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감 (3)
녀석이 몸을 돌리며 옆의 있는 사람들을 한번 힐끔거리고는 머리를 좌우로 꺾는다. 그리고는 뒤쪽에 넘어져 있는 박유찬을 슬쩍 돌아본다.
"그런데, 너 방금 저 놈에게 매제라고 했냐?"
그 말에 박유찬이 피식 웃었다.
"완전히 막힌 놈인 줄 알았는데, 귀는 용케 잘 뚫려있구나."
"뭐라는 거야, 이 망할 놈이."
그렇게 말하며 차려는 시늉을 한다. 그러자 넘어져있던 박유찬이 몸을 웅크린다.
"망할 새끼. 그러게 왜 시비를 걸어, 시비를."
시비라니?
하긴, 저 박유찬이라는 인간이 실없는 소리를 잘 하니까.
거기다 이놈이 예전에 본체에게 맞은 적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두 사람은 이미 안면이 있을 테고, 결국 저렇게 맞고 있는 건 그냥 우연히 벌어진 건 아니라는 거군.
그런데 옆에 있는 두 사람은 내게 묘한 표정을 지으며 째려보고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깡패 엑스트라1, 2처럼.
그나저나 표정들 정말 살벌하다.
그런데 저런 적대적인 시선이 왜 가슴이 떨리는 거지? 마치 복권을 긁을 때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기분 좋은 긴장감에 심장마저 마구 두근거린다.
본체 녀석, 변태 아니야? 이거 진짜 정상이 아니었구나.
하지만, 내 머리는 이런 몸과 달리 싸워서는 안 된다면 계속 경고를 보내고 있다.
정신과 육체가 따로 논다는 이질적인 느낌.
아무튼 녀석이 다시 나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있다. 전형적인 악당의 표정으로, 이거 참.
그래도 믿을 구석이 있다는 거겠지.
"너, 이 새끼. 역시, 그 꼬마 녀석 애비구나."
"꼬마 녀석? 준모?"
"이름 따위야 뭐가 됐건."
저 놈.
제 아들인 거 모르는 건가?
성준희가 알려주지 않았나?
뭐랄까, 지금의 성준희 성향으로 보면 어울리지 않는 놈처럼 보이기는 한다. 아직 양아치 짓을 하는걸 보면, 그나저나 내가 준모 아빠라고 오해하고 있구나.
저런 놈의 오해 따위야 별로 신경 쓰이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준모를 가지고 저렇게 말하는 꼴을 보니 정말 한 대 쥐어박고 싶어지네.
"내가 정말 군대 전역하고는 바르게 살려고 했는데, 말이지. 너 같은 양아치는 두고 못 보겠더라고, 씨발, 준희 그년은 이제 포기하겠어."
포기도 참 빠르고,
그래도 좀 제대로 알아나 볼 것이지.
그나저나 그렇게 좋아했다면서 그년은 또 뭐야?
아우, 그냥 이놈은 군대 갔다 와서도 사람이 되질 못했구나. 하긴, 군대가 뭐 사람을 정신개조 시켜주는 곳도 아니고,
"하지만, 넌 그냥 못 놔두겠다. 예전에진 빚도 좀 있으니까, 이참에 모두 갚아줄게."
"안 갚아도 되는데."
"미친 새끼. 이 와중에도 헛소리를."
그렇게 말하면서 내게 천천히 걸어온다.
적대감을 풀풀 풍기면서.
"내가 군대에서 격투기를 좀 연마했거든. 이참에 시험을 좀 해봐야겠다."
"아니, 연마를 했으면 혼자 오던가. 무슨 사람을 둘씩이나 달고 와서는 그런 소리를 하고 그래?"
내 말에 멈칫하더니 얼굴이 더 일그러진다.
"이 새끼가?!"
버럭 소리를 치고 있는데, 어두워서 보이진 않지만 얼굴색은 대충 알 것 같다.
그런데 이 미친놈이 갑자기 내게 달려들었다.
"어?"
녀석이 갑자기 달려들어서는 주먹을 휘두른다. 하지만, 내 몸은 전에 박유찬을 만났을 때처럼 반사적으로 그 주먹을 피해버린다. 그것도 아주 가볍게.
오, 역시 본체 녀석은 싸움꾼 같은 놈이었나 보다.
그나저나 이거 곤란한데.
지금 막 녀석을 후려치고 싶은 강력한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으니까.
이 느낌.
아까, 그 심장이 거칠게 두근거리던 그 이유가 아닐까.
와, 이거 본체의 몸에 남아있는 기억이장난 아니네.
슬슬 이런 상황으로 흘러가는 게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망할 새끼가!"
주먹을 휘두르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돌려차기, 앞차기까지. 아주 지랄 옆차기를 하는구나.
그런데 그때 구경만 하던 두 녀석이 우리 쪽으로 움직인다.
아마도 이놈 혼자서는 안 된다는 걸 안탓이겠지.
그때였다.
"안 돼!"
그런 두 녀석 중 한명에게 박유찬이 매달리며 늘어진다.
"이 새끼가 진짜!"
퍽.
또 한 대 맞고 나가떨어진다.
아, 이거.
상황이 정말 이상하게 돌아가네.
내가 이 상황에서 이 정신 나간 놈들에게 좋은 말로 타이른다고 들어줄 것 같지도 않고, 도망을 치자니, 저 바보 같은 박유찬이 걱정이고, 경찰을 부르자니, 애매하다.
어쩌나?
하지만 이렇게 곤란한 상황임에도 어째 이렇게 마음에 여유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눈앞에선 아직도 내게 달려드는 녀석이 있음에도 오만 잡생각을 다 떠올리고 있으니.
그러고 보면, 선희 못지않게 본체 녀석도 분야는 다르지만 나름 천재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나름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던 찰나.
갑자기 커다란 그림자가 두 사람을 막아서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자 두 녀석들이 멈칫한다.
그런데……. 누구지?
어?
실버다.
아까, 집으로 간 줄 알았는데, 어떻게 여기에 온 거지?
슈퍼에 뭐 사러 왔나?
그런 녀석들의 반응 때문일까? 한참 내게 주먹질을 하던 녀석이 그새 행동을 멈추고 돌아서 있다.
"형들, 왜 그래요?"
그런데도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없이 실버 앞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한다.
등 뒤의 모습이라 정확한 건 아니지만 어쩐지 지금 실버가 그들에게 좋은 말로 타이른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상대편 두 남자도 그것을 수긍하는지 머리까지 끄덕이고 있다.
뭐야? 서로 아는 사람들인가?
세 사람의 괴이한 분위기 때문인가? 어쩌다 보니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해있다.
박유찬도 그렇고, 내 앞에 있는 이 녀석도.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실버랑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데, 저렇게 진지한 건지도 이해하기 힘들고,그때 갑자기 두 남자가 실버에게 인사를 하려하다 멈칫한다. 그리고는 곧장 시선을 우리 쪽으로 돌리고는 내 앞에 있는 녀석을 불렀다.
"야, 황규일, 이제 돌아가자."
이놈 이름이 황규일이구나.
아무튼 남자의 말에 황규일이라는 이 녀석이 깜짝 놀라더니,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아니, 형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돌아가다니요. 아직 시작도……."
"시끄러 새끼……."
그렇게 말하다가 이내 실버의 눈치를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냥, 가자고 할 때 가자.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그렇지만."
"거 정말……."
"……네."
인상을 쓰자마자 자동으로 대답이 튀어 나온다.
그리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더니 뭔가 아쉽다는 듯 내 쪽을 한번 돌아본다. 하지만 내 눈과 마주치자마자 움찔하고 놀란다.
이 녀석, 아까는 그렇게 기세등등하더|니.
역시 두 사람을 믿고 그렇게 나댔던 거군.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
어쨌건 황규일이 축 늘어진 어깨를 한 채로 남자들을 따라 그 자리를 벗어난다.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는데, 실버가 어느새 내게 다가와 있다.
그리고는 뭔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날 한번 쓱 보더니 쯧 하며 혀를 찬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넌, 좀 책임감을 좀 가져."
"응?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너,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대충 아는데, 이젠 너만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기억하라고."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몸을 돌려 슈퍼 쪽으로 걸어간다.
그 모습을 보던 내가 잠시 멀뚱거리고 서 있었다.
그때 박유찬이 다가왔다.
"매제, 저사람 누구……."
박유찬이 주둥이를 나불거리다 내 눈빛을 보고는 움찔하며 놀란다.
내가 그런 박유찬을 보며 조용하게 말했다.
"앞으로 절대, 매제라고 부르지 마."
"에이, 그래도."
"결코, 무슨 일이 있어도."
"……어, 알았어."
내 눈빛에 기가 죽었는지 곧장 박유찬이 머리를 끄덕였다.
*
아침부터 어시들은 가요 이야기 삼매경에 시간가는 줄 모르는 모양이다.
"바람바람바람 노래 너무 좋더라."
"맞아, 가수도 멋있고."
"에이, 난 외모는 별로던데, 노래는 괜찮지만."
"전, 밤비내리는 영동교가 좋던데요?"
"어머, 젊은 남자애가 그런 거 좋아해?"
"뭐, 주현미도 예쁘고요."
막내인 김기철의 말에 어시들이 웃는다.
하지만 난 그런 상황에서도 오른쪽 팔을 턱에 괸 채로 원고에 집중하고 있는 실버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실버는 평소처럼 약간 찌푸린 표정으로 원고를 하고 있을 뿐 다른 사람들의 수다.
에도 별로 반응이 없다.
잠시 후, 시선을 느꼈는지 날 슬쩍 돌아본다.
그때 내가 피식 웃어보이자 실버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너, 대봉이랑 너무 가까이 하지마라."
"뭐라는 거야?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인데?"
언제 온 건지 이대봉이 투덜거리며 실버를 쏘아붙인다.
"별 뜻 없어."
실버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머리를 숙이고 원고에 집중한다.
하지만 이대봉도 그냥 넘어갈 리 없다.
는 듯 실버에게 따지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말해보라고, 왜 우리 윤환에게 날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는 건데?"
"……."
"야, 이 깡패 같은 인간아. 무슨 뜻이냐고?"
그런데 그때 실버의 표정이 팍 일그러진다.
그 때문에 이대봉이 움찔하며 순간 뒷걸음치더니 내 뒤쪽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이대봉은 이렇게 실버가 화날 땐 찍소리도 못하면서 평소엔 잘도 달려든다.
아무튼 실버는 그런 분위기와 달리 곧장 근처에 있던 김기철 쪽으로 다가갔다..
김기철이 여자어시들과 수다를 떨다가 갑자기 다가온 실버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거기, 수정액 좀 줘."
"아, 여기요."
그것을 받아든 실버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그림을 수정액으로 슥슥 지우고는 그 위에 다시 펜선을 덧씌운다.
그림을 그리다 펜선이 좀 어긋났던 모양이다.
그렇게 다시 원고작업에 열중하자 내 곁에 있던 이대봉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으, 진짜. 깡패라는 말. 엄청 싫어하는데 깜빡했다."
뭐
깡패라는 말을 싫어해?
다시 실버를 바라본다.
하지만, 실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전히 펜선작업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실버에게 시비를 거는 게 부담스러웠는지 이대봉이 이번엔 어시들의 대화에 은근슬쩍 끼어든다.
"모두 무슨 얘기 하는데? 가요?"
"응. 각자 좋아하는 노래."
"음, 역시 노래는 조용필이 최고지. 단발머리."
"어머, 제임스 오빠는 역시 구닥다리라니까."
그렇게 다시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동화된다.
역시, 이대봉의 친화력은 최강이구나.
그렇게 잠시 이대봉을 쳐다보다가 이번엔 성준희를 힐끔 바라봤다.
사람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그저 웃으며 듣고 있다. 그러면서 손은 능숙하게 톤 깎기를 하고 있고, 얼굴을 보니, 어제 일에 대해선 전혀 아는 눈치는 아니다.
박유찬이 그래도 쓸데없는 얘기를 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어제 상황도 대충 유추해보니, 그 황규일이라는 녀석이 과거의 감정 때문에 아는 어깨들을 몇 데려온 것이고, 그러다 동네에서 박유찬과 부딪친 모양이었다.
박유찬의 성격상 분명 욱하는 성격에 한마디 했을 거고.
덕분에 그런 일이 벌어졌겠지.
아무튼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나타난 실버 덕분에 유야무야 넘어가긴 했는데, 역시 그들과 실버가 무슨 사이였을지 궁금하긴 하다.
한참 수다에 빠져 있는 이대봉.
저 인간은 혹시 실버의 과거에 대해 알고 있을까?
잘은 모르지만, 아까 깡패 어쩌고 하는 걸 보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게 그 사실을 굳이 알려줄 것 같지도 않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봉은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면 참 사람들은 이런저런 사연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화실에 모여 만화를 만들어간다.
그런데 어제 실버가 했던 말이 갑자기 머리를 스친다.
'넌, 좀 책임감을 좀 가져.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대충 아는데. 이젠 너만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기억하라고.'
어째 어깨가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