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69화 (169/425)
  • 만화 엘리트 소녀 (3)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스미레가 밝은 표정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지금 한참 통화중이다.

    "네, 그럴게요. 네. 고마워요, 아빠."

    표정을 보니 허락을 받은 모양이다.

    전화를 끊고 나자 곧장 내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폐 끼치지 말고 몸 건강하게 지내다 돌아오래요. 감사하다는 말씀 대신 전해주고, 아참, 이거 잊어버렸는데요."

    가방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화과자다.

    "와, 화과자다! 이거 오랜만이네."

    경희가 제일 좋아한다.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 알았으면 좀 더 많이 가져올걸 그랬어요."

    "괜찮아. 이 정도면 돼. 그나저나 아버지가 정말 딸을 강하게 키우시려는 모양이네."

    보통은 예쁜 딸이 외국이 아니라 타지에 가는 것도 걱정하는 게 정상일 텐데.

    "별로 그런 건 아니에요."

    "아니라니, 지금만 봐도 일반적인 건 아닌데."

    "만화에 관해서만 그러세요.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말을 꺼냈을 때부터 만화에 관한 것만큼은 정말 엄하게 하세요. 재능이 없으면 지옥이라면서, 그리고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하세요."

    목숨이라니, 어째 살벌하네.

    하긴 본인이 직접 험한 만화가의 길을 걸어왔다면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아이는 살아오면서 이런 이야기를 아마 지겹게 들었겠지.

    특히나 이름 없는 만화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면 암울한 현실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알 테고, 그런데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팔부터 걷어붙인다.

    "그럼 뭐 하죠? 저. 청소 할까요?"

    얘는 뭐가 이렇게 급해?

    누가 보면 여기 가정부로 취직한 줄 알겠다.

    "자자, 일단 좀 진정하고, 스미레야."

    "응. 알았어."

    경희가 그렇게 말하고는 스미레의 가방을 든다.

    "가방은 내가 들게."

    "아니, 괜찮아. 그리고 날 따라와. 일주일 동안 지낼 방 보여줄 테니까."

    "고마워."

    스미레가 경희를 따라 간다.

    전에 실버가 사용하던 빈 방으로 안내를 했다.

    이불은 새것으로 가져다 놓았으니까 문제는 없을 거다.

    잠시 후.

    짐을 풀고 난 뒤 옷까지 갈아입고 화실로 나왔다.

    "오늘은 좀 쉬어.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괜찮아요. 저 지금 팔팔해요."

    양팔을 걷어붙이며 말하는 폼이 좀 귀엽네.

    "그럼 화실 구경이나 하면서 좀 쉬어."

    "네."

    그런데 대답도 달리 곧장 성준희를 도와 지우개질과 먹칠을 시작한다.

    정말 못 말리겠네.

    그나저나 굉장히 능숙한 손놀림이다.

    아마도 평소, 아버지의 일을 자주 돕는 모양인지 몸에 완전히 배어있다.

    저런 건 학원에서 배운다고 아는 게 아니거든.

    성준희가 어설픈 일본어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자 스미레가 한손을 내저으며 웃는다.

    "아니에요. 아직 부족해요."

    그렇게 작업하면서 화실 사람들의 뒤치다꺼리도 동시에 해나간다.

    만화라는 게 작업을 시작하면 주변이 지저분해지는 게 보통인데, 그것을 제대로 감지하고 정리를 하고 있다.

    펜촉을 닦아낸 휴지를 치운다거나, 바닥이 지우개가루를 청소하는 소소한 것까지 아주 잘해낸다.

    정말 아버지 화실에서 어시들과 생활을 많이 해본 게 틀림없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어시들의 작업을 힐끔거리기까지 한다.

    정말 부지런하네.

    그러다, 김기철이 붓으로 배경을 처리 해 나가는 모습을 보고는 신기해하며 바라보고 있다. 아마 처음 보는 방식의 작업법이라 그런 모양이겠지.

    그러다 실버의 펜선 작업을 보던 스미레가 그냥 얼어붙어 버렸다.

    "……."

    실버야 뭐 워낙에 압도적인 펜선을 사용하는 지라 만화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대단한지 바로 알 수 있을 정도긴 하다.

    만화책으로 볼 때랑 실제로 작업된 원고를 볼 때의 차이가 엄청나서 아마도 그 충격이 상당하겠지.

    그런데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걸로 놀란 모양이다.

    "혹시 이거 파시엔시아 아니에요?"

    아, 삼사라만 알고 있다가 파시엔시아까지 이곳에서 작업하는 걸 보고 놀란 거구나. 난 또, 그런데 놀란 정도가 좀 심했는지 스미레가 충격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표정이다.

    얜 오늘 온 종일 놀라기만 하는구나.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그때 펜선작업 중이던 실버가 스미레의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멈칫한다. 그리고는 머리를 들어 스미레 쪽을 바라본다. 그러자 스미레가 깜짝 놀라며 곧장 머리를 푹 숙였다.

    "바, 방해해서 죄송해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물러나자 근처에 있던 정미자가 가재미눈으로 실버를 바라본다.

    "왜, 애를 겁을 주고 그래요?"

    "……."

    곧장 실버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기야, 그저 평소의 모습을 뿐이니,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그래도 실버정도면 스미레 입장에선 좀 놀랄만한 비주얼이니까.

    *

    다음날 아침.

    오늘은 목요일이지만, 6월 6일 현충일이라 쉬는 날이다.

    평소라면 휴일엔 화실을 비워두는 경우가 많은데, 일주일간 스미레가 머물기로한 덕분에 경희랑 선희도 같이 이곳에서 지내고 있다.

    엄마랑 아침 일찍 화실로 찾아갔더니 애들이 벌써 일어나 아침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

    스미레가 엄마와 날 보며 꾸벅 인사를 한다.

    어제 피곤했을 텐데, 생생하네.

    역시 10대라 그런지 힘이 넘치나보다.

    "어머, 일찍들 일어났네. 그건 엄마가 할 테니까, 너희들은 그냥 쉬어. 모처럼 일본에서 친구도 왔는데. 그나저나 애가 참 예쁘네."

    엄마가 스미레를 칭찬하자, 자신에게 하는 말인 것을 눈치 채고는 어색하게 웃는다.

    "괜찮아. 벌써 밥 준비는 거의 다 끝났으니까. 그리고 스미레가 하는 반찬도 먹어보고 싶고, 엄마랑 오빠는 우리가 만든 거 그냥 잡수셔."

    "호호, 그럼 그럴까?"

    덜렁거리긴 해도 경희가 요리는 좀 잘하는 편이라 엄마도 모처럼 식사준비는 관두고 화실 밖을 청소한다.

    그런 엄마를 보며 내가 말렸다

    "아이고, 고 여사님. 청소는 안하셔도 돼요. 매일매일 얼마나 쓸고 닦는데."

    "괜찮아. 하나도 안 힘들어. 이 집에 들어오면 막 힘이 솟는 것 같으니까."

    "나 참."

    어차피 말려도 소용없는 일이기는 하다.

    집이랑 화실을 산 이후론 엄마는 늘 두집을 왔다 갔다 하며 청소하는 그 맛에 사신다니까. 사실, 청소를 할 때마다 이게 꿈인가 생신가 아직도 그러신다고 한다.

    "엄마! 오빠! 식사해요!"

    부엌에서 경희가 소리친다.

    처음 보는 반찬이 몇 개 끼어있다.

    엄마는 입맛에 맞다 며 좋아하시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괜히 눈치 없이 티를 낼 필요는 없겠지.

    아침 식사를 끝나고 나자 엄마는 집으로 돌아가고 선희는 원고작업을 시작했다.

    스미레도 곧장 걸레를 빨아 마루를 닦기 시작한다.

    그런 그녀를 내가 말렸다.

    "청소는 이미 했으니까, 됐어. 넌 일주일밖에 없는 시간을 청소나 하면서 보낼 생각이야?"

    "그래도……."

    "그냥 선희 곁에서 구경이나 해. 그것도 큰 공부가 될 거야."

    "그래도 돼요?"

    "그러려고 여기 지내는 거 아니었어?"

    "그야, 그렇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폐를 끼치면……."

    "친구 집에 지내는데 폐는 무슨, 그냥 일주일동안 하고 싶은 거나 해. 혹시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고, 어제처럼 원고작 업은 안 도와줘도 괜찮으니까."

    "네. 고맙습니다."

    부지런 한데다가 인사성도 참 좋다.

    아무튼 선희가 다음 주에 보내야 할 원고인 다크 프린세스 원고 데생을 하는 동안 곁에서 다소곳하게 앉아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단 한 장면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빛내면서.

    그러다 곧 표정이 경악으로 물든다.

    아마도 속도 때문이겠지.

    배경을 아무런 자료도 없이 그리는 건 둘째치고라도 마치 머릿속에서 막 뽑아내듯이 현란한 손놀림으로 데생을 그려나가고 있으니 저런 표정이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제 선희가 친구가 온 탓에 작업을 더 이상 하지 않았으니 데생작업을 못 봤겠구나.

    어쨌건 지금의 선희는 늘 보는 나도 신기할 정도니까.

    아무튼 작업 내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스미레의 동공에 지진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그렇게 몇 페이지를 쉬지 않고 그리던 선희가 잠시 작업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풀고는 부엌으로 가자, 스미레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어째 그리는 당사자보다 더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팔팔해 보이던 애 눈 밑이 거무죽죽하게 변해있다.

    작업을 보는 것만으로도 꽤나 많은 심력을 소모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경희가 서둘러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는 일본어로 반갑게 인사한다.

    "아, 키도 오빠."

    그 말에 축 늘어져있던 스미레가 다시 몸을 반듯이 세운다.

    눈을 크게 뜬 채로 경희 쪽을 보는데, 표정이 설마 하는 모습이다.

    "응. 맞아. 나도 이번 이야기에서 약간 개그를 넣어본 거야."

    "뭐? 이해가 안 돼?"

    "그건 키도 오빠의 개그 센스가 떨어져서 그런 거라니까."

    "네이, 네이."

    "거봐, 오빠네 어시들도 재밌다고 하잖아. 그런 걸 꼭 물어봐야 하나?"

    "응! 파이팅 하세요!"

    경희가 전화를 끊고는 평소처럼 천장을 향해 원투펀치를 날린다.

    "오케이! 이번 것도 통과!"

    며칠 전에 보낸 콘티에 대한 이야기였다.

    키도가 에피소드를 구상하면 그것을 선희에게 알려주고, 그것을 선희가 구체화해서 간단한 콘티방식으로 보낸다. 그러면 그것을 디테일한 콘티(네임)로 제작해 데생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선희의 경우엔 한 달 치 분량의 작업을 한꺼번에 하게 되고, 대략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 편이다.

    그러니까 선희의 경우 한 달 중 일주일정도만 진심의 남자 콘티를 작업하고 나머지는 학업에 열중하고 있다.

    요즘 진심의 남자가 성적이 꾸준하게 잘 나오는 데는 경희의 역할이 크다는 건 아마 키도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대사나 이야기 센스가 좋은 편이다. 다만, 알 수 없는 병맛 개그 덕분에 키도가 좀 어려움을 겪는 모양이지만, 뭐, 그래도 그게 반응이 나쁜 게 아니라서 보통은 사용한다고 한다.

    아무튼 경희가 전화를 끝내고 난 모습을 보던 스미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경희에게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다가가서는 어깨를 툭 친다.

    "어머, 깜짝이야! 너 얼굴이 왜 그래? 괜찮아?"

    "너 혹시 방금 전화한 사람………. 키도 죠타로?"

    "어? 너도 잘 아는구나? 맞아."

    그 말에 눈이 20% 정도 더 커진 스미레가 중얼거리듯 다시 물었다.

    "지, 진심의 남자를 그린 키도 죠타로라고?"

    "그래. 그런데 왜?"

    이번엔 입도 함께 벌어진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진심의 남자 스토리 쓰고 있니?"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참여정도, 아무래도 아직 많이 부족하거든. 나도 오빠처럼 되고 싶은데, 저 양반이 좀 잘나야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뒷머리를 벅벅 긁어댄다.

    "……그럼, 너도 현역……. 인거니?"

    "반쪽짜리긴 하지만, 뭐 그렇지."

    그 대답에 결국 스미레가 비틀거리며, 빈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어? 왜 그래?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니니? 나랑 같이 병원 갈래?"

    "아니, 난 괜찮아. 그냥. 너무 대단한 걸 연속으로 보니까……."

    그때, 부엌에서 선희가 접시에 누룽지 튀긴 걸 커다란 접시에 잔뜩 담아가지고 들어오다 그 모습을 보고는 놀란 표정으로 스미레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응. 괜찮아."

    스미레가 대충 상황을 설명해주자 그제야 선희가 안심한 표정이 된다. 그리고는 곧장 자신의 자리고 돌아간다.

    "나도 누룽지 먹고 싶은데."

    "싫어."

    "야, 좀 나눠줘라. 인심 참 야박하네."

    그렇게 쌍둥이들이 싸우는 모습을 스미레가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그때 박상식이 화실로 들어온다.

    "어 왔어?"

    "전 선생님 퇴원하시고 오늘부터 화실 출근하신데, 같이 가볼래?"

    "그래? 그럼 가 봐야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즘도 가끔 화실에 선희랑 가서 일 돕기도 하는데, 이젠 그것도 끝날 때가 되었나보다.

    "나, 전 선생님 화실에 다녀올 테니까 너희들끼리 있어라."

    "어, 다녀와."

    "다녀와."

    그렇게 말하고는 경희가 스미레에게 일본어로 대충 설명했는지 머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한다.

    곧장 가방을 챙겨 들고는 박상식과 함께 화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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