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53화 (153/425)

이제부터 경쟁자 (2)

경희가 키도의 전화를 받고는 뭔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 어설픈 일본말로 '정말?'라든가 할 수 있어!'를 남발하며 각종 추임새까지 넣는다.

뭔 얘기를 저렇게 하는 걸까?

뭔가 나 혼자 따돌리고 저들끼리 모략이라도 짜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

그러다 경희가 갑자기 특유의 펀치 세리머니를 한다.

"아싸! 나야 환영이지!"

그렇게 말하더니 곧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는다.

무슨 얘기를 들었기에 저렇게 좋아하지?

내가 슬그머니 물었다.

"뭔 얘기를 그렇게 격하게 해?"

"아, 그건 비밀."

"그렇게 시끄럽게 말해놓고 비밀은."

그래도 좀 알려주지, 저렇게 냉정하게 끊냐.

하지만 궁금한 건 나만이 아닌 모양이다.

"그래요, 이야기 해 봐요. 궁금한데."

"네. 말해줘요."

다른 어시들도 시루떡을 맛나게 먹으며 묻자 경희가 크게 웃었다.

"아하하, 조만간 알게 될 거에요."

어쭙잖게 뭘 숨기려 하는 거냐.

그때 떡을 무표정하게 쩝쩝거리던 실버가 곁눈질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뻔하구만. 키도 선생의 스토리에 참여한 거지."

"딸꾹."

그 말에 놀랐는지 경희가 커다래진 눈으로 실버를 바라본다.

정말 스토리 참여라고?

키도가 설마 진심의 남자를 포기한 건 아닐 테고,

하지만 경희의 표정이 그 생각에 확신을 준다.

정말이구나.

아무튼 경희의 표정 때문인지 어시들도 눈치를 챈 모양인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어? 정말이에요? 그럼, 진짜 축하할 일인데."

"뭐, 이번 이무기 에피소드도 따지고 보면 참여한 이야기잖아요."

그 말에 경희가 부끄럽다는 듯 손사래를 친다.

"에이, 그건 아니에요. 그냥 슬쩍 말로만 얹혀간 건데요."

"그래도 그게 반응이 좋았으니까, 이렇게 연락이 온 거겠죠."

"나도 이무기파트는 신선하면서도 재밌던데, 거기다 그게 묘하게 이야기에도 어울렸고, 거기다가 지금 진심의 남자 순위가 좀 밀려났잖아요. 삼사라에겐 완전히 밀린데다가 에스퍼 존이라는 강력한 라이벌까지 생겼으니까."

"키도 선생님께서 강수를 두셨네."

어시들이 띄워주기는 하지만, 글쎄 일단 지켜볼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키도와 경희가 너무 다른 스타일이라서.

어쩌면 극악의 수를 두는 건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이야기를 듣던 실버가 입을 열었다.

"파시엔시아도 만만치는 않지."

어느새 파시엔시아가 이야기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 같아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다.

하긴, 파시엔시아는 실버와 김기철의 강력한 하드캐리로 이끌어가는 만화니까.

솔직히 파시엔시아의 경우엔 좀 불리한게 사실이다.

삼사라처럼 다크 프린세스랑 연계하며, 연재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내 입장에서야 다 같은 자식이지만, 작업하는 입장에선 자존심이 걸린 문제일 수도 있다.

실버 때문에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구자희가 나서서 경희에게 물었다.

"정말 키도 선생님이랑 작업하는 거 맞죠? 자세하게 말해 봐요."

"……."

"에이, 빼지 말고."

그렇게 말하며 경희가 한숨을 푹 쉬더니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맞아요. 같이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 보재요."

"어떻게요?"

"소포로 네임을 보낸대요. 그래서 의견이 있으면 거기에 적어달라고 하더라고요. 이야기는 미리 앞서가고 있으니까, 급하게 할 필요는 없고, 전화로도 이야기하고요. 가끔 한국에도 나오겠다고 하고."

이미 키도가 한번 화실에 찾아왔던 경험이 있으니 특별한 건 아닐 테고,

"그럼, 완벽하게 협업을 하는 거네요?"

"일단 시작은 그런데, 결과가 나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고, 그보다……."

그렇게 말을 끊더니 뭐가 좋은지 혼자 낄낄거린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그런데 웃는 표정, 그래 알만하다.

"원고료도 일반적인 작가의 수준으로 주겠대요. 단행본도 참여한 비중에 대해 꼼꼼하게 계산해서."

그 말에 모두 허걱하고 놀라는 표정이다.

잘은 모르지만 지금 진심의 남자 판매 부수는 상당하다.

지금 현재도 계속 판매가 늘고 있으며,

만약 이대로 인기작품이 이어져 계속 연재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금액이 될 것이 분명했다.

뭐랄까, 여기 어시들 상당수가 그런 경희를 속으로 부러워할 게 틀림없다.

어시로서 아무리 월급을 잘 받는다고 해도, 저렇게 벌어들이는 돈에 비할 수는 없으니까.

다만, 이쪽은 재능이 상당히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 그저 그림의 떡 정도로 느끼고 있을 테지.

어쨌건 창작이라는 분야가 풀리지 않을 땐 돈도 안 되고 힘들긴 또 얼마나 더럽게 힘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 이것이 마냥 쉽게만 생각되지도 않을 거고.

하지만, 그게 풀리면 기술직이나 다름없는 어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돈을 벌게 된다.

만약 경희가 하나의 성공사례가 된다면 지금 화실에서 일하는 어시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줄 것이다.

나 역시도 이건 좋은 현상이라고 본다.

여기도 안정적이지만, 그래도 야심이 있다면 자신의 작품에 대한 욕심을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물론 이곳에 남아주면이야 그건 그거대로 고맙긴 하지만,

"이제 선생님처럼 스토리작가로 한발 내딛게 되는 거군요."

"에이, 아직은 모르죠. 아까 말했던 대로 일단 진행상황을 봐서 계속 같이 할지 말지 결정할 테니까."

그 말에 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애초에 진심의 남자는 그 양반 작품이고 넌 뒤늦게 참여한 거니까."

"그래도 상관없어. 그리고 너무 큰 기대도 안하고, 난 그냥 이런 기회가 생겨서 막 심장이 쿵쾅거리는 게 너무 설레."

"돈 얘기는 왜 빼냐?"

"헤헤."

내 말을 들은 경희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실실 웃는다.

그동안 황당한 이야기를 가끔 만들어서 당혹하게 하는 점은 있지만, 그래도 경희에게 나름 재능이 있다는 건 확실하다.

키도의 그 무식할 정도의 열혈도 나쁘지는 않지만, 지금의 일본은 그런 열혈물의 인기가 식어갈 무렵이다.

거인의 별로 폭발하기 시작한 덕분에 '스포츠는 열혈이다'라는 공식이 아다치 미츠루의 터치로 깨어진 상황이지 않은가.

'모자라는 능력을 기백으로 커버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점점 힘을 잃고 있는 것이다.

그런 키도의 이야기에 경희의 좀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병맛센스가 어떻게 작용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생각해 둔 이야기는 있어?"

"있지. 전에 이야기에 참여하고 나서 재밌는 게 많이 떠올라서 상식이 오빠랑 콘티 공부할 때 이것저것 많이 써 뒀거든."

그렇게 말하던 경희가 날 보며 갑자기 거만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왜?"

"오빠, 이제 남매고 뭐고 진검승부야."

그 말에 주변 사람들이 호응을 보인다.

"드디어, 가족 간에 혈투가 벌어지는 건가요?"

"이런 건 구경해줘야지."

"맞아요. 흥정은 말리고 싸움은 붙여야죠."

"반대 아니야?"

"아, 그런가?"

"아무튼 경희 양, 응원할게요."

"저도요."

"나도."

가만히 있던 실버까지 냉정하게 경희편을 든다.

그리고 보니 내 편은 아무도 없네.

그때 선희가 불쑥 이 자리에 끼었다.

오, 선희야. 역시 너 밖에…….

"……경희 파이팅."

"와, 역시. 선희 너밖에 없다니까. 이번 한번만 언니로 생각해 줄게."

"……원래 언니야."

"알았어, 알았어."

역시 쌍둥이들은 한 몸이라는 거군. 씁.

*

며칠 후, 키도에게서 소포가 도착했다.

당연히 경희에게.

경희는 노트에다 커다란 스티커로 '일급비밀문서'라고 써놓고는 누구도 못 건드리게 한다.

"야, 그게 무슨 군사기밀이냐? 적당히 해라."

내 말에 귀를 손가락으로 막으며 말한다.

"경쟁자의 말은 듣지 않을 거야."

"야, 경쟁자는 무슨."

"안 들어."

"……그래, 알았다."

마치 첫 임무를 맡은 요원 같은 분위기랄까.

의욕 넘치는 신입초짜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의욕이 때문인지 굉장히 적극적이다.

틈틈이 고민하고, 준모랑 놀아줄 때도 뭔가가 떠오르면 '아, 메모' 이러면서 뭔가를 적는다.

그리고는 저녁시간에 금방 집에 가지 않고, 고민하며 책을 뒤적거리기도 한다.

그것도 모자라, 가끔 선희에게 뭔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그림으로 그려달라는 부탁도 한다.

그리고 그림들을 모아 구상도 하고, 그동안 나온 진심의 남자를 몇 번씩 읽으며 이야기흐름도 파악한다.

어쨌건 원작의 느낌도 최대한 가져가면서 스토리를 만들어가려는 모습을 보니, 그래도 제법이다 싶다.

그렇게 며칠을 매달린 스토리를 정리복사해서는 일본으로 소포를 보냈다.

어떤 스토리일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일단 연재물을 보고 판단하기로 했다.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하려는 마당에 내가 너무 나서는 건 좋지 않으니까.

그리고 얼마 후 키도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러자 다시 경희와 긴 이야기가 오간다.

"아니, 무작정 열혈만으로 밀어붙이지 말고, 치바 료를 잘 활용하라니까. 응, 응. 그러니까 남자는 얼굴이 생명이지. 그래도 열혈도 좋으니까. 응."

"치바 료가 솔직히 얼굴은 좋은데, 남자로서 매력이 좀 떨어지잖아. 그러니까, 그런 대사가 중요하지. 응, 아니. 느끼한 게 아니라니까. 그건 멋진 거고."

통화내용이 격렬하다.

보나마나 키도와 경희의 의견에 충돌이 생기는 지점이 많은 거겠지.

그런데 길어지던 통화가 끝나갈 무렵이 되자 뭔가 분위기가 달라졌다.

경희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우울하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때문인지 화실 어시들도 슬슬 그런 경희를 힐끔거리며 말없이 작업에만 몰두한다.

화실이 분이기가 팍 가라앉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딸깍.

수화기를 내려놓더니 경희가 자신의 콘티노트를 묘한 얼굴로 내려 보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일단 보류래."

그렇게 말하더니 아차하며 손바닥을 딱 친다.

"숙제를 깜빡했네. 내 정신 좀 봐."

그렇게 말하며 노트를 들고 서둘러 화실을 빠져나간다.

그리고 발걸음 소리가 거실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는 게 들린다.

화실 사람들이 별말 없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는데, 그때 실버가 입을 열었다.

"바쁘니까, 작업 서둘러야지."

그 말에 모두가 움찔하더니 곧장 작업에 몰두한다.

그런데 그때 데생을 하던 선희가 머리를 들더니 천장을 한번 올려다본다.

뭔가 쌍둥이라 통하는 것이 있는 걸까?

그 모습을 보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미닫이문으로 되어있는 중앙의 방들을 지나치려하는데 그때 문이 열려있는 곳이 보인다.

그리고 그 방안에서 경희가 머리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어깨를 약간씩 들썩이고 있다.

"……."

처음으로 의욕을 가진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서 기가 좀 죽은 모양이다.

추구하는 성향이 다르니까 어쩌면 당연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중요한 시점이다.

이것을 이겨내면 한 단계 성장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불화로 스토리고 뭐고 다 나가리가 될 거니까.

잠시 동안 문 앞에 서 있다가 조용한 발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잠시 후 화실에서 모두 어색한 얼굴로 작업을 하고 있는데, 경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이마에 엄마 머플러를 감고 있다.

"아싸!"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자, 어시들이 모두 깜짝 놀라 경희를 바라본다.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그런 모습들을 둘러보던, 경희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아자자! 모두 힘냅시다!"

그 말에 모두 웃으며 호응했다.

"힘내요!"

"맞아요, 힘내요. 우리."

실버도 피식 웃더니 다시 그림에 열중하기 시작한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쭉 둘러보던 경희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받아줄게."

"뭔 소리야? 뭘 받아줘?"

"오빠의 도움말이야. 내가 아직은 쬐금 부족하니까 받아주겠다고."

경희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온다.

"……그게 도움을 청하는 인간의 자세냐?"

"자자 이거부터 좀 도와줘."

그렇게 말하며 콘티노트를 살랑살랑 흔든다.

"얌마, 얼렁뚱땅 넘어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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