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엘리트 소녀 (4)
선희가 작업을 다시 멈추더니 몸을 반듯하게 만들고는 양팔을 이리저리 돌리며, 몸을 푼다.
그 모습을 보던 스미레가 선희에게 물었다.
"데생 마무리는 마저 하지 않는 거니?"
"오빠가 50분 이상 계속 작업하지 말래. 몸 나빠진다고, 그래서."
"……너희 오빠가 그런 것도 정해줘?"
"응."
선희가 머리를 끄덕이자 근처에서 책을 읽던 경희가 웃으며 말한다.
"그렇게 정해놓지 않으면 선희가 그림을 멈추지 않으니까."
"……."
스미레도 그건 잘 알고 있다.
그림을 그릴 때 빠져 든 상태라면 완성할 때까지 주변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한 채로 몰두하는 일은 흔하니까.
그러나 그것을 왜 강제로 끊는지는 이해하기 힘들다.
"나도 가끔 오랫동안 만화에 열중하긴 하는데, 하지만, 만화는 이런 극한의 작업을 견뎌내야 하는 일이야. 그런데 50분 단위로 작업을 멈추면 흐름이 끊어져서 방해가 되지 않을까?"
"머릿속에 계속 두고 있으면 상관없다고 했어."
"네 오빠가 그런 말을 한 거니?"
"응."
선희가 머리를 끄덕인다.
머릿속에 계속 두고 있다라.
스미레는 그 말의 뜻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말로는 쉬운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어렵진 않니."
"모르겠어. 그냥 작업 할 땐 늘 그런 상태야."
"……."
역시 선희는 자신과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역시 삼사라를 그리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깨닫는다.
새삼 놀랍다는 듯 선희를 바라보았다.
선희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맹한 눈빛으로 몸을 풀고 있다. 그런 선희가 갑자기 눈에 이채를 띤다.
"아, 백설기."
"백설기?"
선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거실로 뭔가 슬금슬금 들어오는 하얀 물체가 보인다.
털이 북슬북슬한 하얀 고양이.
도도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모습이 묘한 느낌을 준다.
그런 고양이가 스미레를 지나쳐 선희에게 다가간다. 그리고는 선희의 다리에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매달린다.
그런 고양이를 선희가 번쩍 안아 들었다.
선희의 품에서 느긋한 표정으로 눈을 감는 폼이 아주 익숙하게 보인다.
"고양이 예쁘다. 여기서 키우는 고양이야?"
"아니, 가끔 집에 찾아오는 친구."
"아. 떠돌이구나. 그래도 털 관리가 잘되었네. 정말 귀엽다."
"응."
스미레가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선희를 바라보고는 화제를 돌렸다.
"혹시, 그림에 대한 것도 오빠가 가르쳐 주니?"
"응. 콘티나 데생을 보면서 고쳐야 할 것을 매번 알려줘."
"혹시 오빠가 만화를 따로 공부하고 있어?"
"그건 몰라. 그냥 오빠는 다 알고 있어."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냥 다 알고 있다니..
스미레가 경희 쪽으로 돌아보았다.
그런 스미레의 생각을 이해했는지 경희가 웃으며 말했다.
"이상한 말인 건 아는데, 선희 말이 맞아. 그냥 오빠는 다 알고 있어, 제임스 오빠도, 키도 오빠도 다 우리 오빠는 천재라고 그랬어."
경희가 굉장히 뿌듯해하는 표정으로 말한다.
"그 제임스라는 사람도 중원요리왕의 스토리 작가라고 그랬지?"
"응. 맞아."
"응. 오빠는 만화에 대해선 다 알고 있어."
선희도 경희의 말을 거든다.
"대단한 오빠구나."
"그럼, 대단하지. 오빠가 아니었다면 예전의 그 단칸방에서 여전히 살고 있었을 걸?"
경희가 자랑스럽다는 듯 말하자 그 모습을 보며 스미레가 옅은 웃음을 지었다.
"나도 사실은 어제 네 아빠 말 듣고 좀 충격에 빠졌었어. 내 만화를 그렇게 자세하게 지적해 준 사람은 아빠 말고는 처음이었거든. 극화촌숙에서도 대부분 칭찬일색이었으니까. 그래서 곧장 여기서 일주일동안 지내게 해달라고 부탁한 거고."
"너도 참. 우리 오빠에게 야단맞으려고 부탁했다는 거니?"
"뭐, 그런 셈이지.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너도 참."
경희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번엔 선희가 그런 스미레를 보며 조용하게 말했다.
"나도 오빠에게 가끔씩 야단맞아."
선희의 말에 스미레가 깜짝 놀랐다.
"너도?"
"응."
상대는 삼사라의 작화를 담당하고 있는 베테랑이 아닌가.
일본에서도 작화가 최고 수준인 만화 중 하나인데 야단을 맞으며 그린다니.
누군가 이런 사실을 들었다면 거짓말이라고 할 테지.
"설마 그림이 부족해서 그런 거니?"
"아니, 너무 과하다고."
"과하다고?"
"응. 내가 그림에 너무 욕심 부리려고 하면 야단맞아."
그러고 보니 어제 자신이 지적당한 것도 비슷한 거였다.
그림은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했던 말.
뭔가 마음속을 들킨 것처럼 깜짝 놀랐던 부분이었다.
"화려한 그림을 자랑하려 하지 말래."
"아."
사실 스미레도 최근 삼사라가 연재 초기보다 그림이 많이 단순화가 되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초창기에 비해 그림을 보는 게 많이 편해졌고, 스토리에 더 집중이 쉬워졌다.
뭔가 사정을 알고 나니 선희의 오빠에 대한 궁금증이 더 늘어만 갔다.
솔직히 이런 사람들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더 놀라고 있다.
만화만 놓고 봐도 한국에 대한 소문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건 스미레도 잘 알고 있다.
불법으로 카피해서는 책으로 찍어 판매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고, 아무튼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도 일본에는 결코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어떻게 이런 만화가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
그동안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사실.
분명 이들은 외국생활을 해온 것도 아니다. 단순히 그림만이라면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 가족은 뭐랄까 특별하다.
그중에서도 이윤환과 이선희는 만화를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경희도 대단하긴 하지만 이들 사이에선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떤가?
어쩌면 그저 평범한 재능을 가진 일반인일 뿐일지도 모른다.
스미레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
그리고 한국에 오기 전을 상황을 떠올렸다.
아니, 정확히는 수학여행 때부터다.
원래계획대로라면 수학여행에서 빠지려고 했었다.
하지만 아빠는 수학여행도 중요한 경험이라며 빠지지 말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온 거였다.
자신은 졸업과 동시에 극화촌숙에서 더 공부를 한 뒤 곧장 만화가로 데뷔할 목적이었으니까.
이미 단편 몇 작품은 중견 잡지사에서 수상한 경험도 있다.
덕분에 가장 촉망받는 만화가 후보라며 잡지사 인터뷰도 몇 번 했었다.
극화촌숙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을 정도로 주목받고 살아왔다. 스미레는 그런 모든 것이 어릴 적부터 아주 자연스러웠다.
아빠는 늘 '넌 나와 달리 재능이 있는 아이다. 노력하면 일본 최고도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해 왔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수학여행 때 선희를 만나며 깨어지고 말았다.
한적한 야외 벤치에 앉아 그림을 그릴 때 다가온 여자아이.
그 아이가 바로 선희였다.
선희는 일본어로 '그림 너무 좋아. 잘 그려.'라고 말해줬다.
외국에서 일본어로 그런 얘기를 들어서 그냥 신기했을 뿐이다.
그렇게 곧장 헤어지려 했는데, 선희도 그림을 자신의 앞에서 그려보였다.
연필로 그린 그림이었지만, 결코 범상치 않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리고 충격을 받고 말았다.
자신의 재능이 무색해 보일정도로 재능이 넘치는 아이.
아주 짧은 만남이었지만, 선희는 스미레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런데 일본에 돌아온 뒤에도 그런 선희의 잔상이 계속 남아 있었다.
선희가 그린 그림을 몇 번이고 보면서 뭔가 확인을 좀 더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커졌다.
그래서 부모에게 그 얘기를 했고, 어렵게 허락을 받아낸 것이다.
그리고 와서 보니 자신의 생각을 한참 넘어서는 현실에 한 번 더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동안 자만해 왔던 자신이 부끄럽게만 여겨졌다.
그런 생각에 빠져있는데 선희가 과자를 씹으며 스미레에게 말했다.
"이제 네 그림 보여줘."
"어제 봤잖아."
"그리는 거."
선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스미레를 바라본다.
그 순간, 스미레는 선희가 순수하게 만화를 좋아하고 있는 아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곧장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럴까?"
"응."
***
전상길의 화실에서 나온 후 박상식과 헤어진 뒤 화실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마루로 들어왔더니 한동안 보이지 않던 백설기가 햇빛을 받으며 널브러져 있다.
배가 볼록한 모습을 보니, 뭔가를 잔뜩 잡수신 모양이다.
"팔자 좋은 녀석. 도대체 뭘 먹은 거야?"
대답해 줄 리가 없지.
혀를 한 번 찬 나는 곧장 화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선희와 스미레가 책상에 앉아 뭔가 열중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열중하는 걸 보니, 그림이라도 그리는 걸까?그런데 다가가서 보니 스미레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건 맞지만 선희도 그런 스미레의 그림을 그저 보고만 있을 뿐이다.
한 장짜리 일러스트.
중세느낌의 집시무희의 그림으로 보이 는데, 옷 무늬가 굉장히 화려하며 디테일하다.
옷에 새겨진 무늬를 하나하나 그려나가 는데 굉장히 섬세한 손놀림이다.
어제 원고로 봤던 만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일러스트다.
펜선으로 완성되었던 원고와는 다른 완성도다.
아마도 펜선의 아직 미숙해서였을까?
연필의 느낌이 상당히 좋아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연필의 능숙함만으로 본다면 선희를 더 능가한다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그때 부엌에서 들어오던 경희가 날 보고는 깜짝 놀랐다.
"어! 오빠, 언제 왔어?"
그제야 내가 다가온 사실을 알게 된 선희와 스미레가 머리를 들어올린다.
깜짝 놀란 스미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어요?"
"어. 그래. 그림 그리고 있었네."
"네. 선희가 보고 싶다고 해서."
"그래? 일단 그거 완성 하고나서 좀 봐도 될까?"
그 말에 스미레가 깜짝 놀라더니 곧 표정이 밝아진다.
"네."
그리고는 곧장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내가 곁에 있다는 것이 신경 쓰이는 모양인지 자꾸 날 힐끔거린다.
하는 수 없이 책상에서 떨어져 테이블앞에 앉았다.
그러자 경희가 테이블에 부침개가 층층이 쌓여있는 접시는 내려놓는다.
"오빠도 먹을 거지?"
"어? 아니. 난 괜찮아. 밖에서 밥 먹고 왔거든."
"에이, 밥 배 따로 있고, 간식 배 따로 있잖아."
"그건 너희들이나 그렇고."
그 말에 경희가 웃는다.
선희는 경희가 가져온 부침개에도 신경쓰지 않고 여전히 스미레에게 달라붙어 그녀가 그리는 그림을 바라보고만 있다.
남이 그리는 그림에 저렇게 열중하는 모습은 또 처음이네.
하긴, 그림이 놀랍기는 했으니.
잠시 후,
그림을 완성했는지 스미레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것을 들고 내게 다가와 내밀었다.
"저, 여기."
"응. 고마워."
그림을 받아 들고는 곧장 자세히 확인해 보았다.
어제 원고로 봤을 때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의 그림이다.
연필로 그린 쪽이 훨씬 더 매력이 넘친다.
"데생의 느낌이 확실히 좋구나."
"아, 그런가요?"
"그래. 이 정도라면 훨씬 어제보다 나은 만화원고로 만들 수 있을 텐데."
"……그럼 역시 펜선에 문제가 있는 건가요?"
"음, 펜선 자체는 나쁘지 않았어."
"그럼……?"
"문제는 네 그림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