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73화 (173/425)
  • 책임감 (1)

    "와, 대단하네. 갑자기 실력이 팍 늘어버렸어."

    "그러게. 얜 재능이 사기 같아. 그 짧은 시간에 이만큼 실력이 늘었다니."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다. 벌써 점프에 이런 단편을 올릴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거니까."

    어시들이 소년점프를 보며 수군거리고 있다.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건, '그랜드 크라운'으로 판타지 단편만화로 바로 얼마 전화실에서 일주일간 생활했던 스미레의 만화다.

    사실 일본으로 돌아가고 며칠 후에 전화가 왔었는데, 그때 소년점프에 단편이 들어간다는 소식을 전해왔었다.

    그 소식을 전하면서 나에게 감사 인사를 했고, 더불어 실버에게도 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했었다. 원래는 전화를 바꿔주려 했지만, 실버가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내가 대신 전해줘야 했지만, 이런 걸 보면 참 재미없는 인간이라니까.

    기껏 그렇게 힘들게 가르쳐 놓고선.

    은근히 이번 그림도 남들보다 먼저 살펴본 주제에.

    물론 다른 사람들 앞에선 드래곤볼이랑, 북두의 권만 본척하긴 했지만, 당연히 아무도 그것에 속은 사람은 없었고, 아무튼 '그랜드 크라운'은 처음 스미레가 가져왔던 만화를 기반으로 새롭게 각색되어 만들어졌다. 그래서 기본 스토리는 동일하지만, 연출과 그림이 다라져버린 탓에 완전히 다른 만화처럼 보일 정도다.

    물론 완성도는 엄청 올라갔고, 실버의 도움으로 펜선을 고친 덕분에 그림이 더욱 풍부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연출도 몇 번 가르쳐 줬더니, 제법 능숙하게 묘사해 신인이라는 것도 느끼기 힘들 정도다.

    예전처럼 쓸데없이 복잡하기만 하던 허술한 만화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거, 전에 심봉 오빠가 가르치던 그 펜선 맞지?"

    "그러게. 그런데 그때보다 더 능숙해졌네."

    "혼자 연습을 엄청 한 모양이야. 진짜 걔 보기엔 하늘하늘하게 생겼지만 의외로 깡이 있다니까."

    "그나저나, 옷 무늬는 진짜 대단하다. 단순해 보이는 복장도 무늬 때문에 눈에 확 띄고."

    "나도 이런 옷 한번 입어보고 싶어."

    이들의 말처럼 옷 무늬는 정말……, 대단하다고 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꼼꼼하게 그려넣었다.

    옷 무늬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 했더니 결국 단편에선 자신의 원을 푼 모양이다.

    뭐, 저런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건가?

    선희도 내가 효율적으로 그리라며 데포르메를 시켰지만, 아직 만화 구석구석 처음 보는 문자로 구석구석 이스터에그를 만들어 넣고 있으니까.

    나도 그런 것까지는 말릴 생각이 없지만.

    물론, 그 뜻이 뭔지는 그때그때 물어서 확인하고 있다.

    전처럼 원작자인 내가 모르는 상태로 계속 이야기가 진행되면 결국 큰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번 그랜드 크라운은 스미레에게도 중요한 단편이 될 것이다.

    이것의 반응에 따라 짧은 서너 편짜리 이야기로 테스트를 받을 기회를 얻느냐 마느냐가 달렸을 테니까. 그리고 테스트를 받게 되면 다시 연재작품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선희도 스미레의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참동안 그림을 바라본다.

    표정을 보니 나름의 자극이 되는 모양이다.

    하기야, 옷의 화려함만 놓고 보면 솔직히 선희보다는 스미레가 한 수 위지.

    특히나 선희의 경우, 다크 프린세스를 그리면서 화려한 복장을 좋아하게 되었으니까.

    그때 이대봉이 화실로 들어온다.

    "뭘 그렇게 모여서 보고 있어?"

    "단편요, 단편, 스미레가 그린 만화요."

    김기철이 대답하자 잠시 눈알을 굴리던 이대봉이 머리를 끄덕인다.

    "스미레? 아, 전에 나 없을 때 왔다던 걔?"

    "네"

    "걔실버가 가르쳤다며? 그런데, 벌써 단편?"

    "응. 맞아. 거기다 무려 소년점프에서."

    박소미가 끼어들며 말하자 이대봉이 화들짝 놀란다.

    "뭐? 소년점프? 정말?"

    "응. 정말 대단하지?"

    "그러네. 그나저나 갠 단번에 고속 승진 이네."

    "고속승진이라니?"

    "그렇잖아. 소년 히어로 중견급 잡지가 아닌 일본 최고의 만화잡지니까. 그렇다는 건 기본적으로 우리보다는 더 많은 독자들이 본다는 거잖아. 거기다 만약 연재를 시작하게 되면 단행본 판매에서도 완전 밀릴지 모르지."

    이대봉의 말에 실버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번쩍 들었다.

    "아무튼 저 밉상은 말을 해도……."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아. 소년 점프가 일본 1위도 맞는 사실이고."

    "그러면, 너도 소년점프로 옮기면 되겠네."

    "야, 그게 내 마음대로……."

    그렇게 말하다가 내 눈과 마주친다. 그리고 내 눈빛에서 뭘 봤는지 갑자기 말을 바꿨다.

    "넌, 또 말을 그렇게 정 없게 하니,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아무튼 박쥐같은 녀석."

    "뭐? 박쥐? 너 말 다했어?"

    또 두 인간이 싸운다.

    물론 사람들은 말릴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나마 화실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거리니까.

    아무튼 그렇게 시끄러운 와중에 초인종소리가 울렸고, 밖으로 나간 성준희가 낑낑거리며 뭔가를 힘들게 들고 온다.

    그것을 본 내가 화실을 나가 그것을 받아들었다.

    일본에서 온 소포인데, 커다란 박스로 무게가 제법 나간다.

    내가 그것을 들고 화실로 들어와서는 테이블에 올려놨다. 그리고는 가위를 이용해 박스를 여는데, 이대봉이 궁금했는지 다가와 기웃거린다.

    "그거, 뭐야?"

    "아, 일러스트 책자."

    "일러스트 책자?"

    박스가 개봉되고 나자 안에 자그마한 크기의 얇은 책자가 잔뜩 들어있다.

    "이거, 삼사라 일러스트 책자야?"

    "어."

    "그런데 왜 이렇게 많아?"

    "다시 일본으로 보내야 돼."

    "다시? 왜?"

    "여기에 사인해서 다시 일본으로 보내 야하는 거야."

    "사인?"

    "어."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선희를 불렀다.

    "응."

    선희가 데생작업을 중단하고 다가와 테이블 앞에 앉았다.

    이미 선희도 미리 들었던 내용이라 자리에 앉자마자 박스에서 한권씩 가져다가 가져온 유성 펜으로 책자 속지에 사인을 하기 시작한다.

    익숙한 동작으로 기계처럼 그려나가는 모습.

    그동안 기술도 늘어서 꽤나 그럴듯한 멋진 사인이다.

    거기다 사인 옆에는 각종 캐릭터 그림까지 간단하게 그리기도 한다.

    그 모습을 보던 이대봉이 물었다.

    "이거 도대체 모두 몇 권이야?"

    "500권 좀 넘을 거야."

    "500권?"

    "어."

    어시들도 신기한지 어느새 모여들어 일러스트를 살펴본다.

    "아, 이거 전에 일본에 보낸 그거죠? 작은 선생님 연습장."

    "네."

    내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방금 말대로 지금 이 일러스트 책자는 선희의 연습장에 그려두었던 그림들 중에서 골라 만든 책자다.

    "와, 이렇게 책자로 멋있게 만드니까 정말 다르네."

    "그러게. 이거 몇 권은 저희들도 좀 주세요."

    "안 그래도 500권외에는 화실에 둘 테니까 필요하면 한권씩 가지세요."

    그 말에 어시들이 좋아한다.

    역시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이런 책자에 욕심이 많은 것이다.

    뭐, 어쨌거나 중요한 건 이걸 왜 만들었냐?

    사실 이유가 있다.

    조만간 삼사라 OVA가 완성되는데, 거기에 사용될 일러스트 책자다.

    책자에 대한 건, 지로가 낸 아이디어인데, OVA를 판매할 때 일종의 팬서비스로 들어갈 예정이다.

    목표 판매량은 대략 1만 카피 정도라서 그 정도 물량을 책자로 찍어 낼 예정인데, 그중 500권은 작가 친필 사인을 넣으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물어왔었다.

    별로 큰일도 아니라 당연히 OK한 것이다.

    우리 만화 최초의 애니메이션을 판매하는 일인데, 이 정도는 기본이지.

    물론 샘플로 보내온 OVA는 이미 봤다.

    대략 10분정도의 분량이었지만, 그것을 본 선희는 감동했는지 수십 번을 돌려 볼 정도였다.

    화실 식구들도 삼사라가 화면에서 높은 퀄리티의 그림으로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는 감탄했었고, 아무튼 그런 OVA 판매에 사용될 거라니, 당연히 선희도 적극적이었다.

    잠시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벌써 50권 이상 사인이 끝나있다.

    그런데 진짜 대단한 건 선희가 사인을 하면서 그리는 그림이 다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한 캐릭터를 여러 방향이나 다른 복장으로 그리는가하면, 중간 중간에 최근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아이템을 그려 넣기도 한다.

    확실히 그림에 관해서 만큼은 천부적인 아이다.

    "나도 한권 줄 거지?"

    이대봉이 웃으며 묻는다.

    그때 실버가 콧방귀를 뀐다.

    "소년점프로 갈 배신자에겐 못 줘."

    "누가 배신자야?"

    "너 말이야. 너."

    "진짜! 누가 소년점프로 간다고 하든?

    그리고 네가 뭔데 이걸 주니마니 하는 거야?!"

    "시끄럿, 배신자."

    "야!"

    ***

    새벽.

    어두운 길을 걸어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조용한 새벽의 도시 길을 걸어가면서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다.

    "야, 정말 아키하바라 한 곳에서만 사인 일러스트 책자를 준다는 거야?"

    "어, 일러스트 책자는 모두 주는 모양이지만, 사인한건 500권 한정."

    "오, 그나저나 써니의 미공개 일러스트라니, 그것만으로 너무 갖고 싶다."

    "그러게. 우리 같은 만화가 지망생들에겐 너무 유혹이 크다니까."

    "그래도 이렇게 새벽에 올 것까지 있었을까? 500권 정도라면 가게 여는 시간에 맞춰 와도 될 거 같은데."

    "헛소리하지 마. 학교 만화연구회 녀석들이 그러던데, 이번에 그거 노리는 녀석들 엄청나게 많다더라."

    "그래?"

    "그리고 말이지."

    남자 한명이 가방을 조심스럽게 열고는 그곳에서 파일하나를 꺼내더니 그곳에서 코팅된 그림 조각을 하나 꺼내 보여준다.

    "그게 뭐야?"

    "후훗, 이건 말이지. 바로 어제 내 친구에게 받은 거야."

    "어? 삼사라 일러스트 아니야?"

    "맞아. 내 친구 형이 미쯔다쇼텐 소속의 인쇄공장에서 일하는데, 거기서 불량품그림을 몇 장 가져다 준거야. 내가 만화 좋아한다는 걸 알고 혹시 몰라서 가져온건데. 운이 좋았지."

    친구들이 밝은 등 아래서 그림을 살펴보며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건 삼사라에서 안 나온 캐릭터네?"

    "뭐? 나도 보자. 어? 진짜네."

    "그러니까 이런 일러스트가 있다는지?"

    "그래. 거기다 500권에만 친필사인이 들어있다는 거고."

    "와, 왠지 두근두근한다."

    그렇게 떠들며 걸어가다, 목적지쯤에 도달했을 때 모두 깜짝 놀랐다.

    비디오테이프 판매점 앞에 길게 줄서 있는 사람들을 본 것이다.

    "어? 뭐야? 이 시간에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아?"

    "어어, 저쪽에도 사람들이 오고 있네?"

    "젠장, 달려!"

    이쪽에서 서둘러 달리기 시작하자, 먼 곳에 보이는 사람들도 곧장 가게 쪽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

    비디오의 판매는 성공적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첫날만 8천 카피 이상이 판매되어서 아마 3만 카피 정도는 무난하지 않을까하는 예상을 하는 모양이었다.

    처음 목표는 1만 카피가 넘는 거였고, 만약 2만 카피 넘을 경우 속편을 제작하겠다는 이야기도 들었었다.

    완성된 OVA는 괜찮은 수준이었다.

    며칠 후에 출시하게 될 '에어리어 88'에 비해서도 더 나은 수준으로 보이니까.

    화실에도 커다란 애니 포스터를 벽에 붙여두었다.

    예전에 처음 내 스토리로 만들어진 만화가 만화방에 붙어 있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더 뿌듯한 기분이다.

    "그런데, 준희 씨 왜 안 들어오지?"

    박상식이 중얼거리듯 말한다.

    그러고 보니, 아까 화실 대문 앞이 연탄 재 때문에 지저분해서 청소한다고 나갔는 데,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들어오질 않고 있다.

    "뭔 청소를 이렇게 길게 하는지……."

    내가 곧장 대문 밖으로 나갔다.

    나가자마자 성준희가 빗자루를 들고 서 있는 뒷모습이 보인다.

    곧바로 그쪽으로 다가가려는데, 누군가가 같이 서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머뭇거렸다.

    아는 사람인가?

    젊은 남자 같은데, 성준희의 뒷모습에 가려져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자리를 비켜줘야 하나?

    뭐, 이야기가 끝나면 들어오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돌아서는데 그때 남자의 얼굴이 얼핏 보인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역시 모르는 얼굴이라는 생각이 몸을 돌리려는데, 그가 날 보며 깜짝 놀라는 게 아닌가.

    "……어!"

    "……?"

    왜 저렇게 놀라는 거야?

    "그, 그럼 가볼 게."

    그렇게 말하더니 재빨리 몸을 돌리고는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뜬다.

    그 모습을 황당한 시선으로 보고 있는 데, 그때 성준희가 천천히 돌아 다가온다.

    "청소하다가 우연히 만난거야."

    누구냐고 묻기가 좀 뭐해서 그냥 멀뚱거리고 있는데 곧바로 성준희가 입을 열었다.

    "너도 알지? 예전에 네가 때려줬던, 걔. 내 옛날 남자친구."

    뭐? 쟤가 걔야?

    그럼 혹시 준모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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