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도우미 (1)
"왜? 할 말 있어?"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성준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내가 시선을 거두자 성준희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더니 다시 톤작업에 열중한다.
엊그제 박유찬에게 들었던 말이 문득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바라본 모양이다.
뭐, 각자 나름의 사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건데, 내가 뭐 어떻게 할 것도 아니고.
거기다 지금은 행복해 보이는데 굳이 쓸데없는 말을 할 필요는 없겠지.
그동안 알게 모르게 신경 쓰고 있던 문제도 어느 정도 알게 되기도 했고,
그보다……, 과거로 온 뒤, 언제부턴가 만화 쪽에만 신경쓰다보니,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처음엔 가족, 그리고 친분을 가졌던 사람들과의 관계에 신경을 쓰는데 몰두했었는데,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실버 쪽을 바라봤다.
평소처럼 그림에 열중해 있는 모습이다.
벽시계를 보니 오후 2시가 넘었다.
"형은 그거 대충 마무리하고 퇴근해, 제대로 이사 정리도 안 됐을 거 아냐. 빨리가서 정리해."
내 말에 실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짐이라고 해봐야, 별것도 없어. 그 정도는 저녁에 해도 된다. 그리고 내 사전에 대충은 없으니까 그런 헛소리는 하지 말고."
사실 어제 드디어 이 근처에 실버가 방을 구했다.
한동안 화실의 빈방을 사용하고 있었는 데, 최근 돈이 좀 모였는지 갑자기 독립선언을 해버린 것이다.
좀 웃긴 게, 애초에 그런 거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뭐, 본인은 화실에 얹혀살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여긴 너무 집이 커서 밤에 혼자 있으면 기분이 나쁘다나 뭐라나.
귀신같은 얼굴로 밤에 혼자 어슬렁거리며 이집을 돌아다녔을 것을 생각하니 어째 웃음이 나오기는 하네.
"왜 웃어? 기분 나쁘게."
실버가 눈을 부라린다.
"아, 딴 생각하느라."
"아닌 것 같은데……."
정말 귀신이야, 저 인간은.
갑자기 자판기 커피가 댕기네.
"나, 나갔다가 올 건데 오는 길에 뭐 사다줄까?"
"역시 수상하군. 평소엔 그런 거 묻지도 않더니."
"적당히 해. 좀."
"필요한 거 없다."
"그럼 말고."
그때 경희가 불쑥 끼어든다.
"오빠, 나 호빵."
"나도."
선희까지.
"야, 이제 겨울 끝나서 그런 거 안 팔아."
"아, 먹고 싶었는데, 언니도 그렇지?"
"아, 난 괜찮아."
성준회는 날 힐끔거리더니 어색하게 웃는다.
"그래, 그럼 다녀올게."
"오빠, 그럼 과자라도 사줘."
"알았다. 알았어."
집을 나서는데 확실히 3월이 끝나가는 때라 그런지 가벼운 복장임에도 오히려 낮은 덥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날씨가 좋다.
이제 슬슬 벚꽃도 필 시기겠네.
내가 살던 때는 동네에도 벚꽃나무가 많았는데, 이 시대엔 다른 나무를 가로수로 많이 심은 탓인지 구경하기가 힘들다.
"와아아아!"
확실히 야외엔 아이들이 많다.
내가 살던 시절엔 아이들이 이렇게 무더기로 모여 노는 모습을 보는 건 하교시간 말고는 보기 어려웠는데.
인터넷이 없고, 스마트폰이 없으니 밖에서 노는 게 더 즐거운 거겠지.
아니, 그보다 애초에 아이들도 많은 것 같고, 그런데 먼 곳에서 익숙한 사람들이 보인다.
"……?"
걸음을 멈추고 그곳을 자세히 바라봤더니, 박상식과 누나다.
두 사람이 걸어오며 뭔가 이야기를 하는데, 박상식은 뭐가 그리 즐거운 건지 바보처럼 웃고 있다.
그런데 그때 박상식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여어!"
그 순간 박상식이 화들짝 놀란다.
꽤나 당황했는지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그때 누나도 날 발견하고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표정이 편안한 거 보니까, 별 진전이 없는 모양이다.
저 바보 같은 인간은 그렇게나 시간이 많았는데, 여태껏 뭘 한 건지.
저러다 누나가 대학 들어가면, 더 힘들어질 텐데.
에고, 어쩌겠어. 모든 게 제 팔자인걸.
내가 혀를 차며 두 사람에게 다가가자 박상식은 얼굴이 벌게진 채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밖에서 뭐해?"
"어. 슈퍼에 좀 살게 있어서. 그런데 어째, 두 사람이 같이 오네?"
내가 가재미눈을 뜬 채로 박상식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그게, 버스에서 우연히 만났어."
"버스에서?"
그 말에 박상식이 뭔가를 떠올렸는지 표정을 바꾸며 내게 말했다.
"아 참, 전상길 선생님 오늘 아침에 교통사고 당하셨어. 그래서 지금 병원에 들렀다가 오는 길이야."
그 말에 내가 화들짝 놀랐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해? 나랑 같이 가지."
"아침에 집으로 전화 와서 정신이 없었어. 일단 병원에서 따로 연락하려고, 그런데 급하게 병원까지 갔는데, 뭐 크게 다친건 아닌 모양이더라. 그냥 평소처럼 팔팔하시더라고."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크게 다치지 않으셨다니까."
"뭐, 그렇기는 한데, 문제가 생겼어."
"문제라니?"
"오른손을 좀 삐신 모양이야. 일단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서."
"아. 그럼……?"
"맞아. 한동안 원고 작업은 못하는 거지."
그 이야기를 듣던 누나가 먼저 가보겠다며 박상식에게 슬쩍 목 인사를 하고 집 쪽으로 걸어간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그런 누나의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자 내가 박상식을 툭 치며 말했다.
"뭘 그렇게 얼이 빠져 있어?"
"내, 내가 뭘?"
"됐고, 아까 하던 얘기나 마저 해봐."
"어. 그래. 그런데 어디까지……."
"어이구, 정신 봐라. 선생님 화실."
"아, 맞다. 선생님 화실 말인데, 앞으로 선생님 기브스 풀 때까지만 이라도 일을 좀 도와주기로 했어. 너랑 하는 연재원고는 틈틈이 화실로 가서 할 테니까, 그 문제는 걱정 안 해도 돼."
"그쪽 화실은 어때? 선생님 빠져서 바쁜 건가?"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지. 선생님이 하던 일이 있으니까. 그걸 양구 씨가 다 맡아야 하잖아. 그래서 데생이라도 좀 도와주려고."
그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콘티라면 몰라도 데생이라면 쉽지 않을 텐데.
"어? 형이 데생을?"
"이거 왜이래? 나도 예전에 만화 그려 봤잖아. 실력이 좀 부족해서 그렇지, 아예 못하는 건 아니야. 거기다. 최근엔 우리 화실에서 선희 그리는 거 보면서 공부한 것도 있어서, 좀 더 늘었거든. 속도는 아직 느리지만, 볼래?"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가방을 열어 노토를 꺼내 내게 보여준다.
노트에 그려진 건 연필로 그려진 단순한 일러스트가 아니다.
칸을 나눠 만든 콘티를 기반으로 만든 데생이 분명하다.
비록 퀄리티는 부족하지만, 이 정도라면 대본소 만화정도는 어느 정도 커버할 수준이다.
"괜찮네."
"정말이냐?"
"용케 그동안 실력을 쌓았네? 나중에 만화가로 나가볼 생각이야?"
"뭐, 지금은 배우는 단계라 뭐라 얘기하긴 힘들지만, 다시 그래보고 싶어서."
"그림 그리는 거 포기하고 스토리 작가로만 나갈 생각은 아니었나 보네."
"뭐, 원해서 포기한 것도 아니니까."
맞다.
나 역시도 그림에 재능이 있었다면 그냥 덕후질만 하지는 않았겠지.
뭐, 이 시대에 온 이상, 결과적으로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럼, 내일부터 가는 거야?"
"어. 아침에 바로 그쪽에 가려고, 물론 오후에는 우리 화실로 올 거야. 아마 한 달 정도는 그렇게 지내야 할 거야."
"그럼 나도 가끔씩 도와줄까?"
"괜찮아? 너 바쁘잖아."
바쁜 모양이네, 거절하지 않는 걸 보면.
"바쁘긴, 나야 아무데서나 스토리만 짜면 되는데."
"스토리가 그냥 구상한다고 막 나오냐?
아무튼 넌 참 대단하다. 난 정말 스토리 하나 구상하는데도 엄청 피곤한데."
그건 나도 신기하다.
이 시대로 오면서 몇 가지 정신적 보정을 받은 것일까?
생각해보면 스토리에 관해서는 크게 힘들게 고심해 본 기억이 없다.
본체 놈의 머리가 좋았던 걸까?
그런데 화실로 돌아온 뒤 이 이야기를 선희에게 했더니 저도 가겠단다.
"엥? 넌 뭐 하러?"
"나도 돕고 싶어."
"그래도…… 굳이 너까지야."
"내가 도움이 안 돼?"
"아니, 너라면 엄청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학교 때문에 힘들까봐 그러지"
"오빠 갈 때만 조금씩 도울게."
하긴, 데생의 능력이 이젠 너무 능숙해져서, 주간 두 작품 데생작업도 마음먹으면 하루 만에 끝낼 정도의 속도다. 물론 월간지인 다크 프린세스도 있지만, 그래봐야 별 차이 없으니까.
거기다가 전상길 화실과 선희 학교가 가깝기도 하고,
"뭐, 여유가 있다면 그러던지."
다음날 오후,
전상길의 화실로 찾아갔다.
선희는 학교 마치고 바로 찾아오기로 했다.
화실로 들어서자, 문하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날 보며 물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아, 어서와."
박상식이 날 보며 말하자 일하던 추양구가 날 알아보고는 인사를 한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때문에 눈치를 보던 남자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화실을 둘러보니 몇 명 빼고는 대부분 처음 보는 얼굴들이다.
실내 장식은 그대로지만 사람들이 바뀐탓인지 분위기가 전보다는 좀 덜 화기애애한 것 같다.
그동안 평발 스트라이커 작업하면서 문하생들이 화실을 많이 그만뒀단다.
평발 스트라이커가 인기 만화 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퀄리티가 높은 편이라 문하생들 사이에 불만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페이지로 돈을 받는 방식이다 보니 오히려 돈이 되지 않는다며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돈을 더 줘도 그래봐야 다른 화실의 일보다 확실히 속도가 나지 않으니 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점점 신참이 늘어나게 되고, 더불어 최근 들어서는 그림의 퀄리티도 많이 떨어졌다.
그래도 아직 평발 스트라이커에서 나오는 캐릭터 수익이 좀 있어서, 화실을 운영하는 데는 문제가 없는 모양이지만,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운영을 해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 앉아. 뭐 마실 거 줄까?"
"형은 어째 여기 화실에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다."
"야, 우리 화실만큼은 아니어도 여기 자주와. 그러니까 이렇게 내 책상도 있는 거고."
지금 전상길 화실에서 하는 '깡으로 산다' 의 스토리를 쓰고 있으니 당연한 건가?
듣기론 원래 처음엔 세권짜리로 만들었던 이야기인데, 그게 반응이 좋아서 7권을 늘려 10권짜리로 제작중이란다.
이미 읽어본 바로는 원래라면 곰탱이시리즈로 세상이 나왔어야 할 그 내용들이 이 깡으로 산다에 들어있었다.
결국 본인이 만든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든 결국 이렇게 세상에 나오는 모양이다.
"콘티 볼래?"
"어."
"여기."
박상식이 내민 콘티노트를 확인해 보니 괜찮은 느낌이다.
사실, 대본소용 만화는 속도가 생명인 탓에 짧은 시간에 많은 분량을 뽑아야 한다. 그러다보니 콘티가 허술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예전에 같이 했던 평발 스트라이커야 아무래도 스토리는 내가 맡은 탓에 그 시간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의 콘티를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혼자 스토리에 콘티까지 짜려면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니까.
그런데도 그동안 혼자 해온 콘티라고 생각하면 퀄리티가 좋다. 아니, 오히려 나랑 같이 할 때보다 더 좋아진 느낌이다.
물론 스토리에 허점이 많이 보이긴 하지만,
"어때? 좀 어설프지?"
"그래도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네. 시간도 많이 없었을 텐데."
"하하,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기분은 좋네. 뭐, 고생은 좀 많이 한건 사실이지만"
"하지만, 독자들은 냉정하지."
"인정사정없는 독설이네."
"그런가?"
"그래도 괜찮으니까. 의견이 있으면 좀 말해줘."
"그렇게 말한다면."
곧장 스토리에 대한 토론으로 들어갔다.
그냥 입으로 떠든 거.
나야 도와줄 일이라곤 이런 거 밖에 없다.
그렇게 콘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박상식이 메모를 해나가는 사이 화실 문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장 문이 열린다.
이번에도 아까 내가 들어왔을 때 다가왔던 남자가 문 쪽으로 나간다.
"어? 여기 누구 만나러 왔니?"
그때 추양구가 남자에게 한마디 했다.
"이봐, 어려 보여도 만화가 선생님이야.
예의 있게 행동해."
"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선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