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72화 (172/425)
  • 만화 엘리트 소녀 (6)

    실버가 놀라는 걸 보니, 내가 느낀 걸 똑같이 느낀 모양이다.

    하긴, 그림을 조금만 안다면 누구나가 느낄 수준이니 당연할 테지만.

    한참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그림을 살펴보던 실버가 곧 정신을 차렸는지, 표정관리를 한다. 그리고는 넌지시 스미레를 살피더니 손목에 붙어있는 파스를 보고는 건조한 음성으로 물었다.

    "연습을 많이 한 모양이군."

    "아, 아뇨. 많이 못했어요."

    "흐음. 어제 내가 시범을 보였던 펜선보다 더 나은 것 같네."

    "……네?"

    "크음."

    칭찬에 인색한 실버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수준의 칭찬이다.

    그 때문일까, 스미레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진다.

    "고, 고맙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해."

    "네. 알고 있어요."

    "알면 됐고."

    그렇게 말하더니 자신의 자리에 앉은 실버가 오늘 작업해야할 데생원고를 이리 저리 살핀다.

    그리고는 뭔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더니, 곧 입을 열었다.

    "좀 더 그려봐. 내가 작업 중간에라도 봐줄 테니까."

    "……네?"

    오, 이게 뭔 일이래? 평소의 실버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장족의 발전.

    "싫으면 관두던가."

    "아, 아니에요. 싫지 않아요. 봐주신다면 저로서는 감사할 뿐이에요."

    "그럼 계속 그려봐."

    "네!"

    스미레가 큰소리로 대답한다.

    그때 어시들이 화실로 한명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모두 아침부터 표정이 밝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역시 쉬는 날이 최고지.

    곧 토요일 일과가 시작되고 모두 원고 작업에 열중했다.

    스미레가 성준희를 도와 뒤처리를 하려 했지만, 내가 말렸다.

    "오늘을 그냥 연습에 집중해, 모처럼 봐주겠다는데."

    "고맙습니다."

    어시들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 건지 궁금해 하는 눈치다.

    하지만 실버가 별로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으니 나도 조용히 입 다무는 게 좋겠지. 괜히 가르쳐주겠다고 나섰는 데, 내가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작업을 시작한지 한 시간쯤 되었을 때 실버가 스미레를 부르고는 곧장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냥 아무렇게나 습관적으로 강약을 준다고 입체감이 생기는 게 아니야. 여기, 여기, 여기는 선이 약해서 배경에 묻힐 수 있잖아. 모르겠어?"

    "아, 죄송합니다."

    "죄송은 됐고, 이해를 하라고 이해를."

    "네."

    뭔가 어제보다 더 강한 어조로 다그치는 실버를 보며 모두가 움찔 놀랐다.

    평소 실버가 투덜거리고 거칠다는 건 알고 있지만, 가르칠 때의 모습은 좀 더 진중하며 무겁게 느껴진 탓이다.

    나도 별말 없이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지금의 실버 눈빛은 진지했으니까.

    그리고 스미레는 실버의 거친 말을 듣고 놀라기는 했지만, 눈물을 글썽이지는 않았다.

    스미레도 실버가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처음 봤을 땐 유약하게만 보였는데, 이럴 땐 또 강인한 모습도 가지고 있는 애네.

    아무튼 한참을 잔소리 듣고 나서 스미레가 다시 그림을 그린다.

    잠시 후 두 번째에도 실버의 거친 잔소리가 쏟아졌다.

    "아까 한 말을 절반도 이해를 못했구만. 넌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집중을 하라고, 집중, 뭐가 잘못 되었는지 쉬지 말고 계속 생각을 하란 말이야."

    "네."

    "말로만 대답하지 말고 머리로 이해를 하라고."

    "네."

    호통소리를 들으면서도 스미레는 꿋꿋하게 열심히 펜선을 연습해 나간다. 그 모습을 보던 어시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스미레와 실버를 번갈아 힐끔거린다.

    오후가 되자 모두 점심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쌍둥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화실로 들어왔다.

    박수미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식사해요."

    "네. 안 그래도 배가 무지 고팠는데."

    경희가 배를 손바닥으로 비비적거리더니 입맛을 다신다.

    서둘러 손을 씻고 온 쌍둥이들이 식탁에 앉았다. 그런데 자리에 앉은 선희가 맞은편에 있는 스미레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스미레가 생각에 잠긴 채로 입을 오물거리며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 때문이다.

    아무래도 실버가 오전 내내 말한 것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것을 알 리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아무튼 그렇게 점심식사를 끝내고 곧 모두 퇴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실버는 퇴근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서 원고를 하고 있다.

    "왜 퇴근 안 해?"

    내 말에 실버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머리를 책상에 박은 채로 입을 열었다.

    "오늘 해야 할 분량을 못 채웠으니까."

    "됐으니까, 일찍 퇴근해."

    "됐어."

    아마도 스미레를 가르치느라 평소보다.

    작업이 더뎠다는 것을 의식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실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가져와 봐."

    "네."

    모두가 퇴근한 이후에도 스미레의 그림을 계속 봐주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아직, 부족해. 다시 해봐."

    "네."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던 안절부절 못하던 경희가 내게 조용하게 다가왔다.

    "오빠가 실버오빠 좀 말려봐. 스미레가 너무 불쌍해."

    "놔둬."

    "뭐?"

    "스미레 표정을 봐, 본인이 저렇게 열심인데, 내가 말리면 되겠냐?"

    "……."

    "너도 그냥 가만히 있어. 불편하면 집에 가 있던가."

    그 말에 경희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저렇게 견디며 하는데, 나라도 곁에 있어줘야지. 선희 쟤 얼음공주라 도움이 안 돼."

    "……그러던가."

    내 말에 머리를 끄덕인 경희가 곧 비어 있는 책상에 가서 앉는다.

    그렇게 저녁시간이 될 때까지 스미레를 다그치던 실버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대충 된 거 같으니까 나 퇴근한다."

    그렇게 말하며 가방을 챙겨 화실을 나선다.

    어? 저 인간 갑자기 왜 저래?

    그러자 그런 실버의 뒷모습을 보며 스미레가 꾸벅 인사를 하며 큰소리로 말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

    하지만 아무런 대답 없이 실버는 화실을 나가버릴 뿐이다.

    그런데 실버에게 인사하던 스미레의 얼굴을 보니 피곤에 쩔어 있다.

    하긴 오늘 엄청 힘들긴 했을 테지.

    그러고 보니, 갑자기 실버가 나가버린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모르긴 해도 스미레의 모습이 안쓰러웠던 걸 테지.

    나름 배려랍시고 저렇게 뭔가에 쫓기듯 후다닥 화실을 나서는 실버의 뒷모습을 보니 갑자기 웃음이 나오려 한다.

    그런데 그때 경희가 내게 다가오더니 옆구리를 살짝 꼬집는다.

    "오빠는 진짜, 이 와중에 웃음이 나오니, 나와?"

    "아, 미안."

    시선을 돌려보니 스미레가 피곤한 얼굴로 의자에 축 늘어진다.

    보는 내가 다 피곤하네.

    난 일찌감치 화실을 나서며 경희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자, 이걸로 저녁 맛있는 거 먹고 오늘 일찍 자라고 해."

    그렇게 말하며 만 원짜리 몇 장을 몰래 찔러주자 경희가 히히거리며 웃더니 내게 척 경례를 한다.

    "충성!"

    *

    어느새 스미레가 화실에서 생활한지도 일주일이 되었다.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일주일간 스미레는 실버에게 배운 것과 내게서 콘티나 연출법에 대한 것을 어느 정도 배웠다.

    그리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일주일간 노력했다.

    스미레가 가방을 챙겨들고는 화실 식구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했다.

    특히 실버에겐 머리를 푹 숙인다.

    "……아직 부족한건 알고 있지?"

    그렇게 툭 던지는 말에도 스미레는 웃으며 머리를 끄덕인다.

    "네. 알고 있어요."

    "그럼 됐어. 앞으로 열심히 해. 재능은 쬐금 있는 것 같으니까."

    그 말에 스미레가 밝게 웃더니 다시 머리를 푹 숙였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진짜, 시끄럽구만."

    그렇게 스미레는 화실 어시들 모두와 인사를 나눈 뒤, 화실을 나섰다.

    나는 쌍둥이들과 함께 공항까지 배웅을 나갔다.

    공항에 도착하고 헤어질 시간이 되자 경희가 울상이 되었다.

    "다시 또 놀러 와야 돼. 알겠지."

    "응. 그래."

    "꼭 와야 해."

    "응."

    "정말이지?"

    "응. 약속."

    "약속."

    스미레와 지냈던 일주일의 시간동안 서로 정이 많이 쌓였던 탓인지, 경희가 참았던 눈물을 보인다. 선희도 눈이 살짝 촉촉해지는 듯 보인다.

    스미레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두 사람과 포옹을 했다.

    마지막으로 내게 인사를 하며 스미레가 떠나가자 쌍둥이들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어쩐지 나도 허전한 기분이네.

    아무튼 앞으로 열심히 해라.

    ***

    소년점프의 편집부,

    경력 3년차의 편집자인 쿠도가 바쁘게 원고의 식자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때 동료직원이 그에게 다가와서는 그 .

    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

    "쿠도, 쟤, 걔 아니야?"

    "네?"

    쿠도가 머리를 들어 직원이 가리킨 방향으로 돌아보더니 눈을 크게 뜬다.

    "어?"

    "전에 준입선 했던 그 애."

    "맞아요."

    "네가 담당이니까 어서 가보라고."

    "아, 네."

    쿠도가 하던 작업을 멈추고 자리를 대충 정리한 뒤 편집부 한쪽에 서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오랜만에 왔구나."

    여자애가 쿠도를 확인하고는 머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몇 달 전에 소년점프에서 주관하는 신인만화가 공모전에서 준입선을 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는 고토 스미레라는 여고생이다.

    고등학생이면서 만화적 센스가 뛰어나, 앞으로 장래가 유망하다며 편집부에서도 주목하는 아이였다.

    그런 그녀가 상을 수상한 뒤 한동안 연락이 없다가 오랜만에 찾아온 것이다.

    "응. 일단 저기로 가서 앉자."

    "네."

    한쪽 파티션으로 가려진 테이블 쪽으로 안내하고는 곧장 커피를 가져와 스미레에게 내밀었다.

    "아, 고맙습니다."

    "원고 가져온 거야?"

    "네."

    "납득할 만한 걸로?"

    그 말에 스미레가 얼굴을 붉힌다.

    공모전 준입선을 하고 난 뒤, 결과에 만족하지 못해 쿠도에게 "나 자신이 납득할만한 원고를 가지고 오겠어요!" 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린 것이다.

    몇 달 전의 일이긴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나 싶어 부끄럽기만 한 기억이다.

    "그때 일은……, 그냥 잊어주세요."

    "뭐?"

    쿠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웃는다.

    "하하, 그럼 아직 납득하지는 못한 거야?"

    "……."

    "알았어. 그럼, 일단 가져온 거나 보여 줘 봐. 이번엔 네임이야?"

    "아뇨. 완성한 원고예요."

    "오, 그래? 궁금한데."

    스미레가 조심스럽게 원고가 들어있는 종이봉투를 내밀자 쿠도가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는 곧장 원고를 꺼내 확인한다.

    그런데 원고를 보자마자 쿠도의 눈이 커진다.

    "……응?"

    분명 몇 달 전에 준입선을 했었고, 그때 원고를 몇 번이나 훑어봤기 때문에 스미레의 그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원고는 같은 사람이 그렸다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림 자체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데 전혀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펜선의 느낌이 완전히 바뀌었네."

    전의 그림이 기계처럼 정확한 펜선의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잔선을 사용하면서 많이 부드러워졌다. 그보다, 전체적인 입체감은 전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한눈에도 완성도가 크게 올라가 보인다.

    보통은 전체적인 걸 한번 가볍게 훑어보며 시작하는데, 펜선이 주는 느낌이 너무 강렬해 자신도 모르게 계속 첫 페이지에 시선이 머무르고만 있었다.

    곧 심호흡을 하고는 천천히 페이지를 넘겨갔다.

    전체적인 구도와 연출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있다.

    전에는 굉장히 화려한 그림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지금은 연출에도 강약을 주어서 보는 것이 굉장히 편하다.

    그 덕분인지 스토리에 집중하는 것도 수월해졌다.

    페이지를 넘겨가면서도 계속 감탄이 나온다.

    마치 현역만화가의 원고처럼 장면 구성이 노련하다.

    몇 개월 동안 이 소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단편으로서의 이야기는 조금 부족하지만 연출과 그림은 모두 만족스럽다. 아니 기성작가라 해도 단편에서 큰 임팩트를 주는 게 어렵다는 걸 생각해보면 엄청난 성과나 다름없다.

    "이거, 내가 위에 올려보고 싶은데, 어때?"

    "네?"

    "조만간 나올 특별호에 올릴 단편작 몇 편이 필요하거든. 거기에 도전해보려고. 괜찮지?"

    "네, 부탁드립니다."

    "좋아. 그럼 일단 올려보고, 통과가 되면 앞으로 기회가 늘어 날거야. 결과를 확신하긴 이르지만 일단 느낌은 너무 좋으니까."

    그 말에 스미레가 쿠도에게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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