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79화 (179/425)
  • 요란법석 사인회 (1)

    "에취!"

    갑자기 키도가 재채기를 하고는 코를 훌쩍인다.

    그리고는 곧장 머리를 갸웃하며 눈알을 데굴거리더니 혼자 중얼거린다.

    "누가 내 얘기를 하나?"

    그러고는 뒷머리를 벅벅 긁더니 곧장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는 화실에서 이어지는 거실 쪽으로 나가며 소리친다.

    "여보! 차 한 잔 부탁하오!"

    "네에~!"

    부엌 쪽에서 키도 부인이 평소의 활달한 음성으로 대답한다.

    그 모습을 힐끔 보던 막내어시가 잠시 눈치를 살피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까, 키도 선생님이 써니 선생님이랑 통화한 거 맞죠?"

    "그런데 왜?"

    "아까, 한국인이 어쩌고 하던 거 같은데……."

    "갑자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그러니까, 써니 선생님이랑 대화 도중에 한국인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그때 가장 윗선임인 난바가 작업을 멈추고 막내 어시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무카이."

    "네?"

    "방금 건 네가 잘 못 들은 거야."

    "아닌데요? 분명 초청 어쩌고 하는 것도 들었는데."

    그때 다른 선임어시들이 무감정한 음성으로 말한다.

    "네가 잘 못 들은 게 맞아."

    "그럼, 환청이지."

    "네?"

    막내어시가 잠시 모두의 눈치를 본다.

    선배들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 원고에서 시선을 둔 채 있는 모습을 보던 그가 잠시 후 머리를 끄덕였다.

    그도 막내라지만 이곳생활을 짧게 한 것도 아니니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를 리가 없다.

    "……아, 그렇군요. 제가 확실히 뭔가를 잘못 들었나 봅니다. 그래. 그럴 거야."

    솔직히 어시들은 키도가 뭔가를 숨기는 것이 허술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 써니에 대한 사실은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다.

    하지만, 키도 선생이 본인의 입으로 밝히지 않는 이야기를 굳이 파고들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이곳 화실에 내려오는 일종의 불문율 같은 거였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그냥 그것이 하나의 습관처럼 자리 잡은 것이다.

    막내 어시 역시도 그런 분위기를 떠올리고는 금방 수긍한 것이다.

    그들 모두가 삼사라의 팬이지만, 그보다 화실의 일원이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실, 화실뿐만이 아니다.

    일본이라는 사회는 일단 어느 단체의 소속이 되었을 땐 그 곳의 일원으로서 규칙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으니까.

    아무튼 그냥 키도 선생의 개인적인 사생활이라고 생각해버리고 관심을 끊은 것이다.

    그때 키도가 화실에 다시 들어왔다.

    그러다 화실에 흐르는 공기가 묘하다는 걸 느꼈는지 어시들을 돌아보며 묻는다.

    "왜? 무슨 일 있었나?"

    "아뇨. 별일 없었습니다. 그냥 저희들끼리 실없는 잡담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

    키도가 금세 수긍하고는 곧장 자신의 자리에 앉는다.

    자리에 앉아서는 아까 하던 데로 열심히 펜을 휘갈긴다.

    "으흠……."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지 계속 인상을 찌푸린다.

    눈앞에 있는 사인이 지저분한 낙서 같아서였다.

    조만간 사인회가 열릴 계획이라, 그때를 위해 다시 사인을 연습 중이었다.

    하지만 늘 자신의 사인이 어설프다는 사실 때문에 불만이 많았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멋들어지게 사인을 하고 싶지만, 역시 영 어수선한 느낌이다.

    자신의 사인이 어설픈 것도 그렇지만 같은 날 사인회를 여는 니시다와 비교될 텐데.

    솔직히 인정하긴 싫지만 니시다의 사인은 정말 멋지다.

    사인 속에 자신의 주인공 캐릭터 옆얼굴이 슬쩍 그려져 있는 탓에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멋진 그림처럼 보이니까.

    "젠장, 그놈한테는 지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인기라면 자신이 이길 자신이 있다.

    어쨌건 주간소년 히어로 앙케이트 종합순위에선 그래도 앞서고 있으니까.

    그렇게 백지에 쉴 새 없이 사인을 휘갈 기며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런 그를 어시들이 힐끔거리며 쿡쿡거리고 웃는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도 키도는 열심히 사인연습에 몰입했다.

    그때 화실 안으로 키도 부인이 평소처럼 웃는 얼굴로 들어온다.

    "친구 오셨어요~!"

    그리고는 곧장 다시 거실로 사라진다.

    덕분에 작업에 열중하던 어시들과 키도가 머리를 번쩍 들었다.

    "친구? 나?"

    키도가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이미 부인은 사라지고 없다.

    "……."

    그때 마당으로 통하는 화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어?"

    키도가 들어오는 사람을 보며 놀랐다가 금방 황당한 표정으로 변한다.

    들어온 사람은 상상도 못한 사람, 바로 에스퍼 존의 니시다였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니시다, 너! 갑자기 여긴 무슨 일이야?!"

    니시다라는 말에 어시들도 깜짝 놀란다. 니시다라는 이름은 알아도 얼굴은 보적이 없었던 탓이다.

    아무튼 키도가 황당해하며 버럭 소리치 자 그때 다시 거실에서 키도 부인이 들어온다.

    "친구 분이 맛있는 화과자를 가지고 오셨네요. 맛을 살짝 봤는데, 정말 대단해요."

    "……저기, 여보."

    "네?"

    웃음 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친구가 아니라는 말을 하기가 어렵다.

    "……아니오."

    "자자, 모두 이거 드시면서 대화 나누세요."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에 화과자가 담겨 있는 쟁반을 내려놓고는 다시 호호 거리며 거실로 간다.

    그 모습을 보던 니시다가 어색하게 웃더니 키도를 보며 말한다.

    "사모님이 재미있으시네요. 뭔가 키도 씨랑 잘 어울린 달까."

    "우리 부부사이를 평가하려고 온 건 아닐 테고, 갑자기 왜 온 거야? 설마 사인 때문이냐?"

    "네?"

    "아, 그건 아닌 거 같고, 그럼 왜지?"

    갑자기 분위기가 살벌한 느낌이 들자, 어시들이 화과자가 있는 테이블에 다가가려다 멈칫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작업에 열중한다.

    어시들의 반응에 키도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더니 곧장 니시다를 끌고 가다시피하며 마당으로 나간다.

    그제야 어시들의 표정이 밝아지며 화과 자 쪽으로 하이에나처럼 달려든다.

    그때 거실에서 들어온 키도 부인이 웃으며 그들에게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이랑 같이 드세요. 알겠죠? 꼭이요."

    휘이이잉.

    그녀의 주변에서 차가운 바람, 아니 살기가 쏘아지는 느낌에 화들짝 놀란 어시들이 대답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사모님."

    "하하하."

    키도부인은 그럼 그들의 반응에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다시 거실 쪽으로 간다.

    그제야 모두가 한숨을 쉬며 다시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가 원고에 집중했다.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이 잔디 마당 한쪽에 있는 벤치에 가서는 앉는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마자 키도가 니시다에게 물었다.

    "갑자기 여기 찾아온 목적이 뭐야?"

    "제가 여기에 오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불편하잖아."

    "……아."

    납득했는지 니시다가 머리를 끄덕거린다.

    "그럼 다음엔 키도 씨가 저희 화실로 놀러오세요."

    "내가 왜."

    "그럼 쌤쌤이 되잖습니까."

    "……실없는 소리 말고 용건이나 말하라니까."

    "어휴, 급하시기, 시원한 음료수라도 한 잔 주시고……."

    "여기 시원한 차 한 잔 하시면서 이야기 하세요."

    언제 다가왔는지 키도 부인이 쟁반에 컵을 두 개 담아 가지고 왔다.

    "아, 네. 감사합니다."

    "천천히 말씀들 나누세요."

    "네."

    곧장 키도 부인이 종종걸음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 모습을 보며 니시다가 웃는다.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니시다."

    "아, 네네."

    그렇게 대답한 니시다가 잠시 키도를 쳐다보다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듣기론, 키도 씨가 써니 선생님과 친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저기 갑자기 이야기를 끊어서 미안한데."

    "……."

    "난 왜 키도 씨고, 써니는 왜 선생님이야?"

    "아, 마음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니시다가 웃더니 다시 말한다.

    "음. 그러니까 키도 선생님이 써니 선생님과 친분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런데?"

    "혹시 저도 그분과 만나게 해주시면 안될까 싶어서요."

    "……갑자기 그건 왜? 설마 삼사라가 1위를 계속 하니까, 확 해치워 버리고 네가 1위라도 차지하게?"

    "……."

    니시다가 가재미눈을 뜬 채로 쳐다보자 키도가 시선을 피한다.

    "그래. 재미없는 농담인거 안다."

    "이런 실없는 얘기를 아직도 하시는 군요."

    "쳇, 알고 있으니까, 그만하지?"

    "하하."

    저 웃음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빨리 말해봐, 그러니까 이유가 뭐냐고?"

    "왜, 이상합니까?"

    "당연하지. 자네처럼 자존심 강한 사람이 다른 만화가와 만나고 싶어 하니까. 내가 알기론 예전에 동인시절에도 기성 만화가들을 우습게 여겼잖아."

    그 말에 니시다가 풋 하며 웃었다.

    "철없던 시절의 얘기를 갑자기 왜 하십니까? 거기다 그런걸 아직 잘도 기억하고 계시군요. 난 기억도 안 나는데."

    "……."

    "네. 맞습니다. 지금도 사실 만화가들을 만나는 건 하지 않고 있습니다. 연말, 연초 출판사에서 여는 만찬에도 참석하지 않으니까요."

    "그럼 내 말이 틀린 것도 아니잖아."

    "틀렸죠. 다른 만화가를 우습게 여기는 건 아니니까."

    "……."

    키도가 눈을 부라리며 쳐다보자 니시다.

    가 은근슬쩍 그의 그런 시선을 피한다.

    "뭐, 일부는……."

    그 말에 키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진짜 이 녀석.

    그런 표정을,

    "그건 그냥 넘어가도록 하죠."

    "그래, 본론이나 말해."

    그러자 니시다가 머리를 끄덕인다.

    "실은 에스퍼 존의 이야기를 새롭게 다듬고 싶어서입니다."

    "뭔 소리야? 에스퍼 존을 새롭게 다듬는데 써니를 왜 만나?"

    "키도 선생님도 써니 선생님과 친분이 생긴 뒤로는 자신만의 만화를 찾았으니까요."

    "뭐? 그 얘긴 어디서……, 뭐 담당에게서 들었겠군. 아니지, 네 담당 다른 잡지사 출신 아니었어?"

    "네. 오오타케요. 그 녀석, 키도 선생님 담당에게 들었다고 하던데요."

    "테고시 이 녀석……."

    (그 순간 편집부의 테고시는 갑자기 알수 없는 오한에 몸을 떨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인 즉슨, 써니를 만나면 뭔가 지금의 문제점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군."

    "네."

    "너무 노골적인데?"

    "그런가요?"

    "그래."

    솔직히 키도는 놀라고 있었다.

    예전의 니시다라면 절대 이런 말을 하지도 않았을 것은 물론이요, 애초에 자신의 문제점을 알아차려도 본인 스스로 해결하려하던 사람이었으니까.

    확실히 많이 변한 모습이긴 했다.

    따지고 보면 자신도 변하긴 했다.

    아까 윤환과의 전화통화에서 잠시 언급 되었던 '통제불능 키도' 시절을 생각해보면, 지금은 정말 많이 변했으니까.

    예전엔 이야기가 막히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 황당한 마무리를 해버리는 식이 흔했었다.

    그런데 써니 남매를 알고부터는 그런 일이 있어도 좀 더 고심해서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으니까. 확실히 많이 성장하긴 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키도가 자신을 여전히 바라보는 니시다를 보며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좋아, 설득 해보지."

    "고맙습니다."

    "대신, 이번 시합에서 날 이긴다면."

    "네? 시합요?"

    "그래. 사인 누가 많이 하는 가."

    "……."

    이 무슨 황당한 시합인가.

    보통 때라면 어이가 없어 비웃음만 흘리고는 바로 돌아섰을 니시다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쩐 일인지 승부욕이 생긴다.

    곧장 니시다가 웃으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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