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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전생 만화왕-177화 (177/425)

써니 이펙트 (2)

그런데 데생의 그림을 보니, 내일부터 어시들이 작업해야 할 부분이다.

"어? 내일부터 작업할 분량인데, 다시 그리는 거야?"

내 말에 태연하게 머리를 끄덕인다.

"내가 보기엔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왜?"

"새로운 걸, 해보고 싶어."

"새로운 거?"

내 말에 선희가 머리를 끄덕인다.

"하지만 굳이 완성된 원고를 고칠 필요까지야……. 그냥 완성된 데생 그 뒤부터 적용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 다시 하고 싶어."

"다시……. 휴, 네가 그렇게 결정했으면 어쩔 수 없겠지."

내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주억거렸다.

어쨌든 본인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굳이 반대할 수는 없고, 그래도 저렇게 눈을 반짝이고 있으니 기대가 되기는 한다.

그리고 일단 스토리 부분은 내가 계속 관리하고 있으니까 특별히 산을 탈 리는 없을 테니, 괜찮겠지.

뭔가 꼬인다 싶으면 그땐 원래 원고를 어시들에게 넘기면 되니까.

일단 선희가 그리는 데생 원고를 지켜 본다.

뭐가 변했지?

자세히 보면 장면 연출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긴 했다.

얼핏 보기에도 눈에 잘 들어오고, 하지만, 굳이 저 정도 변화를 위해서 새로 그린다는 건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냥 내가 잘 느끼지 못하는 부분에서 변화를 주는 걸까?아닌데?

요즘엔 세세한 부분까지 다 살펴보고 있으니 특별히 내 눈을 피해가진 못할 것이다.

이미 이스터 에그 쪽도 알고 있는 상황이라서 놓치는 일은 없다.

그런데 세 번째 페이지를 그릴 때부터 확 변해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세 번째와 네 번째의 페이지가 동시에 변하는 거지만, 갑자기 원고 두 장을 붙인 덕분이다.

물론 두 페이지짜리 그림 자체가 특별한 건 아니다. 이전에도 가끔씩 하던 작업이니까.

갑자기 무슨 장면을 그리려고 하는 걸까?

슥슥슥

선희의 연필이 종위를 빠르게 움직인다.

대략적인 배경을 가벼운 터치로 설정하고 그 위에 캐릭터의 위치를 정한다.

그리고는 그 정해진 곳에 캐릭터를 그려나가는데…….

어?

주인공 켄이 전체 두 페이지짜리 한 장 면의 한곳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여러 곳에 그려지기 시작한다.

뭐지?

이거 연속동작을 그리려는 건가?

그러고 보니, 삼사라에서는 주인공의 섬세한 동작을 위해 한 장면에서 여러 동작을 겹쳐 그린 경우가 없다.

동영상으로 치자면 잔상의 느낌과 같은 그런 그림말이다.

물론 연속동작 장면자체는 그리 특별한건 아니다.

그런 장면묘사라면 해적판으로 유명했던 권법소년(원제: 일격전)에서 자주 등장하기도 하고, 쿵푸소년 친미에서도 꽤 나오는 편이니까.

어? 어째 모두 무술과 관련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네.

그리고 한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해적판으로 나왔다는 사실도 그렇고, 그러니까 특별한 건 아니라는 건데…….

그런데……. 이건 좀 다르다.

여러 곳에 등장한 켄의 모습이 예상과 달리 전혀 이어지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왜 이렇게 그린 걸까?

"……."

아직은 완성이 되지 않아서 정확한 판단이 어렵다.

그런데 조금씩 그림이 완성되어가자 뭔가 느낌이 오기 시작한다.

아, 여러 곳에 등장한 켄은 미세한 시간의 격차를 두고 움직임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니까, 한 장소가 아닌 여러 곳에서 동시에 움직이는 주인공을 묘사한 장면이다.

그리고 더불어 배경이 굉장히 넓게 묘사가 된다.

이건……. 파노라마 사진 속 배경 같은 느낌이다.

실제로는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풍경을 묘사했으니까.

그런 배경 속에서 주인공이 여러 곳에서 동시에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라…….

이 두 페이지짜리 장면 하나만으로 임팩트가 상당하다.

눈이 다 시원해지는 그런 느낌이 들 정도로, 물론 미래라면 이런 식의 배경묘사가 특별한 건 아니지만, 지금의 시대엔 혁신적인 느낌이다.

그렇게 두 개의 독특한 것이 합쳐지자 그 시너지도 굉장히 좋다.

내가 감탄해하며 바라보고 있는 사이 어느새 두 페이지짜리 데생이 완성되었고, 그것을 나에게 보여준다.

"괜찮아?"

순간 움찔 놀랐다가 선희의 얼굴을 쳐다봤다.

내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한 지 눈썹을 조금씩 꿈틀거리며 보고 있다.

"굉장한데? 이거 어떻게 생각해냈냐?"

"……어제 만화영화 보면서."

"버스…… 말이야?"

"응"

유달리 생동감이 넘치는 애니메이션이긴 해도 그걸 보며 이런 걸 떠올리다니.

나라면 그냥 잔상이나 연속장면을 묘사하는 것으로 그쳤을 텐데, 그나저나 사진을 직접 본 것도 아닌 기억으로 그리는 것도 신기한데, 거기다 광학렌즈처럼 변형까지 주고 있으니.

이제 배경을 묘사하는 것에 관해서는 거의 끝판왕 경지에 다다른 느낌이다.

아무튼 내가 감탄하는 모습이 만족스러웠는지 그 다음 장면에 광각렌즈로 찍은 것 같은 풍경을 집어넣는다.

파노라마 같은 느낌은 부족해도 적은 컷에 들어가는 그림임에도 배경이 두 배는 넓어 보이는 착각이 들게 한다.

한 번에 감을 잡았다는 걸까?

그런 장면들이 컷 사이사이에 들어가자, 이제까지의 삼사라와는 좀 다른 느낌이다.

뭐랄까, 평범한 어두움이 기괴한 어두움으로 변한 느낌이랄까.

특징적인 장면에서 적절히 잘만 사용한다면 그 효과는 굉장히 클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몇 시간동안 그린 새로운 데생을 어시들에게 넘긴다.

아까부터 도대체 어떤 그림인지 궁금해 하던 정미자가 처음으로 데생원고를 받고는 꽤나 놀란다.

"이거, 배경이 특이하네요? 거기다 이장면은……."

잠시 묘한 표정으로 원고를 바라보더니 그녀도 감탄해 버린다.

"이런 묘사는 처음인데……. 그나저나 이거 캐릭터가 굉장히 생동감이 있어요. 만화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들고."

이제까지 선희가 그려왔던 배경들은 실제로 찍은 사진들을 보는 듯한 평범한 느낌이었지만 이번에 그린 배경은 배경만으로도 눈에 확 들어오니까 당연한 반응일거다.

아무튼 정미자의 반응에 다른 어시들도 데생을 구경하려 모여든다.

그리고 그림을 한참 살펴보더니 한마디씩 던진다.

"그림이 더 커진 기분이군요. 캐릭터의 묘사도 생동감 있고."

"하지만 조금 정신이 없다는 느낌도 있어요. 너무 이런 장면이 익숙지 않아서 그런가?"

"그래도 복잡함이 아닌 독특한 화면으로 개성을 만들었다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전 괜찮아 보여요."

각자 나름대로 느낀 점을 이야기한다.

뭐, 아직은 시작단계라도 조금은 어설픈 감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식의 도전을 계속 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 두면 나중에 그림만으로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게 될 테니까.

개인적으로는 항상 스토리를 우위에 두고 있지만, 어쨌건 만화에서 그림을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멋진 그림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고 같은 이야기도 더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선희는 스토리가 아닌 그림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표현에 최선을 다한다.

아무튼 이로서 삼사라가 새로운 단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

할짝, 할짝.

"……."

할짝, 할짝.

"……?"

눈을 게슴츠레 뜨자 천장이 보인다.

뭐지……?

아, 그러고 보니 나도 모르게 잠들었던 모양이다.

점심을 먹고 난 뒤, 모처럼 날도 따듯하고 창문에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지금 내가 누워있는 장소는 화실의 2층이다.

평소 조용하게 생각하거나 책을 읽고 싶을 땐 올라오는 곳인데.

그나저나 머리 쪽에 들리는 이 소리는 뭐지?

누운 채로 머리를 뒤쪽으로 살짝 젖혔다.

"앗, 깜작이야!"

머리맡에 있는 하얀 물체 때문에 깜짝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보니 바닥에 백설기가 웅크리고 앉아있다. 그런데 저 녀석 그런 날 멀뚱거리는 시선으로 보고 있다.

"너도 여기가 시원해서 좋냐?"

"……."

물론 백설기에게 뭔가 특별한 대답을 원한 건 아니다.

잠시 그런 녀석을 부스스한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목시계를 확인해보니, 벌써 3시가 넘었다.

두 시간이나 꿀잠을 잔 모양이다.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가서는 화실로 들어갔다.

박상식이 삼사라 콘티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다. 아까 나와 한 대화의 메모를 확인하며 연습장에 그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선희는 새로운 방식의 그림을 적용하며, 열심히 그리고 있다.

지금은 방학이라 아침부터 화실에서 지내고 있다.

물론 새롭게 그리기 시작한 원고를 보낸 것도 벌써 3주정도가 지났다.

듣기론 일본에서의 반응도 나쁘지 않다고 하던데.

물론 처음엔 독자들 중에 변한 삼사라에 대해 부정적 의견이 좀 있었던 모양이긴 하지만, 그래도 요 몇 주 사이에 선희의 그림에 센스가 늘어서 처음만큼 정신없는 묘사를 하지는 않는다. 덕분에 이전에 비해 보기도 더 좋아졌다.

아무튼 그런 선희를 보고 있으니 어째 마음이 뿌듯하다.

실버가 스미레를 보며 괜히 뿌듯해하는 게 아니라니까.

그때 작업 중이던 박상식이 내가 온 걸 알고는 입을 열었다.

"저기, 아까 네가 한 얘기 중에 암흑도시 편말인데……. 어?"

갑자기 내게 이야기하던 박상식이 깜짝놀란 얼굴로 날 쳐다본다.

"……?"

갑자기 왜 저렇게 쳐다보나 싶어서 같이 마주보는데, 다른 어시들도 박상식의 반응 때문인지 작업을 멈추고 날 쳐다본다.

그런데 그때 부엌에서 간식을 들고 나오던 경희도 날 보더니 움찔하고 놀란다.

뭐지 이 반응은?

박상식과 경희가 비슷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모습에 내 고개가 저절로 갸웃거린다.

그때 계속 놀라고 있던 경희가 곧장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오빠, 뭐야 그게?"

"……그거?"

"머리 봐, 머리. 그거 요즘 유행하는 헤어스타일이야?"

"뭐?"

그런데 경희의 웃음을 시작으로 화실사람들 전체가 나를 보며 쿡쿡거리며 웃고 있다. 그때까지도 머리를 숙인 채 작업에 열중하던 실버와 선희까지 고개를 들어날 보고 있다.

실버는 좀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고, 선희는…….

쟤 지금 나 비웃는 거 맞지?

"너 진짜, 이렇게 기습적으로 사람을 웃기면 어떡하냐?"

이젠 박상식까지 웃느라 정신이 없다.

난 곧장 화실 벽에 붙어있는 거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아."

이게 뭐야?

머리가 삐죽삐죽 사방으로 솟아 있다.

색깔만 노랗게 물들이면 영락없는 초사이아인이다.

"도대체 위에서 무슨 짓을 하고 온 거야? 펑크머리잖아."

박상식이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난 지금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다.

자고 일어났더니 이런 머리가 된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거니까.

그런데, 그때 눈을 뜰 때의 상황이 떠올랐다.

그 할짝거리던 소리.

그리고 백설기가 머리맡에 있었다는 것이 생각난 것이다.

"야, 이, 고양이 자식."

"뭐야, 오빠. 갑자기 백설기를 왜 찾아? 설마, 백설기가 미용실이라도 차린 거야?"

그렇게 말하며 더 크게 웃는다.

나도 어떻게 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곧장 세면장으로 가서는 머리를 감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를 깔끔하게 씻고 들어왔더니 마룻바닥에 백설기가 널브러져 잠들어 있다.

"저 자식……."

넌 나에게 모욕을 줬어.

그런데 그때 전화가 울린다.

전화를 받은 성준희가 날 찾는다.

"키도 씨야."

내가 전화기를 받아들자마자 저쪽에서 큰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아하하하!

이 인간이 왜 처웃고 그래?

뭐야? 설마 아까 내 모습을 보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생각해보니, 지금은 80년대다.

실시간으로 영상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니, 그럴 일은 없다.

"왜, 웃어?"

- 역시 써니야. 써니.

"뭐라는 거야? 갑자기 써니라니."

- 삼사라.

아, 새로운 기법이 적용된 편을 말하는가 보다.

사실, 새롭게 적용된 기법이 원고로 나간 지 3주 정도가 흘렀다.

"그게 왜?"

- 축하한다. 드디어 칭호를 얻었구나.

"칭호? 그게 무슨 말이야?"

- 칭호 몰라?

"아니, 말뜻은 아는데, 갑자기 칭호라고 하니까 그러지. 도대체 칭호를 얻다니 무슨 말이야?"

- 아하하하, 이번에 그린 기법에 대해서 사람들이 붙여준 칭호가 있다고.

"뭐, 기법에 칭호를 붙여?"

- 그래. 써니 이펙트.

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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