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71화 (171/425)

만화 엘리트 소녀 (5)

내 말에 스미레가 깜짝 놀랐다. 그리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어쩌죠? 펜선과 어울리지 않으면 만화가로서 실격이잖아요."

"……실격?"

"네. 극화촌숙에서도 펜선의 기본은 중요하다고 늘 배워왔거든요."

"그래. 그 말은 맞아. 무엇이든 기본은 항상 중요한 거지. 하지만, 그 기본이라는 것도 여러 가지 스타일이 있는 거니까."

"……?"

배경이야 어시들에게 보통 맡기는 경우가 많지만, 인물 펜선까지는 작가가 직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나 신인인 경우엔 반드시 익혀야하는 중요한 스킬이다.

인물펜선까지 맡겨버리면 자신만의 그림이 없이 그저 스토리에만 질질 끌려 다니는 영혼 없는 만화로 전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직 눈알을 데굴거리는 걸 보니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네 그림에 맞는 펜선을 찾으면 되는 거야."

"제 그림에 맞는 펜선요?"

"어. 맞는 거."

내 말에 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제 스타일에 맞는 펜선이 따로 있다는 건가요?"

"그래. 그리고 그걸 찾아야지."

"……."

"물론 그 부분만큼은 전문가가 따로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

스미레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다음 날.

실버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뭐? 나더러 얘 펜선을 찾아주라고?"

"아니, 찾아주라는 게 아니라 찾는 걸 도와주라고."

"내가 그걸 왜?"

한국어로 떠들긴 했지만, 부정적인 반응이라는 사실을 알았는지 곁에 있던 스미레가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난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번엔 스미레에게 말했다.

"어제 내가 하라고 했던 데생을 완성했어?"

내 물음에 스미레가 실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네. 세, 세 페이지 그렸어요. 하지만……."

"야, 내가 하겠다고 대답도 안했잖아."

실버의 버럭 하는 말에도 난 꿋꿋하게 스미레에게 말했다.

"괜찮으니까, 일단 줘 봐."

"……."

실버 때문인지 주춤거릴 뿐 원고를 꺼내지 못하고 있다.

"괜찮다니까."

"에휴, 진짜."

실버의 투덜거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스미레에게 원고를 받고는 곧장 그것을 실버에게 내밀었다.

"자."

"누가 본데?"

저 덩치가 삐진 모습을 하고 있으니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표정관리를 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알았으니까, 한번 보기나 해줘."

"……."

"강요 안한다니까 그러네."

"……쳇."

못 이기는 척 실버가 원고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더니 원고를 넌지시 바라본다.

"……."

그런데 그 순간 실버의 표정이 미세한 변화가 있었다.

눈 끝이 살짝 떨리는 걸 보니 데생에 좀 놀란 모양이다.

눈빛이 곧 완전히 바뀌며 세장 모두를 천천히 살피기 시작한다.

실버가 선입견이 좀 심한편이긴 해도 좋은 그림을 부정할 정도로 간사한 인간은 아니니까.

"……이거 진짜로 쟤가 그린거야?"

하지만 여전히 뚱한 표정이다.

나름 이미지 관리라는 건가?

속으로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어."

"설마 선희가 도와준 건 아니지?"

"선희랑 스타일이 다르잖아. 보고도 몰라?"

"그야……, 그렇긴 한데."

"네가 무슨 수작질 한 거 아니야?"

"뭐라는 거야? 난 스토리 전문이잖아."

"헛소리는, 네가 그림에 대해서도 일가 견 있다는 건 여기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인데, 어디서 개소리 하고 있어."

"어째, 형은 표현을 해도 그렇게 저렴하냐? 아무튼 조금 조언 정도만 했을 뿐 쟤 진짜 실력이야."

저렴하다는 말이 재미있는지 주변에서 쿡쿡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실버가 돌아보자 모두 머리를 푹 숙이며 작업에만 열중한다.

이내 실버가 내 쪽으로 시선을 다시 돌린다.

표정이 잔뜩 찌푸려진 모습으로 정말이 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뭐, 쬐금 간섭하기는 했지만, 아니, 콘티, 구성에서 좀 많이 간섭하긴했지. 그래도 내가 직접 그리거나 한 건 아니니까.

아무튼 태연한 척 계속 바라봤더니 실버가 이번엔 스미레 쪽을 바라본다.

그 순간 스미레가 깜짝 놀라며 움찔거렸다.

"그렇게 쏘아 보지 마. 애가 놀라잖아."

"쏘아보긴 누가 쏘아봐? 그냥 좀 본 것 뿐인데."

"형은 그냥 본거지만, 다른 사람은 그 시선에서 살기를 느낀다고."

"내가 무슨 무협지속 무사냐?"

그렇게 투덜거리더니 곧 다시 데생원고를 보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는 곧장 입을 열었다.

물론 일본어로,

"징징거리면 집어치울 거니까 알아서해."

그 말에 스미레의 표정이 금세 밝아지더니 머리를 꾸벅 숙인다.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감사는, 됐고, 한 시간 정도면 원고 끝나니까, 그때까지 그 동안 완성할 수 있는 정도만큼만 펜선을 그려봐. 물론 데생은 따로 해서."

"네. 알겠습니다."

스미레가 나를 한번 힐끔하고는 곧바로 중앙에 있는 테이블로 가서 빈 종이위에 데생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보던 실버가 내 쪽을 보더니 쯧 하며 혀를 차고는 곧장 펜터치에 몰입한다.

대략적인 분위기를 파악한 어시들이 피식 웃는다.

실버가 저렇게 행동하는 건 순전히 어색해서라는 걸 아는 탓이다.

잠시 후,

실버가 펜선 작업을 마무리하고는 원고를 곧장 김기철에게 넘긴다. 그리고는 바로 스미레를 불렀다.

"아직, 안 끝난 거야?"

"아, 네. 지금 끝났어요."

"가져와 봐."

그 말에 스미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작업한 일러스트를 주섬주섬 챙겨 들고, 실버에게 다가갔다.

"저, 여기."

"음."

스미레가 내민 원고를 받아든 실버가 천천히 그림을 살펴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며 말한다.

"아까, 그렸던 데생원고도 줘봐."

"네? 아, 네."

스미레가 긴장한 얼굴로 서둘러 다시 테이블 쪽으로 가서 데생원고를 챙겨들고는 곧장 실버에게 내민다.

실버는 뭔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콧바람을 꽥꽥 거리더니 펜선 작업한 것과 연필데생 원고를 나란히 두고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에 잠긴다.

스미레는 그 앞에서 마치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며 서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은 그저 모른 척하며 자신들의 일에만 집중하고 있다.

나 역시도 이미 실버에게 맡긴 이상 참 견할 생각은 없다.

곧 실버가 입을 열었다.

"너무 깔끔하게만 그리려고 하는 게 문제군."

"……."

"두 번씩 사용해봐."

"……두 번씩이라니,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펜선을 한 번에 깔끔하게 그으려 하지 말고 겹선을 사용해서 그어 보라고, 이 한 컷만."

"아, 네."

순정만화에서도 제법 많이 사용되는 스타일의 펜선기법이니 금방 이해를 한 모양이다.

그리고 데생 원고를 이용해 두 개의 겹선으로 펜선을 입혀 그려본다.

한 컷이 완성되자 곧장 실버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살펴보던 실버가, 이번에 머리를 살짝 갸웃거린다. 뭔가 아직 못마땅하다는 표정이다.

"이번엔 세 번, 무슨 뜻인지는 알지?"

"네. 알겠습니다."

이전에도 테이블로 가서 한 컷을 완성시켜 다시 그것을 내밀었다.

그것을 본 실버가 아까보다는 조금 나은 표정이긴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이번엔, 똑같이 세 번, 하지만 세 번째 그을 땐 선의 강약을 좀 넣어봐."

"세 번째엔 강약…….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작업을 마치고 내밀자.

실버가 처음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스미레의 표정이 밝아졌다.

처음엔 잔뜩 긴장만 하고 있었는데, 얘도 뭔가 조금씩 감을 잡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때, 실버가 입을 열었다.

"잘 봐둬. 딱 한 컷만 내가 네 방식을 이용해 그려볼 테니까."

"아, 네. 부탁드립니다."

"……거참, 되게 시끄럽네."

"죄, 죄송해요."

스미레가 머리를 숙이는 모습을 보며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살짝 찌푸린 실버가 곧 자신의 펜을 꺼내 물통에 넣고 살짝 씻어낸 뒤 잉크병에 담근다.

그리고는 빈 종이에 몇 번 슥슥 그어보고는 곧장 연필 데생 위를 거침없이 그려 나간다.

스타일은 방금 스미레가 했던 방식과 똑같다.

하지만, 속도 숙련도에서 차이가 나는 만큼 움직임은 천지차이다.

속도는 선희에게 좀 밀릴지는 모르지만 숙련도만큼은 그야말로 달인 급이라고 할 만하다.

능숙한 실버의 펜선작업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스미레도 표정을 굳힌다. 아마 한 장면도 놓치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실버가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의 작업을 마무리 하고는 곧 펜촉을 물로 씻어 휴지로 닦아낸다. 그리고는 실버가 입을 열었다.

"이제 가 봐. 오늘은 이걸로 수업 끝이다."

"네, 감사합니다."

스미레가 머리를 다시 꾸벅 숙이고는 실버의 자리에서 원고를 챙겨들고 테이블로 가져간다. 그리고는 그것을 자신이 그렸던 펜선과 비교하며 새롭게 그려가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실버가 곧 시선을 거두고는 곧장 만화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원고 작업도 끝났으니 평소 취미인 만화책 읽기 삼매경에 빠진 것이다.

다음날 토요일 아침.

선희와 경희가 학교에 간 뒤 출근시간에 맞춰 화실로 찾아갔더니, 마루에선 엄마가 파를 다듬고 계신다.

아무래도 스미레 혼자 화실을 지키고 있는 게 신경 쓰이신 모양이다.

화실로 들어갔더니 실내가 깔끔하다.

"아침 일찍부터 청소하고 있더라. 괜찮다고 해도 저렇게 깔끔을 떠네. 어휴, 부지런도 하지."

화실로 들어갔더니 테이블에 앉아서 그림에 열중하던 스미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날 보며 밝은 표정으로 인사한다.

"오셨어요?"

"어. 잘 잤냐?"

"네."

그런데 어째 눈이 휑한 것 같다.

"어? 눈에 다크서클 아니야?"

"아니에요. 괜찮은데."

"잠은 잘 자야지. 몸살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저 건강해요."

그런데 손목을 보니 파스가 붙어있다.

"그거 뭐야? 손목 다쳤어?"

"아, 아뇨. 그게……."

"너 혹시 늦게까지 펜선 연습했어?"

"……네. 어떡하든 익히고 싶으니까요."

"야, 그러다 손목 못쓰게 되면 어쩌려고, 무작정 오래 긋는다고 느는 게 아니야."

"하지만……."

"이게 무슨 열혈 스포츠 만환줄 알아?"

"죄송해요."

스미레가 또 머리를 숙이며 미안해한다.

그 모습을 본 엄마가 끼어들었다.

"너는 왜 애를 그렇게 야단치니? 그러지 마라. 남의 나라에 와서 고생하는데."

말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상황을 보고 나름 판단하신 모양이다. 그나저나 일본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엄마가 스미레를 감싸고돌다니, 어지간히도 스미레가 마음에 들었나보다.

아니, 어쩌면 엄마 입장에선 그저 귀여운 딸 친구일 뿐이려나?

엄마한테 한 소리를 듣고 난 뒤 스미레에게 말했다.

"연습하던 거 한번 봐도 될까?"

"네"

자신이 그리고 있던 그림을 내게 보여준다.

밤사이 새로운 데생을 몇 장 작업한 모양인데, 거기다 펜선을 입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실버가 가르쳐준 펜선 방법대로 그렸을 줄 알았는데, 뭔가 좀 다르다.

……아니구나. 방법 자체는 동일하다.

펜선을 여러 번 입히는 그림은 맞는데, 뭔가 어제보다 느낌이 상당히 달라서 내가 착각을 한 모양이다.

어제 실버가 가르쳐 준 방식의 느낌도 나쁘지는 않았는데, 지금 보는 이 것도 나쁘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실버가 직접 시범을 보인 것보다 더 좋다고나 할까.

물론, 실버야 스미레의 방식을 단번에 표현한 것이니, 이것만으로 실버를 깎아내리는 건 바보짓이다.

이 아이는 같은 방식을 여러 번 연습한 것이고, 가장 이상적은 것을 나름 찾아낸 것이니까.

어쨌건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단하다는 사실이 바뀌는 건 아니다.

하룻밤 사이에 이런 펜선을 만들어 내다니.

얘도 진짜 물건이구나.

"……저, 어떠세요?"

"아. 이거? 펜선 정말……."

그때 실버가 엄마에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화실로 들어온다.

그 모습을 본 스미레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

"어?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일찍 올 수도 있는 거지 따지냐?"

"따지긴, 신기해서 그러지."

그 말에 쯧 하며 혀를 차더니 이내 내가 들고 있던 종이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곧장 다가와서는 내게 빼앗듯이 가져간다.

"살살 좀 합시다."

하지만 실버는 내 말은 들은 채도 하지 않은 채 곧장 그림을 확인한다. 그러더니 곧 눈이 크게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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