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76화 (176/425)
  • 써니 이펙트 (1)

    "어유, 얼마나 좋으실까? 돈도 엄청 많이 벌었다면서요? 아들이 그렇게 효도를 하니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네. 그야 그렇죠."

    엄마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한다.

    엄마 앞에서 온갖 아양을 떨어대고 있는 사람은 바로 예전 집주인 아줌마다.

    내가 처음 저 아줌마를 본건 경희에게 밀린 방세를 빨리 내라며 다그치던 장면이었다.

    그 이후로 내게서 밀린 방세를 받아갔긴 했지만, 세입자와 집주인 관계라는 것이 늘 그렇듯 불편한 느낌이었다.

    그러다 내가 만화스토리로 돈을 모으고 집을 옮길 때도 집이 엉망이 되었다는 둥, 못 자국이 많다는 둥 하면서 불편하게 만들더니.

    이사 이후에도 끝이 아니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우리가족과 부딪치면 인상을 팍 쓰며 째려보거나, 아니면 대놓고 외면하기도 했었다. 그러던 그 아줌마가 갑자기 왜 저렇게 친한 척을 하는 건지…….

    점심 찬거리를 준비하기 위해 근처 시장에 가신 분이 한참을 기다려도 안 오길래 어쩐 일인가 해서 와봤다. 그랬더니 슈퍼 앞에서 엄마는 이 아줌마한테 붙들려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동안 궁금함에 나온 거고, 엄마도 참 사람이 너무 물러서.

    "엄마."

    "어? 윤환이구나."

    "어머, 윤환아. 그 동안 잘 지냈니?"

    이 아줌마가 갑자기 내게도 살갑게 군다.

    이거 영 불편하네.

    "어머, 그세 많이 듬직해졌네. 이젠 높임말도 다 쓰고."

    나참.

    이젠 별것도 아닌 걸로 칭찬을 다한다.

    나는 그런 아줌마에게 대충 목 인사를 하고는 엄마를 다그쳤다.

    "한참을 기다렸는데, 왜 안 오나 해서 와봤더니 여기서 뭐하셔?"

    내 말에 엄마가 화들짝 놀라더니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물었다.

    "어머, 어쩌나? 내가 깜빡했네. 밥은?"

    그런데 엄마 손목에서 금빛으로 번쩍이는 시계를 보고는 아줌마의 눈이 커진다.

    얼핏 봐도 일반적인 시계가 아니라는 걸 눈치 챈 모양이다.

    당연하게도 이건 지로가 전에 엄마에게 선물한 건데, 일본 유명메이커 제품이다.

    그럴 보는 아줌마의 눈빛이 탐욕으로 물드는 게 보인다.

    "일단 간단하게 차렸으니까. 일단 화실로 가요."

    "반찬이 없을 텐데."

    "대충 분홍소시지랑 김치가 있으니까."

    "어머, 그런 것만 먹어서야 되겠니? 빨리 서둘러야겠다."

    그렇게 말한 엄마가 아줌마를 돌아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럼, 다음에 또……."

    "아, 그래요. 그래. 나도 급한 일이 있어서 집에 가봐야 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급한 척을 하며 호들갑을 떤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엄마의 손목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그나저나 급한 일은 무슨.

    집도 텅텅 비었을 거면서.

    어쩌면 가끔 찾아오는 아줌마들이랑 화투놀이를 하는지도 모르지만.

    엄마를 모시고 서둘러 화실 쪽으로 어가다 뒤를 힐끔 봤더니 아줌마가 우리 쪽을 계속 쳐다보고 있다. 방금까진 급한 일이 있다더니.

    아무튼 그런 아줌마의 시선을 무시하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아줌마 전엔 우리를 그렇게나 무시하더니, 오늘따라 왜 저래?"

    "글쎄다. 나도 그게 궁금하네."

    뭐, 대충은 알만하다.

    집에 방세도 제대로 못 낼만큼 가난뱅이들이 집을 구하니까, 처음엔 그게 꼴 보기 싫었을 것이다. 그러다 커다란 주택을 화실로 쓴다며 구입하고 나니까, 사실상 격차는 더 벌어진 거고, 사람이랑 아래에 있던 사람이 비슷해지거나 위로가면 시기와 질투를 먼저 한다.

    그리고 아예 넘사벽으로 차이를 벌리면 그때부턴 그 차이를 인정해 버리게 된다.

    아마 지금 저 아줌마가 지금 하는 행동은 후자의 경우고, 실제로 예전에 살던 집이랑 그리 많이 떨어져 있는 곳도 아니니, 아무래도 화실 소식을 대충은 들었을 거다.

    물론, 만화를 그리고 있으며, 그 때문에 돈을 좀 많이 번다는 것 외에는 거의 모르고 있을 테지만.

    그런데 사실, 이런 건 저 아줌마 한명만이 보이는 행동은 아니다.

    엄마의 행동반경에 들어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패턴이기도 하다.

    당장 인근에 가게를 하는 사람들만 해도 엄마가 지나갈 때면 엄청 친근하게 군다는 모양이니까.

    아무튼 이래저래 우리가족이 동네사람들에게는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렇게 화실에 들어오자 사람들이 점심 준비를 거의 끝내놓고 있었다.

    "어머, 내가 너무 늦어서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맞아요."

    "그냥 이렇게 먹을게요."

    여자들이 엄마를 보고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그게 아니지. 힘들게 일하는데, 밥이라도 든든하게 먹어야지. 조금만 기다려줄 수 있지?"

    그렇게 말하며 서둘러 엄마가 장을 봐온 것들로 반찬을 더 준비하신다.

    엄마의 그런 모습에 모두가 피식 웃으며 다시 반찬을 준비했고, 곧 반찬이 준비되자마자 모두 식사를 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에이, 그런 말씀 마세요. 늘 식사 준비를 해주시는 것도 감사한데."

    "그럼요. 어머님 반찬이 얼마나 맛있는데요."

    "그렇게 생각해주니까 고마워."

    그렇게 평소처럼 화기애애한 식사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모두 식사가 끝나자 쉬는 시간.

    요즘은 슬슬 날씨도 더워지고 있는 상황이라 대부분 마루에 나와 선풍기 바람을 쐬며 엄마가 사온 과일을 디저트로 먹는다.

    그리고는 모여서는 뱀이 잔뜩 그려진 주사위 인생게임을 하거나, 낮잠을 자기도 한다.

    실버는 평소처럼 바람이 가장 잘 통하는 마루 한쪽 창가에 앉아 만화책에 열중해 있다.

    보고 있는 만화는 소년점프.

    이번에 드리어 스미레의 단편 반응이 좋았던 탓인지, 5화짜리 짧은 이야기가 연재를 시작했다.

    사실 얼마 전에 스미레가 전화를 해왔었는데, 그때도 선희와 대화를 나누고는 실버와 통화하려했었다.

    물론 처음엔 또 거부하긴 했지만, 결국 못이기는 척 전화를 받았었다.

    뭐라고 전화기 너머에서 한참을 떠들었던 것 같은데, 실버는 그냥 "열심히 그렸대."라고 말할 뿐이었다.

    아무튼 재미없는 인간이다.

    그런데 이번에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바로 스미레가 실버에게 '스승님'이라는 명칭을 썼다는 거다.

    아마도 통화 중에도 사용했던 모양이지만, 저 건 실버 본인에게 들은 말은 아니다. 전화기를 건네 준 선희가 "실버 스승님 바꾸래."라고 말하는 바람에 알게 된 거지.

    아무튼 그 전화 이후로 스미레가 소년 점프 여러 권을 소포로 보냈고, 덕분에 화실 사람들 모두가 이미 다 본 상황이다.

    물론 그때 실버도 봤고,

    그런데 그날 이후부터 이상하게 실버는 틈만 나면 스미레의 만화를 저렇게 들여다보고 있다.

    여전에 그렸던 단편도 마찬가지.

    스승님이라는 말의 파장이 컸던 걸까?

    사람들이 어쩌다 스미레를 칭찬하면 본인이 제일 뿌듯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혼자 저렇게 보고 있을 때 다가가면 후다닥 드래곤볼이나 북두의 권을 펼치겠지만.

    뭘 저렇게 부끄러워하는지 모르겠네.

    이대봉이 저 모습을 봤으면 또 놀렸을 텐데.

    아무튼 그 동안 나는 이번에 일본에서 보내온 애니메이션 비디오를 보기 위해 화실 옆방에 들어갔다.

    작년에 일본 극장에서 개봉한 버스(birth)라는 애니로 일본 역사상 최초로 개봉된 OVA작품이다.

    알 만한 사람들에게는 꽤나 알려진 작품으로 특히 이 작품은 카나다 요시노리가 '모션 코믹'에 연재하던 동명의 만화가 원작이다.

    물론 원작자인 그가 캐릭터 디자인과 원화까지 직접 맡아서 작업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만화는 실제로 만화덕후나, 이쪽 업계에선 거의 전설과도 같은 작품인데, 특히 원화를 맡은 사람 중에 그 유명한 '에반게리온'의 안노 히데아키도 끼어 있다.

    물론, 이 시절의 안노 히데아키야 이름없는 신참에 불과했지만, 아, 한국에선 1994년 추석에 '판도라 행성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방영한 적이 있다.

    물론 내가 1994년생인 덕분에 실시간 시청은 하지 못했다.

    아무튼 이 작품을 받은 뒤로는 틈만 나면 한번씩 보고 있다.

    이 시절 애니에서 보기 힘든 역동적 움직임과 시원한 묘사 때문인지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탓이다.

    스토리 때문에 고민이 많을 땐 꽤나 도움이 된다.

    그렇게 한잠 애니를 보고 있는데, 어느새 왔는지 내 옆에 선희가 있다.

    "아, 깜짝이야. 기척이라도 좀 해라."

    "……."

    "언제 왔어?"

    "아까."

    선희가 시선은 TV에 고정시킨 채 대답한다.

    아까라니.

    오늘 평일 아니었나?

    분명 지금은 점심시간인데.

    시계를 확인했지만, 분명 점심시간이다.

    그때 내 소리를 들었는지 경희가 방문안으로 머리를 빼꼼 내밀며 말한다.

    "오늘 시험이라고 했잖아."

    "아."

    그러고 보니 어제 그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3일간 기말고사인지 시험인지, 뭐 그런걸 한다고 했었지.

    그나저나 요즘엔 뭘 이렇게 잘 잊어버리는 건지.

    머리를 긁적이며 선희를 보다가 아직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경희에게 물었다.

    "밥은 먹었어?"

    "어. 지금 엄마가 차려줘서 먹었지."

    역시 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거르지 않는다.

    암, 거르면 큰일 나지.

    "오빠, 커피라도 가져다줄까?"

    "어. 그래."

    "알았어."

    힘차게 대답한 경희가 곧장 부엌으로 사라진다.

    쟤 매일 뭘 먹어서 저렇게 늘 힘이 넘치는 건지.

    그런데 곁에 있는 선희는 완전히 혼이 빠진 것처럼 정신없이 TV를 보고 있다.

    역동적인 공중부양 바이크 추격씬 장면인데 이 장면에 완전히 몰입해 있다. 하긴 이 시절엔 보기 힘들 퀄리티의 장면이니까.

    그러고 보면 이 모습……. 나우시카를 볼 때와 모습과 오버랩 된다.

    그때도 나우시카의 비행장면에서 저렇게 열중하고 봤었지.

    사실, 두 작품의 공통점이 있기는 하다.

    바로 버스의 원작자인 카나다 요시노리가 나우시카 비행장면에도 참여했었다.

    그런 역동적인 장면만큼은 미야자키 하야오를 능가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엔 시간이 너무 부족해 이리저리 사람들을 끌어들여 했던 것도 있다.

    "자 커피."

    "땡큐."

    "어? 그런데 새로 일본에서 보낸 만화 영화야?"

    "어."

    "난 작년에 테레비에서 하던 뭐였지?

    그거?"

    "공룡아 불을 뿜어라."

    "아, 그래. 그게 난 엄청 재밌던데. 오빠한테 판타지, 판타지 얘기만 듣다가 그거 보고 감동했잖아."

    경희가 말하는 작품은 바로 스튜디오지브리의 전신인 톱크레프트에서 제작한 'The Flight of Dragons' 이라는 애니다.

    물론 제작은 톱크래프트지만, 감독은 줄리 바스와 아서 랜킨 주니어다.

    이 두 양반은 애니인 '반지의 제왕'과 마지막 유니콘'을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어느새 버스가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나 려는데 선희가 비디오테이프를 되감기하며 말한다.

    "나 더 볼래."

    어지간히도 마음에 든 모양이다.

    뭐, 처음부분을 못 본 탓이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저녁식사시간 때 잠시 나온 것 말고는 계속 비디오만 시청하는 게 아닌가.

    혹시나 싶어서 방에 들어가 봤더니.

    계속 버스만 보고 있다.

    도대체 몇 번을 본거여?

    시간을 보니, 대충 계산해도 세 번 이상은 플레이한 모양인데.

    결국 모두가 퇴근하던 시간에도 멈추지 않았다.

    뭐, 데생이야 늘 여유가 있는 편이니까, 선희가 며칠 쉰다고 해도 문제될 건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심하게 꽂히다니.

    처음 만화라는 걸 제대로 그리던 그때의 모습이 떠오르게 한다.

    한동안 뭔가에 제대로 심취한 적이 없었는데, 다시 선희의 가슴에 불을 당긴 게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다음날.

    선희의 데생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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