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54화 (154/425)
  • 이제부터 경쟁자 (3)

    경희가 만든 콘티를 처음부터 살펴보았다.

    그리고 왜 거부당했는지 알 것 같다.

    나름 원래의 열혈스러움도 잘 이어가려고 했고, 치바 료라는 인물 분석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뜬금없이 진행되는 이야기였다.

    이야기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으니 몰입감이 떨어지는 것이다.

    콘티를 보며 콧등을 찌푸리는데 그런 내 표정을 경희가 빤히 보고 있다.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스토리가 이상해?"

    "전체적으로는 괜찮아."

    "오, 정말? 그런데 왜 그렇게 표정을 지어? 설마. 생각보다 스토리가 너무 좋아서, 충격……. 아야!"

    내가 꿀밤을 먹였더니 경희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머리를 감싸 쥐고 뒤로 슬쩍 물러난다.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했지. 누가 스토리가 너무 좋다든?"

    "……그럼?"

    "흐름이 자꾸만 뚝뚝 끊어져서 영 보기가 껄끄러워. 이렇게 산만해서야 몰입하겠냐고."

    그제야 놀란 표정으로 물어본다.

    "많이 그래?"

    "많이고 자시고 일단 이렇게 자꾸 끊어지면, 몰입감이 떨어지게 되겠지. 그럼 당연히 재미는 없는 거고."

    "잘 이어주기만 하면 괜찮아?"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해도,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지겠지. 자. 봐. 여기 부분, 대화를 다시 읽어봐."

    "……좀 이상한가?"

    "이상해. 너무 이상해. 넌 남의 건 잘 지적하면서 네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전혀 모르는 구나."

    "……그게, 생각은 하는데, 같은 이야기를 너무 많이 읽으니까.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더라구."

    "그래서 경험이 필요하다는 거다."

    내 말에 머리를 끄덕이더니 곧 히죽거리며 웃는다.

    "야. 뭘 히죽거려? 문제에 집중하라고."

    "알았어, 알았어. 그런데 오빠가 그렇게 말하니까, 무슨 가정교사 같다. 무섭게 생긴 깡패 가정 교……. 아얏!"

    "집중!"

    "눼이 ……."

    가끔 이렇게 산만한 구석이 있기는 해도, 역시 이해력은 빠른 녀석이었다.

    평소에도 책을 좋아하고 일기도 꾸준히 써서 그런지 대사의 문장력은 오히려 나보다 훨씬 낫다.

    하지만, 이야기 를 만드는 것 만큼은 아직 제대로 익히지 못한 탓에 이야기가 조금은 우왕좌왕하는 모습이다.

    아주 짧은 아이디어다. 단편 이야기에는 꽤 능숙하지만, 어쨌거나 진심의 남자 콘티 내용만큼은 확실히 흥미로웠다.

    어찌 보면 경쟁 작품인데, 이렇게 훤히 보고 있어도 되나 싶어서 껄끄럽긴 하다.

    키도도 이런 모습을 보면 싫어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키도에게 한소리 듣는 것 보다 경희가 더 중요하다.

    "오빠, 그럼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고민해, 고민."

    "……알았어. 미안."

    물론 내가 대신 해준다는 건 절대 없다.

    오로지 자신이 알아내야 한다. 그래야 피가 되고 살이 된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서둘러 콘티를 수정해 나간다. 그리고는 거만한 표정으로 내게 콘티노트를 내밀 었다.

    "자. 한번 보시죠."

    "……."

    천천히 살펴보니 확실히 부드럽게 이어진다.

    덕분에 이야기에 대한 몰입도가 상승했다.

    몰라서 헤맸을 뿐 가르쳐 주니 금방 이해하고 그것을 실행한다.

    하지만 아직은 특별하지 않다.

    이야기를 부드럽게 진행시키는 건 좋아졌지만, 경희의 장점인 톡톡 튀는 내용은 부족하다.

    그런 내 표정을 살피던 경희가 입을 열었다.

    "30분만 내게 시간을 줘."

    뭔가 떠오른 모양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신나하며 한쪽 옆 테이블로 가서 A4용지에 칸을 그리고 뭔가를 열심히 써 나간다.

    새로 만드는 건가?

    잠시 후, 작업을 마쳤는지 몇 장의 종이를 들고 다시 다가온다.

    "다 됐어."

    "콘티를 새로 만들려고?"

    "아니, 그건 아니고."

    방금 만들었던 종이를 콘티노트 사이에 끼워 넣었다.

    "이게 뭐야?"

    "아, 뭔가 내용이 아쉬워서. 그냥 문득 떠오른 내용을 사이에 추가해 본거야. 크게 대단한 건 아니고."

    이야기를 늘린 건가?

    하지만, 쓸데없이 늘리면 늘어지기만 할 텐데

    그래도 일단 읽어보기로 하고 끼워진 내용만 다시 읽어봤다.

    부드럽게 이어지지만 다소 지루한 느낌의 구간이었는데, 여기서 더 늘어지면……

    그런데……. 어?

    끼워진 내용을 보는데 갑자기 눈에 확 들어오는 기분이다.

    뭐랄까. 밋밋한 음식에 가장 맞는 맛의 재료가 섞였단 느낌이랄까.

    추가된 장면만 따로 놓고 보면 그냥저냥 한 병맛의 이야기처럼 보일 뿐이다.

    그런데, 이게 이야기와 이어지니까, 뭔가 느낌이 다르다.

    아무런 의미가 없어보이던 치바 료의 행동에 하나의 의미가 부여되었다. 그리고 추가된 장면으로 인해 이제까지 없던 매력이 더해졌다.

    이제까지 멋진 외모에 화끈한 성격으로 인기를 가진 조연급 인물이긴 했어도, 냉정하게 따져보면 매력은 좀 부족했었다.

    뭐랄까. 그저 멋있게만 보여서, 인간적인 매력이 부족하달까.

    근심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짧게나마 하는 푸념의 대사가 그런 치바 료를 인간적으로 만든다. 거기다 짧지만 에피소드 역시 강렬하다.

    특히 키시 야마토와 추운새벽 바닷가에서 팬티바람으로 싸우는 장면은 진짜…….

    경희의 머릿 속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이것도 좀 충격이다.

    그나저나 제법이네.

    그동안 뻘 짓을 좀 하긴 했어도, 이런 센스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런데 지금 내 경희가 눈을 크게 뜬 채로 내 표정을 살피고 있다.

    "역시……. 이상해?"

    "이상하다."

    "역시, 그렇 구나. 쓰면서도 좀 이상하다 했는데, 역시 빼는 게……."

    "아니, 이상하긴 해도 재밌긴 하다. 물론 이야기를 최종 결정하는 건 키도 형이니까. 내가 뭐라고 할 수는 없긴 하지만."

    "오빤 괜찮다는 거지?"

    "그래, 병신 같긴 하지만, 재밌다."

    "뭐야, 그게?"

    내 말이 웃겼는지 곧 킥킥하고 웃는다.

    이 시절엔 독특한 표현이긴 하겠지.

    "역시 화룡점정이었다?"

    "거만을 떨 정도는 아니야."

    내 말에 거만을 떨던 표정이 살짝 무안한 모습으로 바뀐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이야기인데, 뭔가 좀 아쉽다.

    어지간하면 적극적으로 도와주지는 않으려 했는데, 이거 그래도 피가 땡겨서 어쩔 수가 없다.

    "내용을 조금 수정해보자. 어때?"

    "정말? 그럼, 나야 고맙지."

    그렇게 말한 경희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런데 다음날 예상 못한 일이 생겼다.

    키도가 화실에 찾아온 것이다.

    물론 갑작스런 그의 방문에 가장 기뻐한 건 경희다.

    "와아. 어서와, 오빠!"

    "어서와."

    "안녕하세요!"

    나와 어시들도 키도를 반겼다.

    "모두를 잘 있었나?"

    키도가 금의환향하는 모습으로 손을 흔들며 들어온다.

    그리고는 양손에 들고 온 가방을 내려 놓는다.

    "어? 그게 뭐야?"

    "선물, 전에 신세진 것도 좀 있고 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가방을 풀어헤친다.

    일본과자와 각종 그림 도구들이 들어있다.

    그것을 화실 식구들에게 나눠 준다.

    펜대와 각종 펜촉과 톤 깎기 용 칼, 곡선자 그리고 가장 비싼마카까지.

    갑자기 고급재료를 선물로 받은 어시들이 기뻐한다.

    "고맙습니다."

    "잘 쓸게요."

    "감사합니다."

    "별거 아니라네."

    "갑자기 무슨 일? 혹시 네임 때문에?"

    내 질문에 키도가 머리를 끄덕인다.

    "뭐, 그렇지. 아무래도 어제 내가 한 말도 좀 심하다 싶어서 마음에도 걸렸단다."

    그렇게 말하며 경희를 바라본다.

    그러자 경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무슨 소리, 내가 그 정도로 기죽을 줄 알았어! 저언혀, 신경 안 썼어."

    과도할 정도의 액션으로 손을 휘적거린다.

    애 쓴다. 정말.

    그런데 그 모습을 본 키도가 피식 웃었다.

    "그럼, 다행이구다. 그건 그런데……."

    뭔가 표정이 좋지 않다.

    나쁜 소식을 전하려고 온 사람 같다고나 할까.

    그때 이쪽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던 실버가 입을 열었다.

    "스토리는 읽어보고 판단하죠."

    "……."

    이게 뭔 소리야?

    아. 그럼.

    스토리를 맡기려던 걸 취소하겠다고 직접 온 건가?

    어째 그냥 선물을 사 올 리가 없지.

    나름 미안하니까 직접 온 모양이다.

    "경희도 어제부터 계속 열심히 했으니까."

    실버의 말에 키도가 경희를 돌아본다.

    경희가 피식 웃더니 자신의 콘티노트를 키도에게 내밀었다.

    "마음에 안 들면 할 수 없지 뭐. 난 괜찮아."

    "……미안하구나."

    "아이 참, 실버 오빠도 읽어보고 얘기하라잖아."

    "아, 그렇구나."

    어시들은 우리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며 대충 짐작은 하고 있을 것이다.

    키도가 덤덤한 표정으로 콘티노트를 받아서는 읽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미 읽은 내용이라 특별히 기대하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내용이 많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눈빛이 바뀐다. 그러나 조금 신중해졌을 뿐.

    크게 호기심을 가진 표정은 아니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반응이 나쁘지 않다.

    그렇게 어떤 결정을 내릴지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때 경희가 종이 몇 장을 가져와서는 이야기 사이에 집어넣는다.

    "……뭐냐?"

    "아, 빠진 페이지."

    "빠진 페이지? 내가 보기에 빠진 내용은 없었는데."

    키도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면서도 빠진 페이지를 콘티 사이에 끼워 넣고는 다시 읽어보더니 내가 그랬던 것처럼 깜짝 놀랐다. 아니, 나보다. 반응이 훨씬 크다.

    "우오옷! 이게 어떻게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것이냐! 정말 경희 네가 만든 이야기라고?"

    "오빠가 쬐금 도와주긴 했는데, 기본적인 건 내가 만들었지."

    "……놀랍구나. 같은 이야기라도 전개하는 방향에 따라 이렇게나 느낌이 달라지다니. 그런데 이 바닷가에서 팬티차림으로 싸우는 장면은 어쩐지 가슴이 뜨거워지는군."

    재밌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가슴이 뜨거워진다는 건 좀.

    "좀 아쉽네. 아예 아무것도 안걸치는 게 더 열혈 스러우니까."

    그 말에 경희가 비명을 지른다.

    "꺅! 그래도 그건 좀 그렇지!"

    애초에 팬티차림의 격투장면을 생각한 주제에 오버하긴.

    그래도 키도는 이야기가 마음에 드는지, 여러 번 스토리를 확인하며 히죽거린다.

    그때 그 모습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던 실버가 입을 열었다.

    "아까. 하고 싶은 말은 하시지?"

    "……아."

    "그래, 이제 결정이 난거요?"

    "물론이다."

    "……?"

    모두가 키도 선생에게 주목했다.

    어시들이야 아직 대화의 내용을 정확히 몰라서 긴가민가하는 모양이지만,

    "이런 실력이라면 무조건 환영이다."

    하지만 이번엔 경희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결정을 안 내렸는데."

    "………뭐?"

    "일단 어떻게 할지는 생각해보고."

    "아니, 이렇게 재미있는 얘기는 당장 써야하는데, 생각이라니."

    "뭔가 부족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단다. 충분하다. 아니 너무 재밌단다."

    이번엔 키도가 난리다.

    "내가 어제 한말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면 내가 사과하마."

    "뭐. 그런 건 별로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아."

    마음에 두고 있었잖아!

    잘도 저런 표정으로 뻔뻔하게 말하네.

    저거, 글재주보다 연기에 더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좋아, 뭐. 그렇게까지 부탁하니까."

    "고맙구다. 고마워."

    못이기는 척 하면서 결국 원하는 것을 얻어간다.

    여우로구다. 쯧.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찬 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나저나 방금 느낌이 어땠어?"

    "응? 뭐가 말이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중간 내용을 봤을 때 말이야."

    "아. 그거, 당연히 충격이었지. 너무 놀라워서 지금도 심장이 쿵쾅거린단다."

    "그래서 말인데, 이거 잡지에서 활용해 보면 어떨까싶어. 물론 잡지사에서 받아들여야 할 문제기는 하지만."

    "뭔데 그러냐?"

    ***

    "어떤가?"

    키도의 말에 담당 테고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왜 굳이 그런 귀찮은 걸……."

    "이게 이번 네임 사이에 들어갈 내용이거든."

    "네? 빠진 내용이 있었어요?"

    "일단 읽어 보게."

    테고시가 눈알을 살짝 굴리며 곧 빠졌다는 페이지를 네임사이에 끼웠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읽어본다. 그리고 끼워진 내용을 읽어가는 동안 깜짝 놀랐다.

    "어? 이거……."

    "자네 느낌은 어떤가?"

    "이거 굉장히 재밌는데요? 이런 식의 만화는 처음입니다."

    "그걸 이용하는 거지."

    "그러니까. 바로 이 내용을 페이지 사이에 끼워 넣은 뒤 봉인을 해둔다는 거군요."

    "그래."

    "처음 읽고 나서, 다시 봉인을 해제한 뒤 다시 읽으면 전혀 다른 느낌이니까."

    "맞다네. 바로 그거야."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이만한 내용이라면 꽤나 반응도 클겁니다!"

    테고시가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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