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48화 (148/425)

소년 히어로를 넘어 (8)

"매, 아니, 사장님. 어떻게 벌써 오셨습니까?"

"왜, 내가 빨리 오면 문제라도 있는 거야?"

사장의 되물음에 전무가 어색하게 웃었다.

"에이, 그, 그럴 리가요."

당황하며 대답하던 전무가 이사를 향해 눈짓하자 곧장 이사가 사장에게 인사를 하고는 나가려했다.

그러자 사장이 입을 열었다.

"아니, 자넨 그냥 있어도 돼."

"아, 네. 알겠습니다."

이사가 어정정한 자세로 주춤거리다 그냥 자리에 서서 있을 뿐이다.

그때 안으로 들어서던 사장의 뒤로 부사장과 소년 히어로의 편집장이 따라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편집장이 전무와 이사에게 인사를 한다.

"……."

순간 전무의 미간을 꿈틀거렸다.

갑자기 저 두 인간들을 달고 온 이유를 알 수 없어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물어볼 담력도 없다.

그저 속으로만 짜증을 부릴 뿐.

사장이 뒷짐을 쥔 채 안으로 들어서다.

얼굴을 찌푸리더니 손을 휘휘 내저었다.

"담배 좀 작작 피워. 환기도 좀 하고."

"아, 네."

전무가 서둘러 창가로 달려가 문을 활짝 열었다.

휘이잉.

갑자기 찬바람과 눈발이 들이닥치자 사장이 인상을 썼다.

"그렇다고 활짝 열면 어떡해! 조금만 열어, 조금만, 눈도 오는데."

"아, 네."

전무가 조금만 남겨두고 창을 닫고는 다시 소파 쪽으로 돌아왔다.

사장이 소파 중앙으로 가 자리를 잡고 앉자, 그제야 사람들이 주변으로 천천히 앉는다.

모두 앉고 나자 전무실 내부를 둘러보던 사장이 입을 열었다.

"여기가 내 방보다 더 낫네."

"하하. 설마요."

전무가 사장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전무를 바라보는 사장이 평소와 달리 표정이 밝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던 전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기분 좋은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뭐, 의외의 기쁨이랄까.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그 말에 전무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사장의 기분이 좋다면 혹시 들킨다고 해도 대충 넘어갈지도 모른다.

서둘러 입술을 핥고는 비위를 맞췄다.

"아, 그렇습니까? 역시 가셨던 일이 잘풀리신 모양이군요. 그래서 이렇게 일찍 들어오신 거고."

"아니, 그건 잘 안 됐어."

그 말에 전무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네? 그럼 어째서……."

"왜? 빨리 오면 문제 있어?"

"무슨 말씀을, 전 언제나 환영인데요, 뭐."

"넉살은….…"

그렇게 말하는 사장은 여전히 기분 좋은 표정으로 팔짱을 끼더니 전무를 향해 턱짓하며 말했다.

"너 때문이야. 너."

"네?"

"너 때문에 빨리 왔다고."

순간 전무와 이사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설마 사장의 귀에 이야기가 들어갔다는 건가?

사장을 따라 들어온 두 인간을 향해 슬쩍 흘겨본다.

저것들이 주둥이를 나불거린 건가?

잠시 생각하던 전무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게 , 사장님. 실은 오늘 확실하게 일을 처리했으니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염려? 무슨 소리야?"

"소년 히어로에 들어온 작가 때문이 아닙니까?"

"맞아."

"그러니까, 그 만화가 문제는 제가 확실히 처리를 했으니까……."

"처리?"

사장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전무는 빠르게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네. 뭐, 솔직히 돈값을 못하니까요. 그래서 서둘러 계약해지하고 5주안에 마무리 해달라고 통보를 했습니다."

그 순간 사장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5주안에 마무리, 통보?"

"네. 그러니까 염려하지 않으셔도……."

그 순간 사장이 전무의 말을 잘랐다.

"천천히 다시 이야기를 해봐. 아주 자세하게. 하나도 빼먹지 말고."

순간 이사는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눈치 챘다.

애초에 사장이 찾아온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알지 못한 전무가 수습한답시고 이야기를 꺼낸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이사가 전무를 슬쩍 건드리며 그를 말렸다.

"저, 저기, 전무님………."

"자네는 가만있어봐. 내가 사장님께 자세히 설명할 테니까."

"그게 아니고요."

"이 친구가 왜 이래?"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사장이 입을 열었다.

"전무, 자네가 그냥 계속 설명해."

"아, 네. 거봐, 사장님께서 나더러 설명하라 시잖아."

"……."

전무의 말에 이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상황이 예상이상으로 악화되지 않기만을 빌 뿐이다.

"솔직히 큰 뜻은 없었고요. 그 인기 만화가라는 사람……, 저기 이름이 뭐였지?"

전무가 이사를 보며 말했지만, 이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잘……."

그때 편집장이 입을 열었다.

"니시다 유키 선생입니다."

"아, 그래. 그 니시다라는 작자 말입니다. 나름 제가 큰마음 먹고 힘들게 영입했는데, 돈값을 못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사장을 슬쩍 본다.

그러나 별다른 표정변화를 읽을 수가 없자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제가 더 이상 이대로 손해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곧장 계약해지를 통보했습니다."

"…… 계약해지를 통보해?"

"네.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셔도……"

그때 사장이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전무의 말을 끊었다.

"멍청한 놈."

"네?"

"그러니까, 네 말은 그 작가랑 계약을 해지해버렸다."

"……네."

눈치를 보며 대답하는 전무의 모습을 보던 사장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걸 지금 잘했다고 자랑하는 거냐?"

"아뇨, 자랑은 아니고……, 그러니까 회사에 더 이상 피해가 생기지 않게."

"계약해지한 게 피해를 줄이는 일이다?"

"……네."

"……."

"아, 아닌가요?"

사장은 더 이상 말을 섞기 싫다는 듯 곧장 편집장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

"자네, 당장 그 만화가에게 연락하고 찾아가. 그리고 계약해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무효로 하고 무조건 계약연장을 해. 앞으로 우리 잡지에서 계속 연재하게. 대우는 최고 작가 대우 해주고."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편집장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전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런 편집장의 모습을 보던 전무가 황당한 표정으로 사장을 돌아보았다.

"사,사장님. 어째서 계약해지를 무효로 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질문하는 전무를 보던 사장이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파묻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럼, 그렇지. 그런 네놈에게 기대한 내 잘못이다."

"네?"

"네 녀석이 모처럼 기특한 일을 했다고 해서 일부러 일정을 당겨 돌아왔더니만."

사장도 대략적인 건 측근을 통해 듣긴 했었다.

인기 만화가 한명을 데려오기 위해 거 금을 사용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좀 의아하긴 했었다. 삼사라의 작가에게 돈을 많이 들어간다고 길길이 날뛰던 놈이 어쩐 일로 저런 일을 했을까 싶었던 것이다.

물론 돈이 많이 들었다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사업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니까.

아니, 오히려 뭔가 회사를 위해서 하려는 것 같아 모처럼 정신을 차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날아온 소식.

주간소년 히어로의 판매부수가 늘기 시작했다는 것.

이젠 판매부수가 드디어 중견잡지 수준으로 올랐다는 소식을 듣자,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허구한 날 자신에게 욕만 먹던 놈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칭찬을 해주기 위해 직접 전무실로 찾아왔다.

그런데, 작가와 계약을 해지해버렸다고 한다. 그것도 당장 성적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제야, 이놈이 뭔가 꿍꿍이를 가지고 작가를 불러들인 것이고, 그것이 생각대로 이뤄지지 않자 서둘러 계약해지를 해버렸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하지만 아직 사태파악이 되지 않았는지 멀뚱거리는 눈을 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전무를 보다 짜증이 치밀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련한 놈! 오늘부로 전무자리 내 놓고 집에서 대기해."

그 말에 깜짝 놀란 전무가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가,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뭘 잘 못했는지, 집에 가서 생각해 보라고!"

그렇게 말한 사장이 곧장 부사장에 말했다.

"가지."

"네."

사장이 자리를 박차고 전무실을 빠져나가자 허망한 눈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전무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

***

"와, 중원요리왕 재미있는데?"

"그렇지?"

이대봉이 어깨를 삐죽 세우며 거들먹거린다.

"일본에서 판타지 소설이 많이 나온다고 하길래 담당에게 부탁해서 좀 읽었어. 그런데 제법 재미있는 게 많아서 그걸 만화에 응용한 거지."

음식을 아이템 화 시키는 전략은 제대로 먹혔는지, 며칠 전에 파시엔시아를 누르고 다시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단다.

중원요리왕이 이렇게 자리를 잡아가니 이대봉도 기분이 좋은지, 더 열심히 스토리 소재를 찾아 이태원과 명동의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책들을 찾아다닌다.

한국에서 발행되는 책으로는 자료가 될만한 것이 부족해, 일본잡지나 미국잡지들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다. 거기다 부족한 건 담당인 야지마에게 연락해 부탁하는 모양이고,

"야, 실버. 어때? 내 실력."

"……스토리보다 그림이랑 연출이 좋았던 거 같은데."

"야, 실버. 스토리가 좋아서 그런 거야, 스토리가."

"누가 나쁘데? 하지만, 그림 역할도 컸다는 거지."

"편협한 사고에 빠진 그림쟁이 녀석."

"누가 편협하다는 거야? 지금 네가 하는 말본새를 봐라. 누가 더 편협한가."

"우 씨. 알았어, 알았어. 말실수 인정할게."

그렇게 말하며 물러난다.

어차피 실버를 상대로 정신승리하기란 쉽지 않다.

찔러봐야 통하질 않으니까.

그런데 뭔가 생각났는지 이번엔 다시 내게로 다가와 말한다.

"아참, 나 재미있는 거 봤는데."

"……?"

"아침에 만화방에 들렀다가, 삼사라 봤어."

"뭐?"

순간 이해를 하지 못했다가 그제야 지금 시절엔 해적판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해적판?"

"어. 그런데 말이야, 삼사라 2권 아직 안 나왔지?"

"맞아. 조만간 출판될 거야. 그런데 그건 왜?"

"황당하게도 2권까지 나왔더라. 내가 살펴보니까, 연재분을 구해서 그것까지 베껴 그렸더라고."

"……."

설마 했는데, 결국 우리 만화까지 해적 판으로 나오고 말았다. 그것도 2권은 일본보다 더 일찍.

"말도 안 돼! 그거 불법 아니야?"

언제 들었는지 화실에 들어온 경희가 펄쩍뛰며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불법 맞아."

"그럼 고발해야지."

"고발해봐야, 안 사라져. 거기다 만화책에 있는 주소는 가짜인 경우가 많고, 경찰도 굳이 별로 나서지 않아."

"그럼 어떡해? 방법이 없어?"

"없어."

지금 시대엔 일본과의 문화교류가 활발하지 않던 시기다.

일본 만화책이 제대로 수입되기 시작한 때가 1998년, 그것도 한 번에 다 이뤄지지도 않았다.

어쨌건 그것도 앞으로 13년 후에나 일어날 일이니 지금으로서는 그저, 손 놓고 있을 뿐이다.

"설마 우리가 해적판의 표적이 될 줄 어떻게 알았겠니. 이걸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이대봉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그리고는 실버를 슬쩍 바라본다.

실버는 여기 오기 전엔 유명 만화잡지출판사 소속의 해적판 만화가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대봉의 시선을 느낀 실버가 머리를 더 아래로 처박은 채 그림에만 열중 한다.

"누군가는 삼사라를 베끼며 실력을 쌓고 있을라나?"

"……."

"아, 나중에 부끄러운 기억이 될지도 모르겠네."

"……."

"오리지널을 만드는 사람으로서는 좀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넓은 마음으로……."

"그래, 알았다. 알았어."

"응? 뭘?"

"중원요리왕은 스토리 때문에 대단한 거 인정한다."

"어? 정말? 진짜, 그렇게 생각해?"

"그래, 인마!"

"아이고, 좋아라."

이대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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