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60화 (160/425)
  • 만렙 도우미 (2)

    "아, 죄송합니다."

    선희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가 엉거주춤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벌써 학교 끝난 거야?"

    내 말에 선희가 머리를 끄덕인다.

    그 말을 들었는지 주변에 있던 문하생들이 수군거렸다.

    "학생 맞나보네. 그런데 선생님?"

    "그러게. 보기엔 중학생, 끽해야 고등학교 1학년 같은데. 정말로 만화가라고?"

    "양구 씨가 그렇다고 하잖아. 양구 씨만화가한테는 깍듯하잖아."

    "와, 그나저나 대단하네. 저 나이에 만화가라니."

    "뭐, 운 좋게 보물성이나 어깨동문 같은 데서 단편 하나 실렸겠지."

    "그래도 대단한건 대단한 거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야, 쉿."

    내가 그들을 돌아보자 시선을 피하며 하던 작업에 열중한다.

    적당히 좀 할 것이지, 사람을 앞에 두고 저렇게 수군거리니까 영 거슬리네.

    들리게 떠들지나 말던가.

    잠시 사람들을 바라보다 곧 선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늘 컨디션은 괜찮냐?"

    "응."

    "무리는 하지 마. 알겠지?"

    "응."

    선희가 머리를 끄덕이자 곧장 추양구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가 곧장 콘티와 데생샘플용 설정스케치, 그리고 종이와 사각 테두리가 그려진 8절지 종이를 내민다. 그리고는 곧장 선희가 앉아 작업할 만한 빈자리를 알려준다.

    "야간에 작업하는 애 자린데, 거기서 작업하시면 될 겁니다."

    추양구의 설명을 들은 선희가 곧장 그곳에 앉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방에서 연필 몇 자루를 꺼냈다. 늘 쓰는 연필은 손에 맞아서 항상 가지고 다닌다. 그것을 화실 연필깎이로 깎은 뒤 먼저 샘플 설정집을 눈으로 외운다.

    잠시 후 연재용 원고 몇 장을 살펴보며 그림 스타일을 살펴보고는 다시 연습장에 그림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머리를 몇 번 갸웃거리다 이번엔 추양구의 자리로 다가갔다.

    추양구가 그리는 모습을 노골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자 사람들이 그런 선희를 힐끔거린다.

    하지만, 추양구가 별말 없이 데생에만 열중하자 아무도 별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저 중간에 '예의 없는 거 아냐?' 라는 불만 섞인 소리가 슬쩍 귀에 들어오긴 했다.

    뭐, 저들 입장에선 그렇게 보여도 할 수 없는 거지만, 그런 주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선희는 별 표정변화 없이 그저 추양구의 그림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추양구의 데생능력에 놀라서 저런 표정이 된 것처럼 보이겠지.

    그럼에도 한동안 별말 없이 추양구의 그림을 보다가 곧 몸을 돌려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연필을 몇 번 이 방향 저 방향으로 쥐어보고 있다.

    새로운 장소가 아직은 좀 불편한 모양이다.

    그래도 곧 다시 적응을 했는지 다시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잠시 동안 데생에 열중하던 추양구가 작업을 멈추었다. 그리고 선희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이번엔 그가 선희의 데생을 잠시 내려다본다. 그러다가 몇 장면을 지적하더니 그 부분을 살짝 고쳐준다.

    그러자 선희가 틀린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머리를 끄덕이며 다시 데생을 시작한다.

    그렇게 몇 분 동안 선희의 작업을 쳐다보던 추양구가 곧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다시 중얼거렸다.

    "어? 저게 끝이야?"

    "양구 씨. 오늘 컨디션이 별론가? 보통 때 같으면 잔소리 엄청 할 텐데."

    "역시 만화가라서 그런 거 아닐까요? 아니면 어려서?"

    "양구 씨가 어리다고 봐줄 사람이야? 여자, 남자 그런 거 저 사람에게는 안 통해. 오죽하면 3명 들어오면 2명이 나가겠어? 얼마나 깐깐한데."

    "그럼, 우리랑 상관없는 그림이 아닐까요?"

    "그렇겠지. 다른 화실에서 데생맨 데려와도 적응에만 최소 2개월 이상은 걸릴테니까."

    "그렇다면 오늘은 그냥 데생 연습인가 보네요."

    "아마도 그렇지 않겠어?"

    "그나저나 화실에 일손이 부족하니까 저런 애들 손까지 빌려야 하는군요."

    "그러게."

    그렇게 한동안 수군거리더니, 잠시 후 곧 흥미를 잃었는지 모두 작업에만 집중 한다.

    그런데 한참 작업에 열중하던 선희가 자리에서 추양구에게 다가가 뭔가를 이야기한다. 그러자 추양구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선희의 자리로 다가가서는 데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

    추양구가 놀란 눈으로 데생원고를 천천히 넘겨보더니 머리를 긁적이고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한 사람의 표정이다.

    뭐, 선희가 제대로 작업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으니, 저렇게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아무튼 놀란 추양구가 다시 자신의 자리로 가서는 네모 칸만 연필로 그려진 종이를 다시 챙겨 선희에게 넘겨주었다.

    그러자 그것을 받은 선희가 다시 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려나간다.

    나는 박상식의 스토리 수정을 좀 도와 준 뒤 자리에서 일어나 선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이미 작업이 끝난 데생원고를 살펴보았다.

    음…….

    전상길의 그림과 완벽하게 같다고 하기엔 좀 그렇긴 하지만, 특징을 잘 살려서 비슷하게 보이기는 한다. 물론, 일반 대본소 독자들의 눈에는 비슷할 테니 문제는 없겠지만, 그리고 솔직히 이 시대 대본소 만화의 경우 데생을 여럿이서 하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전상길도 그런 그림을 그려왔으니 결국은 문제가 없다는 거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추양구도 별말이 없었던 거고, 아니, 애초에 이만큼 그림을 흉내 내서 그렸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긴 하겠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란 건 속도 때문있었을 거다.

    대본소용 만화의 퀄리티야 뻔 한 거고, 거기다 그림이 큼직큼직한데다가 배경이라고 할 것도 별로 없으니, 선희에게야 그냥 연습장에 그리는 그림만도 못했을 테니까.

    아마 두 시간 정도면 100페이지 정도는 혼자 해결해 버릴지도 모른다.

    데포르메의 실력이 극에 달한 스타일로 그려대니 그야말로 프린터로 그림이 뽑혀 나오는 것 같으니까.

    그때 뒤처리를 담당하던 어려보이는 여자 문하생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우리에게 다가왔다.

    "커피 드릴까요?"

    "전 됐어요."

    "전 한잔 주세요."

    박상식이 그렇게 말하자 주변에서 손을 번쩍 들며 "나도"를 외친다.

    하지만 그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 곧장 커피가 있는 곳으로 가서는 커피를 타온다.

    "고마워요."

    "뭘요."

    그렇게 말하며 수줍게 웃어 보인다.

    어?

    이 여자, 박상식에게 눈웃음을 치네?

    뭔가 묘한 느낌인데, 정작 박상식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여기선 그래도 제법 차도남의 느낌도 발산하고 있었구만.

    잠시 묘한 눈길로 박상식을 바라보던 여자가 쟁반을 가져다 놓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선희 곁을 지나가다 걸음을 멈추었다.

    "……?"

    선희가 빠르게 그림을 그려나가는 모습을 지나가면서 힐끔거리더니 금방 눈을 크게 번쩍 뜬다.

    "어머나!"

    여자가 깜짝 놀라 소리치자 주변사라들의 시선이 일시에 몰려들었다. 그리자 당황한 여자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후다닥 쟁반을 가져다 놓고는 곧장 자신의 자리로 간다.

    곁에 있던 여자 한명이 그런 그녀를 쳐다보자 여자가 작은 소리로 수군거렸다.

    그러자 호기심이 동안 여자가 자시에서 조용히 일어나더니 주변의 눈치를 보며 슬쩍 선희의 자리로 다가간다.

    그리고 그녀 역시 아까 여자랑 똑같이 얼빠진 표정이 되어 선회의 데생을 바라본다.

    그러자 이번에 다른 사람들이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다가간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자 어느 샌가 선희 주변엔 다섯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럼에도 선희는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그림만 그리고 있다.

    시간을 보니 선희가 온지도 두 시간 가까이 되어가고 있다.

    "이젠 가봐야겠어."

    "아, 그럴래? 오늘 도움 많이 됐다. 덕분에 스토리도 깔끔해지고 시간도 많이 아꼈어."

    "그럼 다행이고."

    그때 선희도 작업을 멈추고는 숙였던 머리를 바짝 세운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엄마야!"

    "엇!"

    그런 모습에도 선희는 별다른 반응 없이 나를 본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겨들자, 선희도 서둘러 그리던 원고를 멈추고는 자리를 정리해 일어난다.

    그 모습을 본 추양구도 원고작업을 멈추고는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늘 두 분 수고하셨습니다."

    "뭘요."

    "이거 미리 준비해둔 돈인데……. 일단 이거라도 받으세요."

    그렇게 말하며 나와 선희에게 봉투 하나씩 나눠준다.

    "미리 챙겨놓은 돈이긴 한데, 모자라겠군요. 나머지는 다음에 드리겠습니다."

    "뭐, 몇 번 더 올 건데요. 뭐, 천천히 주셔도 됩니다."

    사실, 돈이야 아무래도 좋다.

    이젠 이런 돈에 신경 쓸 정도는 아니니까하지만, 그렇다고 공짜로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추양구의 표정이 밝아진다.

    "그래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뇨, 저희도 전에 일본 원고 도움 받았던 일도 있으니까. 뭐, 이럴 땐 서로 돕고 사는 거죠."

    내 말에 추양구가 회미한 미소를 짓는다.

    그때 사람들은 선희가 있던 자리의 데생을 보며 수군거리고 있다.

    "와, 이거 장난 아니다. 양구 씨보다 더 잘 그리는 것 같은데요?"

    "에이, 그건 아니지. 그래도 시원시원한건 양구 형이 훨 낫지."

    "그래도 그린 양을 봐요. 이 정도면 양구씨 이틀분 정도 될 것 같은데."

    "이들……분까지는 아니지만 하루 반 정도는 될 것 같네."

    "어쨌건 엄청난 속도인건 맞잖아요."

    "그야……."

    "오늘 얼마나 그렸어?"

    "두 시간쯤 됐나?"

    "미리 그려온 거 아닌가?"

    "아닌 것 같던데요?"

    "……."

    "……."

    사람들이 혼란에 빠진 모양이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속도의 데생을 보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은 추양구와 박상식에게 인사를 하며 나가는 우리를 바라본다. 아니, 정확하겐 선희에 시선이 확 꽂혀있다.

    "그럼 수고하세요."

    "안녕히 가십시오."

    "먼저 가. 난 조금 더 있다가 갈게."

    "어. 그래."

    선희가 인사를 꾸벅하고 나가자, 뒤 쪽에 있던 사람들까지 자동으로 머리를 숙인다.

    우리고 문을 열고나서는 그때까지도 그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화실을 나서며 큰 도로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동안 내가 선희에게 물었다.

    "어때? 다른 사람의 원고를 하는 기분이."

    "좋아. 뭔가 기분전환이 되는 것 같아."

    "기분전환?"

    "응."

    저 많은 데생원고가 기분전환이라니.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으며 걸어가는데 초록색 포니 택시가 보인다.

    곧바로 그것을 잡아타고 우리 동네까지갔다.

    택시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데 주변이 어둡다.

    가로등도 별로 없는 동네라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건 도시도 마찬가지다.

    큰 시내가 아니면 대부분 가로등이 듬성듬성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때 어둠속에서 남녀가 우리와 스쳐지나갔다. 그런데 남자의 얼굴이 낯이 익다.

    "어?"

    상대편이 먼저 머리를 돌리고 날 아는 체 했다.

    "또 보네?"

    "어. 그래."

    바로 성준희의 사촌오빠인 박유찬이었다. 아, 그럼 여자는 우리 동네에 산다는 여자 친구인 모양이군. 이름이 정숙이라고 했던가?

    "아, 전에 봤던 쌍둥이 여동생. 그런데 어떤 쪽인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말하자 선희가 머리를 꾸벅하며, 인사한다.

    그리고는 작게 한마디 했다.

    "언니 쪽요."

    "아. 언니 쪽이구나. 못 알아봐서 미안."

    그렇게 말하더니 곧장 나와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는 다시 멀어진다.

    그런데 곁에 있던 여자가 박유찬에게 묻는다.

    "누구야?"

    "아, 내 처남 될 친구. 엄청 성공한 부자라고."

    "콜록, 콜록."

    순간 기침을 심하게 하자 선희가 날 묘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야, 그런 거 아니야."

    "아무 말 안했어."

    "……."

    젠장, 저 인간은 왜 헛소리를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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