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49화 (149/425)
  • 소년 히어로를 넘어 (9)

    다음 날.

    만화방으로 갔던 박상식이 문제의 책을 빌려왔다.

    바로 삼사라 해적판.

    제목이 좀 충격이다.

    '멸망의 날' 이라니.

    좀비가 출현하고, 지구가 쑥대밭이 되는 이야기부터 시작되어서 되어서 이런 제목을 지은건가?

    하긴, 삼사라보다는 그저 쉽게 팍팍 이해되는 제목이 제일이긴 했을지도.

    시티헌터가 '도시의 욕망'이라는 제목의 성인만화로 나왔던 것처럼.

    물론 앞으로 미래의 일이긴 하지만.

    친미도 용소야였던가?

    책을 펼쳐보니 종이도 조악하지만, 베껴 그린 그림은 더 엉망이다.

    등장하는 배경 중 특히 복잡한 건 먹칠이나 대충 선으로 대체한 게 태반이다.

    거기다 대규모 군중 장면도 그냥 그리다 만 느낌이고, 하기야 퀄리티가 높은 그림인데, 그걸 베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경험자인 실버 말로는 장당 가격이 정해있으니, 최대한 간단하게 그리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물론 자신은 원작보다 더 나은 그림을 그리려 했다는 자부심 같은 게 있는 모양이지만, 그 때문에 또 이대봉에게 한소리를 듣긴 했지만,

    "와, 대단하다. 대단해, 도대체 이거 찍어낸 곳이 어디야? 황금출판? 이름이 아깝다. 아까워."

    박상식이 혀를 차며 투덜거리더니 곧장 뒤 장에 있는 주소를 살핀다.

    그 모습을 보고 내가 말했다.

    "그거 주소 가짜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때 실버가 끼어들었다.

    "그건 윤환이 말이 맞아, 대부분 가짜이야."

    실버의 말을 들은 박상식이 한숨을 쉬더니 곧 팔짱을 끼며 인상을 썼다.

    "이거 전에는 그런가했는데, 직접 당하니까 황당하긴 하네."

    "그냥, 잊어버려. 어차피 우리 만화는 공식적으로 일본만화야. 일본에서 출판되는 책이니까. 아직 한국에선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어."

    내 말에 실버가 동감하는지 머리를 끄덕인다.

    "그래. 그리고 정부에서도 이런 일에는 별로 관심 없어. 어쨌건 베껴 그리면 일단 만화로 인정해 주는 게 법이고, 하, 이거 참. 어이가 없네."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쉬던 박상식이 그림을 다시 살펴보며 짜증을 부린다.

    "그림이라도 좀 제대로 베껴 그리지. 이게 뭐야, 이게. 고급요리를 꿀꿀이죽으로 만든 것 같잖아."

    "거참. 비유가 적절하네."

    실버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사실, 이 시대는 해적판 말고도 문제는 얼마든지 있었다.

    현역 만화가들조차 자신의 오리지널 작품에 일본만화 장면을 무단 도용하여 그리는 게 흔하던 시절이었다.

    그것도 대본소용이 아닌, 만화잡지 연재에서.

    유명 만화가가 아키라의 장면을 그대로 베껴 그린다거나, 혹은 비너스 전기 같은 작품들도 얼굴만 바꿔서 연재잡지에 당당하게 만화를 올리던 그런 때였다.

    일본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다보니, 이런 식으로 그리는 게 흔했던 것이다.

    박상식에게 들은 말이긴 한데 예전엔 아예 외국만화책을 쌓아놓고, 이 만화 저만화 장면을 이어 붙이듯 그려 만화책을 출판한 경우도 있었단다.

    그러니까 만화책이 일종의 자료집으로 쓰인 것이다.

    이런 시대였으니 해적판을 내는 것이 그저 신호무시하고 건널목을 건너는 정도의 가벼운 일로 치부한 모양이다.

    이런 건 생각해봐야 방법도 없고,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 따위도 없다.

    그렇게 골치 아픈 생각을 멈추고는 시계를 쳐다봤다.

    "그나저나 오늘 준희가 안보이네?"

    점심때가 다 되어 가는데, 성준희가 아직 화실에 나오지 않아서 중얼거렸다.

    그러자 구자희가 대답한다.

    "아참, 오늘 늦을 거라고 아침에 전화 왔었는데, 제가 깜빡 잊고 말씀 못 드렸네요."

    "준희가요? 무슨 일 있어요?"

    "나쁜 일은 아니고 준모 때문에요. 오늘 유치원에 데리고 가서 거기 구경하고 온데요. 준모도 이제 여섯 살이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성준희가 유치원 얘기를 했었던 게 떠올랐다.

    입학 전에 미리 가족들과 함께 유치원을 방문한다고 했었지?

    올해로 준모가 벌써 여섯 살이 된다.

    성준희 말로는 처음엔 올해까지 돈을 조금 더 모아 내년부터 보내려고 했다는 데, 화실을 다니면서 조금 여유가 생겨 보낼 계획이라고 했던가.

    그리고 몰랐던 사실인데, 유치원 비를 선희가 개인 돈으로 해결했단다.

    나는 그쪽으로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다.

    물론 성준회가 번 돈으로도 충분할 테지만, 이래저래 집안 사정이 어렵다는 걸 감안해서 쌍둥이들이 의논해서 결정한 모양이었다.

    이미 선희의 통장엔 엄청난 돈이 있어서, 엄마가 따로 관리하는 모양이지만, 최초 의견은 경희의 입에서 나온 모양이다.

    경희는 은근히 이런 대소사 문제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전에는 박수미의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나에게 그 이야기를 해서 병원비를 해결한 적이 있었는데.

    어쨌건 이거……, 일종의 직장 복지 같은 건가?

    쌍둥이들이 이런 건 알아서 잘 처리하니까, 오빠로서 뿌듯하네.

    "준모 녀석 오늘 엄청 신나겠다."

    "안 그래도 요즘 준모가 유치원에 다닐 거라는 사실 때문에 매일 밤에 잠을 안 잔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겠죠. 처음으로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을 테니까."

    "친구들이야 동네마다 많죠. 그 나이 땐."

    "아."

    깜빡했다.

    내가 살던 시대와 달리 지금은 동네마다 아이들이 길거리에 많았다는 걸.

    온통 아이들이 모여 딱지나 구슬치기를 하는 모습도 흔했고, 특히 문방구 근처에 가면 정말 말 그대로 바글거릴 정도였다.

    물론 저녁 만화영화를 하는 시간이 되면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몽땅 사라지는 특징이 있지만.

    잠시 후, 대문이 열리며 성준희랑 준모가 나타났다.

    준모는 예쁜 모자에다 가방까지 메고 아주 신났는지 깡충거리며 마당을 가로질러 달려온다.

    그 모습을 본 경희가 거실에서 책을 읽다말고 뛰어나간다.

    "와아! 준모야!"

    "이모!"

    경희가 준모를 껴안고는 번쩍 들어 빙글빙글 돌린다.

    준모는 좋다며 깔깔거리고.

    하지만 그렇게 몇 바퀴를 돌리던 경희가 지쳤는지 헥헥거리며 준모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준모는 경희에게 매달리며 떼를 쓴다.

    "이모, 더 해줘! 더 해줘!"

    하지만 경희는 허리에 손을 올린채로 몸을 푹 숙이며 손을 흔든다.

    "안 돼. 이모 힘 다 떨어졌어."

    "내가 힘줄게. 얏!"

    준모가 손가락으로 경희에게 가리키며 소리치자 곧장 몸을 반듯하게 세운다.

    "오, 힘이 불끈불끈 하는데? 이만기처럼 힘이 막 솟아나."

    "이모, 이만기 되는 거 싫어."

    "그럼, 바야바!"

    "털 난 이모, 이상해!"

    "하하하. 바야바!"

    "하지 마!"

    이제 준모도 제법 많이 커서 꽤나 말을 또박또박 잘 한다.

    사실 화실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말수가 적고, 겁이 많은 녀석이었는데.

    아마 저 성격에 가장 영향을 끼친 녀석이 경희일거다.

    준모만 보면 딱 붙어 지낼 정도니까.

    어쩌다 성준희가 저녁까지 있을 땐 같이 화실에서 저녁 먹고 잠들 때도 경회가 돌볼 때가 많고, 자주 동화책도 읽어준 탓에 한글도 곧 잘 읽는 편이다.

    물론 미령이가 있을 땐 둘이서 노는 시간도 많다.

    어떨 땐 여기가 화실인지 사랑방인지 모를 정도다.

    성준희가 화실로 들어오자, 여자들이 몰려들어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준모의 유치원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던지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모습이다.

    그런 대화에 끼지 못하는 남자들은 그저 원고를 하거나 옆방에 가서 비디오를 볼 뿐이지만, 그때 엄마가 화실로 오신다.

    점심 준비를 하러 오셨는데, 그런 엄마도 점심준비는 잊으신 채 준모랑 유치원에 대한 수다 삼매경에 빠져버린다.

    그 모습을 보던 실버가 나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입모양으로 말한다.

    '짜장면 먹자.'

    준모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음식이 짜장면이다.

    짜장면을 먹을 땐 그렇게 행복해 할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오늘 준모 유치원도 구경하고 며칠 있으면 유치원에 입학한다니까 기념 삼아도 되겠지.

    나는 곧장 경희를 불렀다.

    "왜?"

    "중국집에 전화해."

    "어? 정말? 뭐, 시켜?"

    "오랜만에 깐풍기랑 탕수육 시키고, 각자 먹고 싶은 걸로"

    "야호!"

    경회가 양손을 번쩍 들며 좋아하자, 같이 있던 준모도 경희를 흉내 내며 소리친다.

    "야호!"

    "난, 짜장면!"

    "나도! 나도!"

    "준모 덕분에 제대로 먹어보자!"

    엄마까지 거들고 나선다.

    평소에 먹고 싶으면 그냥 드시지. 쯧.

    그렇게 점심을 중국요리로 거하게 배를 채우고 쉬는 동안 지로에게서 전화가 왔다.

    -3월에 뉴타입이라는 새로운 애니메이 션 잡지가 발간되는데, 거기서 지금 제작중인 삼사라 OVA 취재를 했다고 합니다.

    저희 쪽에서 취재요청이 들어오긴 했지만, 써니 작가님이 외부에 노출을 꺼려한다는 이유로 거절하긴 했습니다.

    깜짝 놀랐다.

    그리고 보니 뉴타입이 85년 3월에 창간한다는 걸 잊고 있었다.

    창간호는 4월호부터고.

    일본의 3대 애니메이션 잡지 중 하나이며 가장 늦게 창간한 잡지로 창간호 표지엔 '기동전사 Z건담'에 등장하는 '건담 M K2'로 기억한다.

    다음 달인 2월에 중전기 엘가임이 종방되고 난 뒤 3월에 토미노 감독은 '기동전사 Z건담을 제작하게 되는데 뉴타입은 건담을 주로 취급하게 된다.

    물론 신작 Z건담은 대박을 치게 되고, 덕분에 뉴타입의 인지도도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1986년 4월에 애증의 존재 FSS(파이브 스타 스토리)가 연재를 시작하는 잡지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런 대단한 잡지 창간호에서 삼사라를 취재하다니, 개인적으로는 영광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해도 지금 우리 입장에서 취재는 안 될 일이다.

    영광은 영광인거고, 지금은 어쨌건 앞으로 인지도를 더 쌓아야 하는 입장이다.

    "잘 하셨어요."

    -아, 그리고 다음 연재는 권두 컬러입니다. 이번에도 저번 작업을 도와주신 분에게 의뢰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던 지로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앙케이트에서 삼사라가 1위입니다. 그것도 압도적으로요. 축하드립니다.

    "그래요?"

    -네. 2위인 진심의 남자와도 제법 표차가 많이 나고요. 며칠 후에 나올 2권도 아마 소년 히어로 창간 이후 가장 많은 초판 부수가 결정될 것 같습니다. 일단 정해진건 아닌데, 아마 20만부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20만부."

    내 전화를 주변에서 듣던 화실 식구들이 환호했다.

    경희가 특히 요란하게 기뻐하자, 준모는 뭔지도 모르면서 따라 춤까지 추며 즐거워한다.

    사실, 삼사라는 꾸준히 단행본 판매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삼사라가 인기가 올라가면서 1권도 계속 증쇄를 하고 있었는데, 누적 판매부수가 30만부를 넘었다는 얘기를 며칠전에 듣긴 했었다.

    다크 프린세스의 영향이 아마도 가장 컸던 모양인데, 그 때문에 앙케이트 결과도 잘 나온 모양이다.

    파시엔시아의 경우도 1권이 나오고 그동안 15만부 정도 나갔다고 하니 그동안 제법 많은 양의 책을 팔아치웠다.

    물론 그 덕분에 적지 않은 돈이 들어왔고, 그래서 화실도 전보다 여유가 생겨서 급여도 조금씩 더 올렸다.

    아무튼 초판 20만부라니.

    뭔가 감동적이네.

    -삼사라나 파시엔시아 둘 다 예전의 소년 히어로 작품들을 모두 넘어섰습니다. 물론 현재 연재중인 진심의 남자 빼고요.

    지로도 상당히 감격한 모양이다. 음성이 떨릴 정도로,

    -선생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의 인사에 웃으며 대답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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