있답니다.
아시겠지만, 이번 소년점프에서 짧게나마 연재를 시작한 것도 모두 선생님들 덕분이니까요."
그 말에 맞은편에 앉아있는 스미레의 어머니도 연식 미소를 지으며 감사하다는 말을 한다.
그렇게 고토 씨와 스미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 사실 만화가로서 그리 알려진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 딸 스미레는 어릴 적부터 그런 절 늘 동경해왔었습니다. 그래서 전 스미레를 돕기로 했습니다. 극화촌숙으로 보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구요."
"네. 만화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더군요."
"아하하. 이거 그래도 제 딸이 칭찬을 받으니까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군요. 죄송합니다."
그렇게 떠들고 있다 보니 거실 한쪽 편에 있는 책장에 만화책들이 잔뜩 꽂혀있는데, 그 사이에 익수한 책도 보인다. 바로 삼사라다.
이제까지 출간된 4권이 모두 가지런히 꽂혀있으니 뭔가 기분이 묘하다.
일본인의 집에서 보는 삼사라는 다른 느낌을 준다.
나도 모르게 책장으로 다가가서 삼사라를 꺼내며 물었다.
"여기에도 삼사라가 있으니까, 기분이 좀 묘하네요."
"아, 네. 굉장한 작품이죠. 우리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입니다만, 저 역시 최근 가장 흥미롭게 보고 있답니다."
"아, 이거 영광이네요. 저희 작품을 이렇게 좋아해주셔서."
"……네?"
고토 씨가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그건 부인도 마찬가지다.
"서, 설마. 삼사라를 그리신 만화가 선생님이신가요?"
뭐지 이 반응은?
정말 몰랐다는 건가?
"아, 아뇨. 전 스토리를 담당했고, 방금 같이 왔던 쌍둥이 중 한명이 써니입니다."
"……네! 그게 정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