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다 (1)
"방금 저기서 사인이라고 하지 않았어?"
"어. 나도 그렇게 들었어."
"그럼, 저사람 혹시……."
"단편을 그린 만화가인가?"
"야, 가보자."
"좋아."
사람들이 점점 모리 주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심히 사인을 하고 있는 모리에게 잡지를 펼쳐 보이며 누군가 물었다.
"혹시, 이 단편을 그리신 분이세요?"
"아, 네."
모리가 조금은 부끄럽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오, 단편을 그린 작가가 맞나보다."
"그런가봐. 운이 좋은데?"
"우리도 사인해 주면 안돼요?"
"네?"
"설마 거기 몇 사람만 해주고 끝낼 건 아니죠?"
"……."
"우리도 좀 해줘요!"
입구에 사람들이 몰려들며 소란스러워지자 서점직원들이 나왔다.
"저기, 죄송한데 이렇게 모여 있으면 통행에 방해가 됩니다."
"이분 이 만화 그린 만화가 선생님이세요."
"네?"
"여기 오늘 사인회 안 열어요?"
"사, 사인회요?"
"여기 사람들 이분에게 사인 받으려고 몰려 있는 거예요."
점점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자, 직원도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더니 이내 서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난데없이 서점 앞에선 계획에도 없던 길거리 사인회가 열리게 되었다.
*
조금은 실험적인 생각으로 진행된 단편 '삼사라 암흑왕'은 생각이상으로 반응이 좋았다.
독자엽서 앙케이트엔 아예 순위를 매기는 작품에서 빠져 있음에도 일부러 삼사라 암흑왕을 적어 넣어 보낸 사람이 상당할 정도였으니까.
그 덕분에 비공식 앙케이트 순위에선 11위를 차지했다.
애초에 적혀있지도 않은 작품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엄청난 성적인 것이다.
때문에 소년 히어로 편집부 회의에서 이 작품을 더 이어가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런 반응이 있었는데, 그냥 묻어둘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부족한 작가진에 이만한 인기를 끌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으니까.
물론 원작이 있는 만화라고 하더라도 재능이 있다는 건 사실은 분명했다.
하지만 작가의 의향이 가장 중요한 일.
그래서 일단 단편을 그렸던 모리에게 지로가 의향을 물었다.
"연재 말인가요?"
"네. 준비기간을 좀 거쳐서, 격주간지나 월간지에서 연재를 해보는 게 어떨까요?"
"……저야, 그럼 좋긴 하죠. 삼사라를 계속 그릴 수 있다면요. 하지만, 써니 선생님께서 ……."
"그 부분은 이미 허락을 받아둔 상태입니다. 물론 연재를 위한 스토리 감수는 꼭 필요하고요. 물론 원작이 있는 만화의 외전 격이라 원고료의 일부는 원작자 선생님에게 갈 겁니다. 어떻습니까?"
그 말에 모리가 바로 머리를 끄덕였다.
"네. 해보고 싶습니다."
일단 연재가 결정되자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먼저 그가 원고를 그릴 수 있는 장소를 먼저 물색하고, 더불어 어시들을 모았다.
아직은 기반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은 신인이었지만, 첫 단편의 반응이 뜨거웠다는 것을 감안해 출판사에서 어느 정도 지원을 해준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리고 연재를 하게 될 잡지는 '스피릿 히어로'로 정해졌다.
스피릿 히어로는 격주 소년지로 판매부수는 아직 10만부가 채 되지 않는다. 이곳에 최근 미쯔다쇼텐의 간판잡지인 소년 히어로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역할을 하는 잡지다.
이곳에서 성적을 잘 올린 작가들이 소년 히어로로 넘어가는 추세니까.
그곳에서 모리는 새로운 담당편집자인 나카다 에리와 함께 '삼사라 암흑왕'의 연재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며칠 후,
새로운 화실로 옮긴 모리는 본격적으로 '삼사라 암흑왕'원고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스피릿 히어로에서 암흑왕의 연재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주간 히어로와 스피릿 히어로를 통해 외부로 알려지자 만화계가 시끄러워졌다.
특히 이런 방식으로 하나의 만화를 다른 만화가가 연재를 하면서 세계관을 넓혀가는 경우는 미국의 대형 만화잡지사인 마블과 DC에서 하는 방식과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두고 만화연구회모임에서도 많은 토론이 오갔다.
"흥미로운데? 이런 식이면 무한 확장이 될 수도 있는 일이잖아."
"한 작가가 만들어내는 세계관처럼 일관성이 있다고 보긴 힘들지 않을까. 세계관이 늘어나는 거야 우리 같은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지만."
"레이지버스를 봐봐. 한사람이 만들었지만 설정에 허점이 생각보다 많아. 그러니까, 그건 별로 문제가 아니지. 오히려 걱정해야 하는 건 여러 작품 중 하나라도 문제를 일으키면 전체 유니버스에 상당한 타격이 생긴다고."
"그건 뭐, 써니 쪽이나 출판사에서 잘 관리하기 나름 아니겠어? 미국 히어로 만화도 벌써 50년 정도의 역사를 지녔다고."
"그건 좀 다르지. 그건 완전히 회사에서 만화가를 사원처럼 부리는 형태잖아."
"어쨌건 난 괜찮은 시도라고 생각해."
"나도 그래. 이런 방식이 성공하게 된다면 성공하는 만화들을 좀 더 오래 많이 볼 수 있다는 거니까."
"난 반대야. 삼사라를 다른 사람이 그린다는 건 솔직히 상상하기 힘들어."
"뭐라는 거야? 오리지널은 어차피 써니 작품이잖아. 나머지는 이벤트 정도로 생각하면 되는 거고."
"그건 그러네."
많은 의견이 오갔지만, 대체적으로는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만큼 삼사라는 만화연구회의 사람들에게 많은 대화거리를 제공해 주는 만화였으니까.
물론 연구회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만큼 실제 판매량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게 문제지만,
***
"네. 5페이지에 있는 그 컷의 장면만 제 말씀대로 수정하시면 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로와의 통화를 끝내고 다시 암흑왕의 복사콘티를 확인했다.
콘티라고는 하지만, 꽤나 꼼꼼하게 작업되어있어서 꽤나 놀라고 있는 중이다.
마치 만화영화의 스토리보드처럼 장면들을 세세하게 설명한 글이 적혀있다.
그나저나 삼사라에서 잠시 등장했던 배경과 언급되었던 말들을 조합해 이만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솔직히 재미 하나만 놓고 보자면 좀 부족한 게 사실이지만, 설정만큼은 정말 대단하다는 건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나도 나름 디테일하게 세계관을 만들어가고 있다 생각하는데, 이 암흑왕은 그야말로 덕후만화의 결정판이라고 할 만큼 대단하다.
엄청나게 확장시킨 세계관을 비롯해서 삼사라보다 훨씬 어두운 느낌에 불친절한 내용전개까지.
세계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정말 읽다가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은 느낌도 있다.
나나 선희 같은 경우엔 굉장히 흥미롭게 보고 있지만, 그거야 우리가 만든 이야기니까 당연한 거고, 그게 아니더라도 나나 선희는 덕후기질이 강하기도 하니까.
물론, 덕후스럽다는 건 그만큼 대중적이기는 힘들다는 뜻도 있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조금 아쉬운 부분이겠지.
그래도 개인적인 판단을 해보자면 스피릿 히어로에서는 충분히 순위가 상위권으로 나올 만큼은 된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그 잡지의 판매부수가 크지 않으니까.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성준희가 날 불렀다.
"윤환아, 소포 왔어."
그 말을 듣자마자 서둘러 마당을 나가 집배원에게 소포를 받았다.
지로가 정기적으로 보내는 소포다.
그것을 가지고 실내로 들어와 뜯어보니 박스가 두 개가 들어있다.
하나는 최근 TV에서 방영을 시작한 건담이고, 다른 하나.
는 타츠노코 프로덕션에서 받아온 것을 포장한 박스라고 들었는데.
일단 Z건담은 나중에 어시들과 함께 보기로 하고……, 먼저 타츠노코 프로덕션에서 받은 물건이 들었다는 박스를 뜯었다.
박스를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두꺼운 책자 한권과 얇은 책자 한권,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한 개다.
책자를 살펴보니, 애니메이션 제작 시 가장 기본이 되는 스토리보드다.
감독이 직접 만든 스토리보드 책과 함께 설정자료 책자.
설정자료를 살펴보니 꽤나 상세하다.
캐릭터들의 앞뒤 그림과 표정들 그리고 캐릭터 소개가 되어있고, 더불어 삼사라의 배경이 되는 도시와 각종 실내배경, 그리고 기괴한 무기들의 설정도 있다.
일단 이제까지 나온 삼사라를 기반으로 한 단편이기 때문에 큰 이야기가 아닌 짧은 이야기다.
물론 1시간짜리 OVA이니 짧은 에피소드인 것이다.
그래도 나름 나오는 설정은 꽤나 꼼꼼하게 잘 만들어져 있다.
몇 개 정도의 배경이나 복장은 요청을 받아 선희가 몇 개 보내준 것도 있지만, 스토리보드도 살펴본다.
첫 장면의 시작부터 시간대별, 장면별로 자세히 그려진 스토리보드를 보며 감독이 생각이상으로 이번 작품에 공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인적으로 내가 알고 있는 감독이 아니어서, 좀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괜한 짓이었던 모양이다.
스토리보드를 꼼꼼하게 살펴본 뒤 바로 비디오를 플레이 해본다.
오프닝 장면에 등장하는 도시의 모습이 멋지다.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화로운 세상을 자연스럽게 잘 묘사했다.
영상도 뛰어나고 색감도 일본 특유의 원색적인 느낌인데, 나쁘지 않다.
아직 사운드는 입혀지지 않은 상태.
그러다 잠시 후 영상이 끊어지고 곧 색이 사라진 연필선 만으로 표현된 영상이 나온다.
방금 봤던 스토리보드의 그림과 비슷한 느낌인데 그것이 단지 움직이는 형태로 나왔을 뿐이다.
선만으로 표현했다고는 해도 구성이나 연출은 상당히 훌륭하다.
확실히 OVA 작품이라 그런지 TV판과는 비교할 수 없는 퀄리티다.
듣기론 스폰서가 완구회사라고는 하던데, 삼사라에 등장하는 무기를 프라모델로 만드는 모양이다.
무기가 워낙 다양하게 나오는지라 거기서 꽤나 인기 있는 것들만 따로 만들어 팔기위해 애니에서도 무기에 대한 표현에 신경을 쓸 거라고 한다.
일단 엔딩 곡에 나올 노래는 마크로스의 린민메이 역할을 했던 '이이지마 마리'로 하려했지만 불발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아무래도 마크로스로 인해 인지도가 너무 올라버린 것도 있을 테지만, 애초에 가수로 데뷔한 그녀가 애니메이션 린민메이로 너무 뜬 바람에 애니를 싫어하게 되었다는 얘기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쉽기는 하다.
삼사라 엔딩 곡을 린민메이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저녁이 되자 작업을 일찍 마친 어시들이 화실을 하나둘 나섰다.
마지막까지 뒷정리를 하던 성준도 잠든 준모를 보며 퇴근준비를 서두른다.
준모 녀석, 경희와 열심히 놀다가 저녁 먹고 나더니 저렇게 잠들어 있다.
유치원이 근처라 마치면 성준희가 데려온 뒤, 퇴근할 때 집으로 데려가는 식이다.
내가 준모를 등에 업으며 말했다.
"오늘은 고생했으니까, 버스 타는 곳까지 내가 업고 갈게."
"안 그래도 돼."
"아니 괜찮아."
그렇게 말하고는 대문을 나선다.
"오빠, 나도 같이 갈까?"
"됐어. 오늘 해야 할 거 많다며."
"아우, 요즘엔 툭하면 시험이니까. 역시 고등학교 생활은 빡빡하다니까. 아무튼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길이 어두우니까, 조심하고."
"그래, 알았다."
준모를 업고 화실을 나서서는 같이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준모가 등에서 뒤척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과자."
"이 녀석, 자면서도 과자를 찾네."
"매일 과자 타령이야."
성준희가 내 등에 업힌 준모를 힐끔거리며 웃었다.
그리고는 날 본다.
"왜?"
"이젠 좀 익숙해지긴 했는데, 그래도 가끔 이게 꿈인가 싶어서."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잖아. 너도 예전의 모습과 전혀 다른데다가 네 덕분에 우리 집 사정도 좋아지고, 이렇게 준모를 유치원에 보낼 수도 있고, 모든 것이 가끔은 신기하게 느껴져서. 요즘 엄마도 늘 행복하대. 이제 엄마랑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할 수도 있을 것 같고."
"내 덕분은 아니지. 네가 열심히 해서 버는 건데."
"그래도 네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많은 돈을 버는 건 어림없지.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
이런 분위기는 정말 쥐약인데.
그렇게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 근처까지 갔을 때였다.
누군가 걸어오다 우리를 보고는 멈칫했다.
"?"
젊은 남자인데, 깜짝 놀란 얼굴로 나와 성준희를 번갈아 바라본다.
"준희……, 너."
그런데 준희도 아는 얼굴인지 놀란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본다.
"오, 오빠."
오빠?
성준희는 준모랑 단 둘이라고 들었는데?
어? 그럼 남친?
그런데 남자는 곧장 나를 보며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너……, 이 새끼!"
뭐야, 이거.
지금 무슨 상황인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