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65화 (165/425)
  • 해보자는 건가 (5)

    이른 아침.

    화실 대문 앞.

    “매번 죄송합니다.”

    “뭐, 괜찮아요. 어차피 우리도 버려야 하는 건데.”

    내 말에 옆집에서 찾아온 늙은 할머니 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우리화실에서 나온 각종 폐지를 들고나간다.

    할머니는 근처에 사시는 분인데, 한 달에 한번 꼴로 이렇게 찾아와 폐지를 가져가시는데, 내가 살던 시대처럼 소일거리로 하는 그런 종류의 일이 아니다.

    이 시대엔 그런 모습을 볼 수도 없고, 실은 폐지를 가져가는 목적은 손자, 손녀들 때문이라고 한다.

    듣기론 초등, 아니 국민학생인 손자, 손녀가 한두 달에 한 번씩 폐품수집이라는 걸 학교에서 한다는 모양이었다.

    국가차원에서는 물자절약이라는 목적에서 시행하는 일이고, 또 쓰레기를 줄이자는 명분도 있었지만, 아이를 키우는 집에선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일 년에 한 번도 아니고 정기적으로 폐품수집이 있으니, 집에 제대로 폐품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가게에서 빈병을 사다가 학교에 내야 하는 황당한 일도 있단다.

    아무튼 저 할머니도 작년에 우연히 알게 되신 분인데, 손자 둘의 폐품 때문에 걱정이 많다는 걸 알고는 필요한 날 오시라고 해서 이렇게 몇 달 전부터 한 달에 한번 꼴로 찾아오신다.

    “저거도 은근히 신경 쓰인다니까. 나도 너희들 폐품 구하려고 고생한 거 생각하면.”

    엄마도 예전 일을 떠올리시는지 혀를 차신다.

    오후가 되자 화실에 소포가 도착했다.

    일본에서 지로가 정기적으로 보내는 소포다.

    열어보니 소년매거진 최신 편과 각종 자료책자들이다.

    먼저 소년매거진을 살펴봤다.

    “……?”

    그런데 좀비 사무라이의 스토리가 내 예상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박상식에게 말했다.

    “콘티부분을 조금 수정해야겠는데?"

    박상식도 좀비 사무라이의 진행 상황을 내게 듣고는 곧장 머리를 끄덕인다.

    “그래야겠네. 삼사라도 계속 이런 식으로 전개하면 앙케이트에서 성적이 더 떨어질지도 모르고.”

    원래는 2-3주 이상 더 끌고 갈 예정이었다.

    왜냐하면 좀비 사무라이의 이야기 흐름상으로도 그게 맞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가 던진 미끼에 너무 빨리 반응해버렸다.

    이야기가 너무 급하게 진행된 것이다.

    신인작가라서 그런지, 아니면 담당의 성격이 급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우리로서는 쓸데없이 시간을 끌어야 할 이유가 없어졌으니, 그건 반가운 일이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정리하고 단번에 이야기를 진행시켜야겠다.”

    “오, 나도 그건 바라는 바야. 안 그래도 콘티 짜면서 엄청 답답했는데.”

    그때 어시들도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도, 요즘 삼사라가 너무 늘어지는 것 같아서 마음이 답답했어요.”

    “맞아요. 힘들게 차지한 1위를 내줬다는 소식 듣고 얼마나 분했는데, 마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뺏긴 기분 같았어요.”

    “다른 건 몰라도 일본에게 지는 건, 저도 싫어요.”

    일본과 경쟁에서 지기 싫어하는 건 내가 살던 시대나 이때나 다를 바가 없네.

    작년에 축구 한일전을 1대2로 져서 그 한이 아직 남은건가?

    어쨌거나 상대가 미끼를 물고 이미 이야기를 앞서간 이상 제대로 시작해야 할 시점이다.

    일단 먼저 3주간 계획되었던 콘티를 다시 수정하기로 했다.

    사실은 쉽게 걸려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몇 개의 함정을 더 파두고 있었는데, 이렇게 급하게 진행된 이상 굳이 진행시킬 필요는 없겠지.

    콘티 수정을 다시 하는 바람에 많은 시간이 허비된 것도 있지만, 반대로 얻은 것도 많다.

    이야기를 좀 더 깊이 판 덕분에 이야기를 더 확장시킬 수 있게 되었고, 더불어 선희까지 끼어들어 이야기가 더 재밌어졌다.

    아무튼 처음엔 단순히 좀비 사무라이를 골탕 먹이자는 생각에 시작한 작업인긴한데, 지금은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야기가 더 재미있어진 것 같다.

    물론 요 몇 주간 지루한 구간이 있었지만, 골이 깊으면 산이 그만큼 높아지는 거지.

    늦은 오후가 되자 박상식의 콘티도 대략 마무리 되었다.

    선희에게 넘길 땐 대사 빼고는 간략하게 넘기는 편이라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은 아니다.

    “다녀왔습니다.”

    “어서와.”

    선희가 학교수업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새롭게 완성된 콘티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거 재밌어.”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

    최근엔 선희의 의견을 많이 수용하고 있는 편이라 이야기가 좀 더 복잡해 졌다.

    그 때문에 이야기가 한번 어그러지면 수습하기가 어렵다.

    물론 그만큼 디테일하고 흥미롭다는 뜻도 된다.

    하지만 되도록 이야기는 단순하게 풀어가려고 한다.

    어쨌건 라이트 한 독자들이 더 많으니까.

    물론 쉽게 풀어가는 일은 내 몫인 거고, 그런데 그때 오랜만에 이대봉이 찾아왔다.

    요즘엔 스텔라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는 재미로 사는지 전화가 올 때마다 지역이 달랐다.

    어젠 대구에 있는 유명한 중국집이라더니.

    그런데 이 인간 피부가 많이 검게 변해 있네?

    “모두 잘들 지냈어?"

    까맣게 변한 이대봉을 본 어시들이 입을 열었다.

    “아직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 피부 탄 거 봐. 어디 바닷가라도 갔다 온 거야?”

    “고급 승용차도 샀겠다. 이참에 팔도유랑이라도 다니는 모양이지.”

    “바다 근처에도 유명한 곳이 많더라고. 그리고 간 김에 바닷물에 뛰어들려고 했는데, 아직 그 정도는 아니더라고, 그래도 친구 많이 사귀었지.”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긁적이고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그때 머리를 처박은 체 작업에 열중하던 실버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뭐, 보나마나 여자들이겠군.”

    “어? 어떻게 알았어?”

    그 말에 이번엔 박상식이 끼어들었다.

    “그걸 왜 몰라? 형은 남자보다 여자들 이랑 더 쉽게 친해지잖아.”

    그 말에 이대봉이 뒷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하하, 그런가? 하긴, 여자들이랑 성격이 더 맞긴 하니까.”

    “성격이 맞는다고 그게 쉽게 되냐? 얼굴이 제비족 같으니까 그런 거지.”

    “야, 그래도 제비족은 너무했다. 나처럼 착하고 성실한 사람을."

    “제비족도 성실하고 착한 사람 많아.”

    박상식은 뭐가 분한지 씩씩거리며 말하고 있다.

    쯧, 그래 저 인간 마음은 내가 잘 알지.

    불쌍한 박상식.

    아직 누나에게 제대로 말도 못하고 있으니.

    하지만, 잘난 이대봉이 무슨 죄야?

    그런데 이런 대화보다는 뭔가 중요한 일이 있는지 이대봉이 손바닥을 짝 치며 말했다.

    “아, 맞다. 오늘 시내에 유명 중학교 운동장에서 화형식 준비하고 있더라. 아줌마, 아저씨들 잔뜩 모여 있더라고."

    그러고 보니 벌써 5월이구나.

    이거 뭐, 매년 5월만 되면 만화책들이 화형을 당하고 있으니.

    매번 뭐가 그렇게 불만들인지, 모였다 하면 분노의 일장 연설과 함께 그 난리법석을 떤다.

    마치, 만화책을 태우면 아이들이 갑자기 다 똑똑해지거나,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하기라도 할 것처럼.

    솔직히 이런 게 아니더라도 지금 시대, 의 만화는 참 어려운 시기다.

    이 시대엔 만화 검열제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냥 말이 좋아 검열제지 만화 탄압이나 다름없었다.

    듣기론, 둘리도 만약 인간의 아이였다.

    면 심의에 걸렸을 거라고 한다. 아이가 어른에게 반말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고.

    그러니까 짱구 같은 만화는 애초에 지금의 한국에선 연재가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뭐, 일본도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PTA(Parent Teacher Association)이라는 학부모, 교사들의 단체가 있기는 하다.

    이들 역시 일본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으며 80년대인 지금도 만화가들과 수없이 충돌을 일으키고는 있다. 하지만 6-70년대에 비해서 활약이 좀 덜 하다는 것뿐이지만,

    “나 거기서 무슨 미스코리아처럼 대각선 띠 두른 아줌마, 아저씨들이랑 막 싸우고 왔지.”

    이대봉이 흥분한 음성으로 씩씩거리며 말했다.

    “오, 용케 맞아죽지 않고 돌아왔네?"

    “뭐, 멀리 떨어진 곳에서 큰 소리로 말하다가 막 몰려오길래 도망쳤지. 내가 그래도 달리기는 빠르잖냐.”

    그 말에 박상식과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아, 뭔가 폼이 안 나는 그림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다.”

    “나도.”

    뭔가 자신이 생각해도 쑥스러운지 이대 봉이 이번엔 화제를 돌린다.

    “어때. 미끼는 잘 물었어? 그 좀비 사무라이라는 만화.”

    이대봉의 말에 깜짝 놀랐다.

    “어?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야, 그 정도는 한번 보면 알지.”

    깜빡했다.

    이 인간 이래 허술하게 보여도 스토리에 대해선 천재였지.

    내가 이대봉에게 책을 내밀었다.

    “이거, 이번 소년매거진.”

    내가 내민 소년매거진을 펼쳐본다. 이젠 일본어도 상당히 늘었는지 제법 술술 읽어간다.

    그리고 다 읽고 난 뒤 책을 덮으며 씨익 웃었다.

    “제대로 걸렸네. 이 녀석 맘이 급했구다.”

    확실히 좀비 사무라이를 읽자마자 상황을 지금 현재의 상황을 정확히 짚어낸다.

    그래서 이번엔 박상식이 방금 완성한 콘티노트를 내밀었다.

    “아까 완성한 거야.”

    “이거 콘티야?”

    “어.”

    “오, 그래?”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박상식이 완성한 콘티를 읽어간다. 그리고는 크게 곧장 크게 웃었다.

    “와하하하하. 너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려고 그랬구나. 하긴, 이 정도라면 거창하게 미끼를 만들 충분한 이유가 되긴 하지. 그나저나, 생각이상의 반전인데? 거기다 좀비 사무라이 쪽은 이거 수습하기 힘들 텐데, 임팩트스톤만 아니면 그냥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도 무리가 없긴 한데 말이지. 너도 참 고약하다. 어쩌자고 그런 사악한 아이템을 만들어서는……."

    이대봉이 혀를 찬다.

    사실, 임팩트스톤은 삼사라에서 가장 중요한 삼신기 중 하나다.

    이것을 얻고 난 이후엔 단순히 하루를 리셋 하는 방식으론 다시 얻을 수 없고, 이게 없으면 다음 단계에 넘어갈 수가 없다.

    이 설정은 이름만 다를 뿐, 이미 좀비사무라이에서도 나온 부분이다.

    그러니까, 만약 그대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설정을 여러 군데 고치거나, 아니면 그냥 무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튼 새로운 이야기 방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대봉이 한참을 웃었다.

    ***

    “삼사라 이번 편 충격인데요? 30페이지짜리 특별판으로 나와서 뭔가 했더니, 이런 반전이…….”

    소년 히어로의 편집부 내에선 이번에 나온 삼사라 때문에 시끌벅적했다.

    “누가 아니래? 그동안 지지부진한 내용 전개로 불만엽서가 제법 날아왔는데, 이런 내용을 숨겨놓고 있었네.”

    “저도 이번 거 보고 소름이 쫙 돋던데요? 이야기가 너무 재밌어서 30페이지 임에도 평소 20페이지 때보다 더 짧게 느껴졌다니까요.”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좀비 사무라이는 어떻게 되는 거지?"

    “어? 그러네.”

    “뭐, 그건 그거대로 이야기가 잘 흘러가고 있는 거 아닌가요?”

    “아니야. 처음엔 괜찮아 보였는데, 뭔가 조금씩 이야기가 어그러지고 있다는 느낌이야.”

    “저도 그렇게 느꼈는데.”

    그 때 직원 한명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갑자기 왜 그래?”

    “이거, 설마 써니 선생님이 노린 거예요?”

    “노리다니, 뭘?"

    “좀비 사무라이 그거 타깃으로 삼아서 일부러 이렇게 이야기를 전개한 거 아닌 가해서요.”

    “뭐?”

    직원들의 대화가 잠시 끊어졌다. 그리고 모두 경악한 얼굴이 되었다.

    “뭐야, 그러고 보니!”

    “이거 진짜면 정말 소름인데?!"

    “와, 무섭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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