숟가락 얹기 (2)
갑작스런 전화에 얼떨떨해 했지만 막상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런 감정은 금방 사라졌다.
-…….
"네. 안녕하세요."
-…….
"아뇨, 괜찮습니다. 오히려 제가 영광인데요."
민폐라니, 지금 내 기분은 찢어지고 있는데.
-…….
"좋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사람, 입에도 꿀을 발랐구나.
아무튼 그렇게 간단한 인사를 주고 받고난 뒤 그가 본론을 꺼냈다.
그의 이야기를 한참 듣고 나서 내가 입을 열었다.
"네. 저도 계속 읽고 있어요. 네. 하지만, 독자들은 아무리 과거의 대작을 낸 사람이라도 냉정하게 평가하죠, 그러니까,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네, 네."
지금은 드래곤볼이 연재를 시작한지 두달가량이 좀 넘었을 시기다.
진행된 내용이라고 해봐야 이제 겨우 야무치를 만나는 이야기정도까지 진행되었을 거다. 잠시 후면 우마왕이 있는 프라이팬 산으로 갈 테고, 원래 드래곤볼은 처음부터 서유기를 기반으로 사토미팔견전의 구슬이라는 설정을 빌려와 만든 일종의 모험 개그물로 시작된 만화다.
그런데 드래곤볼은 닥터슬럼프와 달리 초반의 인기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그리고 당장은 이런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닥터슬럼프의 대성공으로 애니메이션화가 결정된 마당이라 어쩔 수 없이 연재가 진행되게 되어있는 상황이다.
대략 2권의 중후반에 등장하는 피라후 파트부분부터 약간씩 드래곤볼의 분위기가 변해가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3권부터 시작되는 무천도사 수련, 그리고 천하제일무도회부터는 인기가 폭발하게 된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그러나 그런 사실을 미리 알 수는 없는 부분이니까, 지금은 분명 힘든 시기다.
-…….
"네. 그렇죠. 뭐."
도움을 바라는 전화는 아니었다.
그저 힘들어서 푸념을 하고 있을 뿐, 자신이 첫 작품을 대박쳤기 때문에 차기작에 대한 심적인 부담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만약 그가 도움을 청했다고 해도 사실 난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다.
어차피 그는 대작을 만들어 낼 테니까.
그저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란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아니면.
"담당이신 토리시마 씨는 유능하신 분이니까 대화를 많이 하시면……."
정도의 얘기를 해줄 뿐이다.
-……?
"……아, 저도 들은 얘기입니다. 제법 유명하신 분이시더군요."
내가 담당인 토리시마까지 알고 있는 게 신기한 모양이다.
나중에야 드래곤볼 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긴 하지만, 지금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
가끔 지식이 너무 많은 것도 부담스럽다.
차라리 몰랐다면 좀 더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는 게 가능할 텐데.
미래에 너무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면 정말 나와야 할 명작이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니까.
아무튼 대충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다 전화를 끊었다.
딸깍.
국제전화로 잡담이나 하다니.
전화비가 엄청 나올 텐데.
하긴, 몇 년 전엔 일본 납세자 10위안에 들어간 인물인데, 내가 지금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건지.
전화를 끊고 나자 주변 사람들이 내게 몰려들었다.
모두 빨리 이야기를 해보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대부분 일본어를 모르니 내가 무슨 얘기를 그렇게 떠든 것인지 궁금한 모양이다.
실버도 자세한 내용을 알기위해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 노려본다.
말 안하면 저 인간이 날 죽이겠지?
궁금해 하는 화실식구들을 향해 내가 입을 열었다.
"고민이 많아서 지금 좀 힘든가 봅니다."
"고민이라뇨? 일본 최고 만화가중 한명이잖아요."
내 말에 놀란 표정의 박소미가 말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번 만화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성적이 나오지 않으니까요."
"지금 성적이 어떤데요?"
"15위정도."
"정말요? 연재하는 만화 20개 정도 되지 않나요?"
"18개 정도 일겁니다."
내 말에 이번엔 박상식이 나섰다.
"그 정도면 굉장히 위험하지 않냐?"
그 말에 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위험한 정도가 아니라 절망적이라고 할 수 있지."
물론 보통의 다른 만화였다면.
하지만 드래곤볼은 조금 사정이 다르지.
애니메이션 제작이 결정된 상황이거든.
"그래서 그 사람이 도와 달라고 하든?"
"아니, 그냥 이야기 할 만 한 사람이 필요했던 모양이야."
"출판사의 담당이 있잖아. 제일 친하지 않나?"
"친하기는 한데, 좀 어렵기도 한 모양이야."
"담당이 어렵다고? 왜?"
박상식은 내 말을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명 때 자신을 발탁한 편집자야. 그런데 1년 동안 500장 정도의 원고를 퇴짜놓았을 정도로 깐깐한 성격이고."
그 말에 어시들도 놀란다.
"편집자라기보다는 혹독하게 훈련시킨 군대의 조교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그 말에 실버가 얼굴을 찌푸린다.
저 표정은…….
역시 군대생활이 떠오른 걸까?
이 시절 군대는 좀 심하게 빡셌겠지?
"대단하다. 그걸 다 진짜 견뎌낸 거야?"
"그렇게 해서 나온 만화가 바로 데뷔작이자 출세작인 닥터슬럼프."
그야말로 강철 멘탈이라고 밖에 할 수 없지.
"그냥 데뷔작을 터트린 천재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네. 편집자가 그만큼 혹독하게 했는데 그걸 견딘 만화가도 대단하다."
"천재는 오히려 선희나 윤환이 쪽이지. 한국 사람이 별다른 경험도 없이 일본에서 데뷔했으니."
실버의 말에 모두 납득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인다.
내 입장에서야, 진짜 천재는 선희라고 생각하고 있다.
애초에 나야 미래에서 온 덕후일 뿐이고.
"그래서 뭐라고 얘기 했는데?"
"그냥, 담당편집자가 유능하니까, 그 분이랑 토론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전에도 닥터슬럼프를 성공시킨 적이 있으니까."
"그나저나, 그런 대단한 사람이 힘들다고 너한테 전화를 걸다니. 놀랐다. 놀랐어."
나야말로 진짜 놀랐다.
지금도 대단한 만화가지만 앞으로 더욱 전설이 될 만화가랑 이렇게 개인적으로 통화를 하게 될 줄 어떻게 알았을까?
미래의 나였다면 심장이 멈춰버렸을지도 모른다.
그저 사인 한 장만 받아도 감격했을 테니까.
그런데 한편으로는 참 신기하다.
이런 대화는 정말 상상도 못했는데, 막상 대화를 하고 보니 그냥 아는 형이랑 대화하는 것처럼 편한 느낌이라니. 아니, 그보다 그런 사람이 삼사라를 그렇게나 인정하고 있으니 뿌듯하기도 하고, 좀 부끄럽기도 하다.
그런데 며칠 후, 토리야마 선생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그는 지금 담당인 토리시마 씨랑 앞으로 전개에 대해서 고민 중인데 쉽지 않다고 한다.
마냥 개그물로만 끌고 가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판단이 서긴 했지만 앞으로 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는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는 말도 했다.
자신이 그토록 하고 싶었던 새 작품이었음에도 너무 결과가 안 좋아 실망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닌 모양이다. 애니메이션만 아니면 연재를 끝내고 새로운 스토리를 구상하고 싶다는 얘기도 한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는 거겠지.
물론 내가 할 일은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전부다.
아무튼 그렇게 며칠간 전화를 주고받다.
보니, 나름 친분도 은연중에 쌓여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형, 동생처럼 가까워졌다.
지금 토리야마 아키라의 나이는 한국나이로 31살. 일본나이로는 29살이다.
내가 지금 23살, 일본나이로 21살이니까 8살 차이다.
아무튼 그렇게 친분이 쌓이다보니, 말도 자연스럽게 놓게 된다.
-…….
"그래도 너무 집에만 박혀 있으면 형수님이 좋아하지 않을 텐데."
이제 결혼한 지 3년도 안된 신혼이라 괜찮기는 하겠지만, 한참 깨가 쏟아질 시기에 너무 만화에만 몰두한다고 하니 안쓰럽기도 하고, 만화가 출신의 부인이 도움을 많이 준다고 하니, 그것도 뭐 행복이려나.
사실, 닥터슬럼프를 혼자 그리던 시절엔 배경인 펭귄마을은 늘 맑은 날씨였다.
고 한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난 뒤부터 비도 오기 시작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그러니까 부인이 그림을 도와주기 시작한 이후인 것이다.
그런 건 어찌 보면 헌터X헌터의 토가시랑도 비슷하다.
토가시의 와이프도 그 유명한 '세일러문'의 작가 다케우치 나오코다. 그리고 가끔 부인이 도와주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그림의 퀄리티가 올라간다고 하니까.
그러고 보니 만화가 커플이 은근 많구나.
아, 부러워.
-…….
"아니,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고."
-…….
"원고 빨리하고, 프라모델 만들어야 한다고?"
그러고 보니 이 형, 프라모델 광이었지.
나중엔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자동차가 실제로 제작이 될 만큼 메카닉에 관련해선 엄청난 덕후니까.
아무튼 가끔씩 이렇게 통화를 하며 지내다보니, 어느 샌가 많이 편해져버렸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 나가고 난 뒤. 며칠 후, 드디어 스토리에 대한 방향을 잡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북두의권 ?"
-…….
"역시 방향을 바꿨구나. 잘한 결정인 것 같네."
-…….
그래도 걱정이 많은 모양이다.
아무래도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배틀, 모험물로 방향을 바꾸었으니까.
하지만 나중엔 이게 신의 한수가 된다는 건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이제야 이 양반 전설로 한발 다가서게 되는구나.
-…….
고맙긴.
나야말로 영광이지.
며칠 후,
일본에서 소포가 날아왔다.
확인해보니, 드래곤볼 담당자인 토리시마가 보낸 거다.
의아해하며 소포를 뜯어보니, 소년점프 몇 권이랑 직접 쓴 편지가 있다.
[토리야마 선생님에게 도움을 주셔서 담당으로서 감사의 말씀을 대신 전해드립니다.]
토리시마가 쓴 글이다.
이봐, 당신들끼리 다 한 거야.
난 한 것도 없는데.
좀 미안한 생각이 든다.
소년점프는 2월 18일자 10호다.
표지는 오렌지로드의 주인공 남녀 세명이 있다.
이 만화 지금 한창 인기가 높을 때다.
소년점프의 가장 뒤쪽에 나온 차례의 순서로 보면 일단 순위…….
1위 명견실버.
2위 북두의 권
3위 근육맨.
4위 오렌지 로드.
드래곤볼이 6위다.
그런 게 그 옆에 있는 작가 후기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근래 힘들 때 텐겐 선생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정말 좋은 친구를 알게 되어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키라>]
아, 정말 이 사람.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왜 이렇게 써 놨지?
지금 이 순위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원래와도 거의 맞을 거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바뀐 건 없다는 거다.
그럼에도 한 것도 없이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것같이 되어버렸다.
그저 숟가락만 슬쩍 얹었을 뿐인데
"와, 우리 윤환이 대단하다. 순위가 절망적이었던 드래곤볼도 결국 살려냈구나."
이대봉이 놀란 얼굴로 나를 추켜세운다.
그러자 화실 식구들까지 덩달아 반응했다.
"요즘 자주 전화를 하시더니, 결국 인기 작으로 만드셨군요."
"혹시 닥터슬럼프 같은 히트작이 될까요?"
"에이, 그건 무리지. 아무리 그래도 닥터슬럼프는 너무 크게 성공했는데."
그런데 이 상황을 지켜보던 선희가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고는 다시 그림을 그린다.
너 까지 왜 그래?
"역시, 오빠가 손대면 망하는 작품도 살아난다니까."
경희야 사실 그건 아니란다.
그런데 조용히 있던 실버까지 나섰다.
"확실히 능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어."
아니, 그러니까 이건 원래 나하고는 관계가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