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74화 (174/425)

책임감 (2)

내가 황당한 얼굴로 성준희를 바라보자, 그녀가 손을 좌우로 내저었다.

"네가 여기 있는 걸 봤으니까, 이젠 안올 거야.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해."

"우연히 만났는데, 네가 미안할 게 뭐있어."

"그래도……."

성준희가 미안한 얼굴을 하고는 서둘러 대문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 성준희를 보다가 다시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바라봤다.

아까 분위기는 분명 예전에 이야기 들었던 때와는 상당히 달랐는데.

다시 잘 지내보자는 뭐, 그런 분위기 같기도 하고, 성준희는 어쩔 셈이지?

잠시 생각을 하던 내가 곧 머리를 가로저었다.

나 참, 내가 뭐라고 이런 걱정까지…….

곧장 어깨를 으쓱하고는 문안으로 들어갔다.

***

며칠 후, 오후,

성준희가 평소처럼 화실을 나와 인근에 있는 유치원으로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유치원이 끝날 시간이라 준모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걸음을 재촉하며 걸어가던 그때 누군가 다가오더니 그녀를 불렀다.

"준희야."

움찔하고 놀란 성준희가 걸음을 멈추고는 시선을 돌렸다.

"어디 가는데?"

다가온 남자가 묻는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성준희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이 남자는 바로 얼마 전에 화실 대문 앞에서 만났던 옛날 남자친구 황규일이었다.

성준희는 곧장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외면하고는 계속 걸어갔다.

"야, 준희야. 나랑 이야기 좀 하자."

그렇게 말하며 그가 성준희의 팔을 붙들었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춘 그녀가 냉랭한 표정으로 돌아본다. 그리고는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너 정말 왜 이러는 건데?"

"왜 이러냐니? 전에도 얘기했잖아. 너랑 다시 잘해보고 싶다고."

"너랑 끝난 게 벌써 몇 년 전인데 그래? 그러니까, 내 앞에 다시 나타나지마."

그 말이 황규일의 미간에 골이 깊게 파였다.

"야, 너 왜 어쩌다 이렇게 변했냐? 예전엔 참 고분고분하고 착했잖아. 너 나밖에 모르는 애였잖아."

황규일의 말에 성준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며 살짝 위축이 된 황규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 군 생활하면서 정말 많이 변했다니까? 나 전역하면 너랑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도 했고."

"변하긴 뭘 변해? 그때나 지금이나 네 마음대로잖아."

"정말 변했어. 정말로 맹세한다고, 그때, 내가 한 행동을 정말로 후회하고 있다니까?"

"미안하지만, 이제 더 이상 철없던 그때의 내가 아니야. 그러니까, 그냥 문제 일으키지 말고 그냥 돌아가 줘."

"……야. 그러지 말고."

"군 생활 동안 변했다면 이제라도 마음잡고 살아. 나한테 이러지 말고."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푹 쉰 성준희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 놈 때문이야?"

황규일의 물음에 다시 성준희의 말이 멈춘다.

"뭐?"

"네가 일한다는 그곳에서 그 놈이 나왔었잖아. 그 집에서 일한다더니, 그놈의 집에서 가정부 생활 하는 거 아니었냐?"

"……."

"혹시 나한테 거짓말 한 거야? 그 녀석 이랑 그 집에서 같이 사는 거 아니냐고."

"……그건 아니야."

"정말이야?"

"정말이건 아니건, 내가 그걸 왜 너에게 설명해야 하는데?"

그 말에 그녀의 진심을 느낀 황규일이 안심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는 다시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 새끼 뭔 나쁜 짓을 해서 그렇게 큰 집을 샀는지는 모르겠는데, 너 지금 걔한테 이용당하고 있다니까."

황규일의 말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쁜 짓?"

"그래. 분명해. 그런 새끼가 정상적으로 그런 집에서 살 리가 없지."

"……."

"아무튼 넌 내가 책임진다니까. 그러니까……."

"정말 한심해. 넌, 정말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너랑 얘기하고 있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져."

그렇게 말하고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장 황규일이 그런 그녀를 따라 쫓아왔다.

"야. 내 말 좀 더 들어보라니까……."

그런데 그때 성준희가 건물 안으로 빠르게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그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건물을 올려다본다.

'00유치원'

"……유치원?"

갑자기 유치원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변한다.

잠시 후 남자 아이의 손을 잡고 나오는 성준희가 황규일을 보며 다시 멈칫하다가 곧장 그를 피해 걸어가려 한다.

그때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던 황규일이 스쳐지나가려던 그들의 길을 막고는 시선을 낮춘다. 그리고는 곧장 아이에게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꼬마야. 너, 이름 뭐니?"

그 질문에 놀란 아이가 성준희의 다리에 매달린다. 그리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준모, 성준모."

"성……준모?"

그렇게 말하며 놀란 눈을 한 채 성준희를 바라본다. 그러자 성준희가 그런 황규일을 외면하고 지나치려하자 그녀를 다시 붙잡았다.

"얘, 누구야? 너랑 같은 성씨던데, 설마 아들?"

"누나, 이 아저씨 누구야?"

"……누나? 누나라고? 너 동생 없잖아."

"나 동생 맞는데."

아이의 말에 깜짝 놀란 성준희가 곧바로 황규일을 밀쳤다.

"비켜! 그리고 여기엔 앞으로 다시는 나타나지마!"

하지만 황규일은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말해봐. 혹시 그 자식 애야?"

짝!

뺨을 맞은 남자의 얼굴이 확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보던 성준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그냥 돌아가 줘."

황규일이 붉게 물든 뺨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거, 뭐야. 정말인가 보네?"

"제발 너랑 엮이고 싶지 않으니까……."

"뭐? 엮여?"

그때 누군가의 음성이 들여왔다.

"어? 언니!"

똑같이 생긴 쌍둥이 여고생들이 가방을 어깨에 맨 채로 다가오며 말한다. 그러자 황규일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곧장 물러섰다.

"오늘은 여기서 돌아가지만, 이대로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하고는 서둘러 돌아서며 빠르게 어딘가로 걸어간다.

그 모습을 보던 쌍둥이들이 묘한 얼굴로 성준희를 바라본다. 그때 아이가 조금 겁먹은 얼굴로 쌍둥이 중 한명에게 매달렸다.

"누나! 무서워."

"누나가 있으니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알겠지?"

그때 선희가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말없이 바라보다 성준희에게 물었다.

"누구?"

"응. 아니야, 옛날에 좀 알던 사람, 신경쓰지 않아도 돼."

"……?"

***

"이상한 남자?"

"응. 준희 언니는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만 하긴 했지만, 그래도 분위기가 좀 이상했거든."

사람들이 먼저 퇴근하고 나자 선희가 낮에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대충 예상되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물었다.

"어떻게 생겼어?"

그러자 책상에 앉아서 열심히 작업 중이던 선희가 종이 한 장을 들고 다가와서는 내게 내밀었다.

초상화다.

원고데생을 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이걸 그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전에 잠시 봤던 그 남자 얼굴이 맞는 것 같다.

솔직히 나도 너무 짧게 봤던 덕분에 정확한 얼굴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느낌상으로는 비슷해 보인다.

그나저나 한번본 얼굴을 떠올리기도 힘든데, 그걸 이렇게 디테일하게 그려내는 선희는 진짜 대단하긴 대단하네.

"맞아. 이 얼굴이야. 와, 이렇게 놓고 보니까, 눈이 찢어진 게 딱 봐도 나쁜 인간처럼 보인다. 그런데 혹시 오빠도 아는 사람이야?"

"뭐, 그렇게 잘 아는 건 아니고, 그냥 몇 번 본 적이 있어."

사실은 한번 이지만,

뭐 본체에게 맞은 적이 있다고 했으니, 몇 번 부딪쳤겠지.

"그래? 누군데?"

"아, 뭐. 성준희 옛날에 알던 친구."

"혹시 옛날 남자친구?"

"거기까진 나도 자세히 몰라."

준모의 아빠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해줄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튼 다음에 또 찾아온다고 했으니까, 조만간 또 만날 텐데, 영 느낌이 안 좋아."

"또 오겠다고 그래?"

"응. 그렇게 말하고 갔어."

"……."

일단 성준희의 입장을 정확하게 모르는 상황이니 일단 지켜보긴 하겠지만 좀 신경 쓰이기는 하네.

그때 실버가 화실로 들어왔다.

"뭔 얘기를 그렇게 심각하게 해?"

"심각은 무슨, 그나저나 왜 다시 왔어?"

"방 열쇠 가지러."

"방 열쇠?"

"어. 어딘가에서 잊어버린 모양이야. 그래서 화실에 둔 비상열쇠를 가지러 온 거다."

"아."

실버는 평소에도 자주 열쇠를 잊어버리는 통에 스페어 키 몇 개는 그냥 화실의 책상에 둔다는 모양이다.

아무튼 실버가 자신의 자리로 가서는 서랍을 열고는 곧장 그곳에서 열쇠를 하나 꺼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난 간다."

"어. 그래, 내일 봐."

"오냐."

그렇게 대답한 실버가 다시 화실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다가 곧 선희가 작업을 마무리하자 우리도 화실을 나섰다.

대문을 잠그고 난 뒤 셋이서 집으로 걸어가는데, 경희가 뭔가 떠올랐는지 손바닥을 짝하고 친다.

"아, 엄마 고무장갑 하나 사달라고 하던데, 깜빡했다."

그렇게 말하며 슈퍼가 있는 골목으로 가려하자 내가 그런 경희를 말렸다.

"내가 사갈 테니까, 선희랑 집에 먼저 들어가."

"오, 진짜? 그래 줄텨?"

경희가 할머니 같은 음성으로 말하자 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고마워어, 총각."

경희가 그렇게 장난치듯 말하며 선희와 함께 집으로 간다.

낮이면 몰라도 밤엔 동네가 굉장히 어두운 편이다. 미래에서였다면 모를까, 지금 시절엔 공터도 많고, 사각지대도 많은 편이라 여자애를 밤에 혼자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나마 화실에서 집으로 가는 일은 좀 밝은 편이라 괜찮지만.

아무튼 어둑한 골목을 돌아 슈퍼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데, 뭔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어째 싸우는 것 같은데?

갑자기 호기심이 생긴다.

역시 가장 재미있는 건 싸움구경이랑 불구경이라더니.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빨리해 골목을 돌아서며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본다.

어둑한 골목이긴 해도, 그나마 근처에 가로등이 몇 개 켜져 있어서 그럭저럭 잘보인다.

한명이 아니라 네 명이 모여 있다.

그중 두 명은 그냥 서 있을 뿐이고, 나머지 두 사람이 싸우는 모양인데…….

상황을 보니, 좀 일방적으로 한쪽이 두들겨 맞고 있다.

이거, 경찰에 연락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핸드폰이라도 있으면 전화를 하겠는데. 쯧.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곳을 향해 다가간다.

예전의 나였다면 분명 모른 척 했을 텐데.

아무튼 그들 근처로 다가가자 서 있던 두 명 중 한명이 고개를 돌리더니 날 쏘아본다.

"신경 쓰지 말고 가던 길이나 가지?"

"……."

그런데 그들 뒤로 보이는 두 남자 중 한 명이 발로 걷어차자 한명이 바닥에 벌러덩 넘어진다.

"아이코!"

"이 망할 새끼가, 어디서 또 지랄이야?"

넘어진 남자를 발로 한 번 더 걷어찬다.

"야, 임마! 때린데 또 때리냐?!"

어?

이 목소린?

"이 자식이 이 와중에도 뭔 헛소리야!"

넘어진 남자의 얼굴을 보기위해 다가서 려하자 이젠 두 녀석이 동시에 날 노려본다. 제법 험상궂게 생긴 녀석들이긴 하지만, 그보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앞선다.

그리고 넘어진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 박유찬?"

그 순간 넘어진 남자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역시 박유찬이 맞구나.

성준희의 사촌, 아니 고종사촌오빠라고 했었나? 아무튼 그 사람이다.

아, 이 동네에 여자 친구가 산다고 했었지.

그런데 여기서 왜 두들겨 맞고 있는 거야?

"누구……? 어? 매제!"

저 놈은 이 와중에도 저런 소리를…….

그런데 그때 남자를 발로 차던 남자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어?

이놈도 아는 얼굴이다.

성준희의 예전 남자친구라던 그놈.

선희의 초상화랑 완전히 똑같네.

그때 녀석이 피식 웃었다.

"뭐야, 너네? 역시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