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45화 (145/425)

소년 히어로를 넘어 (5)

지로의 전화를 받은 후 내가 앙케이트순위를 말하자 모두 환호했다. 그러고 나서 곧 박수미가 놀란 음성으로 말했다.

"에스퍼 존이라는 만화가 3위에요? 와, 확실히 인기 만화라 다르네요. 이렇게 되면 삼사라도 위험하지 않을까요?"

"맞아요. 단행본도 보니까, 그림도 엄청 좋던데."

박수미의 말에 구자희가 '에스퍼 존' 단행본을 손에 쥔 채로 맞장구 쳤다.

지금 어시들 각자 에스퍼 존의 단행본을 한권씩 펼쳐보고 있다.

몇 주 전 니시다 유키가 연재를 시작한다는 소리를 듣고 곧장 지로에게 부탁해 '에스퍼 존' 전권을 구입했다.

나야 예전에 이미 만화를 다 보기는 했지만, 화실식구들이야 처음일 테니까.

물론 그 이유보다는 선희에게 니시다 유키라는 만화가를 알려주기 위함이었지 솔직히 그림 하나만으로 따지자면 선회가 월등한 느낌이긴 하다.

순정 풍에 가까운 그림인데다가 연출로 비교해도 차이가 날 정도니까.

하지만, 그쪽은 우리와 달리 큰 팬덤이 형성되어 있다.

10년이 넘게 이어진 탓에 그 팬 층이 상당히 두터운 것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아직 연재를 시작한지 1년도 안된 신인이다.

인지도에서 차이가 크다보니 인기싸움에서는 분명 불리한 게 현실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유리한 점도 있다.

다른 곳도 아닌 앞마당에서의 싸움이다.

비록 에스퍼 존이 연재를 시작한 이후로 소년 히어로의 판매부수가 많이 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렇다는 건 새로운 독자들도 많이 유입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전체 독자 앙케이트가 아닌 소년 히어로의 독자엽서로 실시하는 앙케이 트다. 그렇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다 지금 삼사라 분위기는 상승세다.

뭐랄까, 어지간한 작품에는 지지 않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고나 할까, 아무튼 지금 기분은 그랬다.

그리고 결과도 그렇게 나왔고, 그나저나, 갑자기 에스퍼 존이 소년 히어로 쪽으로 넘어오는 바람에 내가 기억하던 것과 내용이 좀 달라진 상태다.

어디부터 바뀐 건지 정확히 기억은 할 수 없지만, 일단 바뀌었다는 건 분명하다.

아마도 주간 파이어에서 연재가 끝나던 시점쯤으로 예상되긴 하는데.

뭐, 그런 것까지 내가 고민할 이유는 없지만, 잠시 생각에 빠졌던 내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쪽은 좀 충격일거에요."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모인다.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아무래도 이번 앙케이트에서 1위를 기대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내 말에 정미자가 납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겠죠. 그만큼 인기를 끄는 작품이었다면, 소년 히어로 정도에선 1위하는 게 자연스러우니까."

"에이, 그래도 오자마자 1위가 쉽겠어?"

"대단한 잡지라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소년 히어로는 아직 인지도가 떨어지잖아."

"그렇긴 하네."

"역시, 똥개도 자기 앞마당에선 큰소리 친다더만."

"무슨……. 비유를 해도."

"헤헤."

어시들이 그렇게 떠드는 데 듣고만 있던 실버가 끼어든다.

"니시다 유키 쪽 사람들은 한 방 먹었겠네. 특히 그 전무라는 사람."

"맞아. 그 쪽 사람들 아마도 엄청 까이고 있을 거야."

내 말에 실버가 낄낄 웃었다.

"그럼, 계속 1위를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전무란 작자."

실버의 말에 모두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확실한 건 모르지만, 아마 좀 타격이 되지 않을까? 듣기론 이번에 니시다 선생데려오느라 돈도 제법 쓴 모양이던데."

"사장 처남이라지 않았어?"

"맞아. 평소에도 사장 눈치를 많이 본다던데."

"그럼, 그 양반, 이번 일이 잘 안되면 진짜 곤란하겠네."

"그럴 거야."

그렇게 말하며 주간히어로에 처음 연재된 에스퍼 존을 펼쳐보았다.

단행본으로 보는 거랑 이렇게 커다란 잡지로 보는 건 확실히 그림이 다르게 보인다.

노련한 만화가일수록 커다란 그림을 능숙하게 그리는 경향이 있어서 잡지에선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번 첫 연재분은 솔직히 이전에 비해 잘 그렸다.

대형 우주선의 디테일도 좋고, 캐릭터의 느낌도 입체감이 상당하다.

그럼에도 첫 연재에서 뭔가 특별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나름 첫 연재라고 40페이지나 되는 분량까지 할애했지만, 그저 주간 파이어에 연재하던 그 만화를 그냥 이어서 진행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첫 연재라면 한편 안에 기대감을 줄 만한 이야기를 넣어야 하는데, 이 사람은 그딴 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연재를 시작한 모양이다.

그냥 그림에만 몰빵한 기분이다.

기본적으로 B급 잡지 1위 따윈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러니까, 3위로 밀린 거지.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솔직히 첫 연재분은 실망이었다.

내가 기억하던 이야기 전개보다 더 나쁜 상황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재미없어."

새로 연재된 에스퍼 존을 보고 선희가 이렇게 말할 정도였으니까.

솔직히 개인적인 입장에선 제법 기대를 하고 있었다.

연재가 10년을 넘어가면서 내용이 조금 흐지부지 진행되고 있었고, 미래에도 초반 20권이 넘어가는 시점부터는 속된 말로 노잼이었으니까.

그래도 미래에서 본 내 감성과는 달리 아직은 인기작품이고 지금이라도 내용에 집중한다면 다시 예전의 인기를 찾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결과는 이렇게 나왔고, 개인적으로는 좀 아쉽기는 하지만, 뭐 프로의 세계는 냉정하니까.

곧장 소년 히어로를 덮고는 다음 연재분 콘티를 다시 펼쳤다.

"선희야. 이거 몇 장면만 다시 수정하자."

그 말에 선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알았어."

***

"선생님, 저 왔습니다."

테고시가 키도의 화실에 들어오며 인사했다.

그러자 키도는 머리를 원고에 고정시킨 채 데생에 집중하며 대답했다.

"어서 오게."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화실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테고시가 가방을 내려놓고 간식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테고시는 퇴근하는 길에 화실식구들이 가장 좋아하는 빵과 음료수를 사들고 온 것이다.

평소에도 저녁작업이 있을 땐 이렇게 간식을 종종 사들고 오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어시들의 저녁 간식을 준비하던 테고시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의외였어요. 당연히 에스퍼 존이 1위 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키도는 별일 아니라는 듯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의외는 무슨, 3위나 한 게 대단한 일이지."

"네?"

"난 그것보다 내가 1위가 아니라는 게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네."

"……?"

"이번 에피소드는 내가 생각해도 엄청 재밌었으니까."

그 말엔 테고시도 일리 있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아, 네. 맞아요. 안 그래도 독자엽서에 진심의 남자를 응원하는 글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은 정말 니시다 선생님이 1위를 못할 거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당연하지. 그 자식 첫 연재분 읽어보고 어이가 없었으니까. 그딴 만화에 질 정도로 내 만화가 물렁하진 않지."

그 말에 어시인 노무라가 입을 열었다.

"에이, 그건 아니죠. 이번 에스퍼 존, 엄청나던데."

"흥, 그래봐야 그림뿐이지. 이야기는 죽었어."

"어? 괜찮던데요?"

"관성이야. 관성."

"관성이요?"

"그래. 그냥 보던 거니까 보는 거. 사실상 이야기는 죽어있었다."

그 말에 다른 어시들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요 근래 에스퍼 존이 좀 재미가 떨어지긴 했어요. 예전같이 가슴이 두근두근 하는 그런 액션도 없고, 특히 파비안의 매력이 예전 같지가 않죠. 팬으로서는 좀 안타까운 일이지만."

"저도 에스퍼 존 어릴 때 많이 좋아했는 데, 지금은 그냥 그런 느낌이에요."

"에이, 그래도 에스퍼 존이잖아요. 우리 선생님하고 비교하기엔……."

막내가 그 말을 하려다 멈칫한다.

그림을 그리는 키도의 이마에 핏대가 선 것을 본 것이다.

화실 분위기가 싸해지자 어시들은 그냥 원고에 열중하고, 테고시도 간식을 정리 할 뿐이다.

그때 화실에 고소하고 군침이 확 도는 엄청난 냄새가 퍼져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키도의 부인이 웃는 얼굴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특제 스프에요."

그녀가 테이블 위에 스프를 내려놓으며, 말하자, 모두 긴장했던 표정을 풀었다.

인상을 쓰고 있던 키도의 표정도 단번에 풀어진다.

부인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가 가져온 특제 스프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쨌건, 하마터면 선생이 폭주할 뻔 했다는 생각에 모두 막내를 향해 인상을 쓰며 눈짓한다. 그러자 막내어시가 머리를 긁적이며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제가 도울게요, 사모님."

"어머,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며 접시에 스프를 담아 막 내어시에게 넘겨준다. 그러자 막내어시가 그것을 각자 책상으로 하나씩 나른다.

테고시에게 스프 접시를 넘겨주고 마지막으로 막내어시의 차례.

그런데 갑자기 키도부인이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어머."

"……?"

"스프가 모자라네. 이거 밖에 안 남았어요. 어쩌죠?"

반 국자 분량의 스프를 막내어시의 접시에 떠 넣으며 키도부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어쩐지 그녀의 눈빛이 무섭다.

순간, 막내어시의 동공이 흔들렸다.

키도부인의 특제 스프는 엄청나게 맛있다.

오죽하면 이거 먹으려고 야근을 한다는 말이 농담이 아닐 정도로, 그러자 순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접시를 몸으로 가리며 보호했다. 테고시도 그 맛을 아는지라 다른 어시들과 마찬가지 반응이다.

물론 키도는 당연한 거고,

그 모습을 본 막내어시의 표정이 울상이 되었다.

어쩌자고 쓸데없는 말을 해 버린 걸까?

자신의 주둥이를 콱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

쾅!

"이게 도대체 뭐야! 겨우 3위? 인기작가라고 하지 않았어?"

전무가 버럭 소리치자 닛타가 움찔거리며 머리를 푹 숙였다.

"대답해봐, 인기작 아니야?"

"인기작………. 맞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이 모양이야?!"

이번엔 책상 앞에 놓여있던 서류를 집어던졌다.

흠칫 놀란 닛타가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그리고는 머리를 숙이며 서둘러 말했다.

"저기, 이제 겨우 시작이라 아직 독자들에게 제대로 홍보가 안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보시면……."

"내가 시간이 많은 사람으로 보여?"

"네?"

"내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사정 봐줘야 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헛소리 그만하고 당장 가서 목숨 걸고 제대로 그리라고 해! 겨우 그딴 잡지 출판 부수나 올려주자고 거금을 들인 줄 알아?!"

"넵! 알겠습니다!"

놀란 닛타가 큰 소리로 대답하고는 서둘러 전무실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본 전무가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사장인 매형은 지금 미국에 출장 중이다.

한 동안은 일본에 들어오지 않을 거라는 얘기를 누나에게 듣자마자 일을 진행시켰다.

약간의 문제는 생기더라도 수습할 자신은 있었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압박해 일을 진행시켰고, 편집장과도 미리 약속까지 해 두었다.

하지만, 계획이 제대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일단 순조롭게 1위를 달성해 줘야한다.

그런데 처음부터 삐걱 거리고 있으니, 짜증이 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역시, 너무 일을 조급하게 서둘렀던 건 아닐까요?"

소파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이사가 조심스럽게 묻자 전무가 인상을 팍 썼다.

"시간이 없었잖아. 시간이. 그리고 이름있는 작가를 오는 게 어디 쉬운 일도 아니고, 그나마 데려올 수 있는 인간 중에선 그래도 가장 거물이었어."

"그렇긴 하죠."

"에이,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어. 이봐!"

전무가 소리치자 문이 열리며 여비서가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전무님?"

"시원한 우롱차나 가져와."

"네. 알겠습니다."

비서가 인사를 하고 나가는 모습을 보고나서야 자신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인기 만화가라더니, 이런 오합지졸 같은 3류 만화가들을 못 이기냐고,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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