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년 히어로를 넘어 (3) >
"이제부터 콘티를 좀 수정해볼래?"
내 말에 선희가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니 별다른 고민도 없이 머리를 끄덕인다.
"알았어."
"안 물어봐?"
"안 궁금해."
아. 이런.
왜인지 잔뜩 설명해 주려고 했는데.
그런데 엉뚱한 녀석이 그 질문을 해온다.
"왜 그런데?"
경희다.
하지만 난 들은 채 만 채 하며 곧장 선희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 어떻게 수정할 거냐면……."
"오빠, 너무하건 아니야? 난 궁금하다고."
"어. 그랬니?"
"그랬니가 아니지, 설명을 하라고, 설명을.
"방바닥을 손바닥으로 탁탁 때리며 강요한다.
"그냥 궁금하고 말면 안 되겠냐?"
"그게 되겠어?"
"에효, 알았다."
그제야 만족했는지 경희가 히죽 웃으며 천장을 향해 원투를 날린다.
"낮에 아카기 씨랑 통화를 했는데, 앞으로 3주후부터 '에스퍼 존'이라는 만화가 연재를 시작한데."
"에스퍼 존이 뭐야?"
"……이래서 내가 말하기 싫은 거라고."
"말하는데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좀 설명해 주라. 오라버니."
"……."
잠시 뜸을 들였다가 곧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자 경희가 '오, 오.'하며 감탄한다.
"그거 엄청 대단한 만화네, 돈도 많이 벌었겠다."
"많이 벌었지. 엄청. 거기다 10년 이상 장기연재니까. 인지도도 엄청나고."
"그러니까 그런 대단한 만화가 앞으로 소년 히어로에 같이 연재를 시작한다는 거네?"
"그렇지."
"그럼 잘된 일 아닌가? 실력 있는 만화가랑 경쟁하면 오빠나 선희에게도 좋은 일 같은데."
"그게, 네 생각처럼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란다."
내 말에 경희가 호기심을 보인다.
"뭔가 있구나?"
"있어."
"말해줘, 말해줘."
"지금 말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좀 입좀 닫아."
"아."
그렇게 말하더니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한다.
그 모습을 보고나서야 본론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 대단하다는 만화가 연재를 시작하고 나서 만약 5주 연속 1위를 하게 되면………."
대략적인 상황을 듣고 나자 경희가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버럭 했다.
"뭐야, 그게 무슨 상황이야? 지금 소년 히어로 엄청 잘나간다면서, 그런데 왜 갑자기 잡지를 바꿔?"
"우리는 그냥 연재 하던 대로 하면 되지. 물론 담당은 바뀔지 어떨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오빠는 그 일본 아저씨가 아닌 사람으로 바뀌어도 상관없어?"
"그건 아니지."
"그럼 오빠나, 선희도 관계있는 일이네."
"뭐, 따지고 보면 그렇지."
"따지고 보면 이 아니지. 그 일본아저씨 얼마나 좋은데, 오빠도 좋아하잖아."
그 말에 내가 피식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대로야."
"왜 윗대가리 아저씨들이 그런 결정을 내린 거야?"
"윗대가리라니 말 좀 순화해라."
"아, 미안. 아무튼 왜 그런데?"
"그건 나도 모르지.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사정이니까."
내 말에 다른 어시들도 끼어들었다.
"너무하네요. 그래도 일본은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맞아요. 그래도 선진국이라 좀 제대로 된 곳인 줄 알았는데."
"무슨 조선시대 당파싸움도 아니고."
그때 실버가 조용한 목소리로 끼어든다.
"그거야, 상관없는 일이지. 권력이란 자고로 인간들을 병신으로 만드니까. 그리고 일본이 선진국인건 맞지만, 그거야 경제에 관한거지."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실버 쪽으로 모인다.
하지만 실버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파시엔시아 인물터치에만 열중해 있다.
그때 조용히 있던 선희가 내게 말했다.
"오빠, 그럼 어서 콘티 수정해."
"아, 그래."
그리고는 선희의 콘티를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일단 전체적인 구성은 이제 굉장히 능숙해져 있다.
그동안 열심히 잔소리를 한 보람이 있을 정도로, 현재 연재를 위해 짜여 있는 콘티는 대략 100페이지 정도 분량이다.
연재로 치면 5회분.
물론 삼사라뿐만이 아닌 파시엔시아도 비슷한 분량의 콘티는 미리 만들어 두고 있다.
하지만 삼사라는 이제부터 대대적인 수술에 들어갈 예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콘티와 앞으로 전개될 스토리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너무 고민을 길게 하는 건 좋지 않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
이게 개인적인 생각이니까.
아무튼 한 번에 쭉 100페이지를 훑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극적인 느낌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너무 순탄하게 흘러간다는 건 다른 식으로 말하면 그냥 지루하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관성처럼 따라오는 독자들은 이건 이거대로 재미를 느끼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국 그게 다다.
"요즘 삼사라 스토리가 어때?"
내 질문에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던 선희가 입을 열었다.
"재밌어."
"바라는 건 없어?"
"있어."
"뭔데?"
"두근거리지 않는 거."
"두근거림?"
"응."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의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인가?
역시 선희도 재미는 있지만 극적인 부분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 그럼 두근거리는 내용을 넣어야지"
"나도 참전!"
갑자기 이대봉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 언제 온 거야?"
"아까. 네가 정신없이 이야기를 하길래그냥 조용히 있었지. 그런데, 네 이야기 듣고 나니까 나도 막 가슴이 뜨거워져."
"당신은 늘 뜨겁잖아. 그래서 제정신이 아닌 거고, 그러니까 적당히 식히라고."
"너무하네. 내 열정을 몰라주다니."
주둥이를 잔뜩 내밀던 이대봉이 곧 눈을 가늘게 뜨며 묘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사실은 말이야. 이번에 새로운 설정을 생각한 게 있는데 한번 봐줄래?"
"뭔데?"
"이거."
그렇게 말하며 콘티노트를 내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읽어보던 내가 깜짝 놀랐다.
"어? 이거."
"놀랬지?"
"……."
솔직히 놀랬다. 설마 요리만화라고 하더니 이런 식의 설정을 밀어 넣다니.
물론 처음 보는 방식의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지금이 1985년이고, 이런 식의 이야기는 굉장히 독특할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 우리 윤환이도 놀라는 구나?"
이대봉이 만족한 듯 웃는다.
진짜 이 인간은 한 번씩 사람을 놀래키는 재주가 있나보다.
***
"선생님, 그럼 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새롭게 담당이 된 소년 히어로의 닛타가 머리를 숙이고는 곧장 니시다 유키의 집을 나선다.
니시다는 그런 그를 힐끔 보다 곧 시선을 돌리고 그가 남기고 간 선물들을 내려다본다.
백화점 상품권과 각종 선물세트, 자신의 담당이라고는 하지만, 그저 전 무가 붙여준 끄나풀에 불과하다.
끄나풀이라고 하니까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어쨌건 담당 편집자라고 할 만큼의 인물이 아닌 건 분명하다.
애초에 자신을 소년 히어로 쪽으로 스카우트 할 때부터 전무의 목적은 오로지 한가지뿐이었으니까.
5주 연속 1위를 달성해, 편집장을 쫓아내고 잡지를 바꾸는 것.
이 황당한 계획을 들었을 땐 전무라는 작자가 좀 모자라는 인간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듣기론 요즘 소년 히어로라는 잡지의 판매부수도 상승하는 등 인기가 오르고 있는 모양인데, 그런 잡지에 있는 편집장이 자신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 그런 병신 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으니 말이다.
방금 자신의 담당이라는 그 팀장이 아마도 편집장이 되려는 모양이고, 하지만, 그런 건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은 그저 거금을 받고 이적한 것일 뿐이고 전 잡지인 주간 파이어와의 문제는 그쪽에서 해결해 주기로 했으니까.
방금도 그저 앞으로 열심히 해달라는 부탁을 하러 왔다가 이런 물건들만 잔뜩 가져다주고 갔을 뿐이다.
담당이라면 응당, 콘티라든가 앞으로 진행할 이야기에 대해 의논이라도 해야 할 텐데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었다.
훗.
니시다가 피식 웃었다.
하긴 이름도 없는 잡지에서 5주간 앙케이트 1위만 달성하면 자신이 할 일은 끝난다. 잡지 따위야 망하든 말든, 그저 자신의 만화만 그리면 될 뿐이다.
여기서 잡지가 망하면 다시 다른 출판사로 옮겨가면 그뿐이니까.
단행본이 여러 회사를 거치게 되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 때 초인종이 울렸다.
잠시 후 집안일을 담당하는 고용인 아줌마가 거실로 들어왔다.
"오오타케 씨가 찾아오셨습니다."
오오타케 야마다.
바로 주간 파이어에서 자신을 담당하던 편집자다.
"……."
"어떻게 할까요?"
"들어오라고 하세요."
"네."
곧장 그녀가 나가자 잠시 후 오오타케가 거실로 들어왔다.
그런 그를 니시다가 말없이 바라보다 곧 입을 열었다.
"이제 담당도 아닌데, 왜 찾아오는 거이야?"
"완결이 날 때까진 누가 뭐래도 제가 담당입니다."
"한심한 소리 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 이제 나랑 주간 파이어랑은 관계없으니까."
"전, 관계있습니다. 반드시 예전의 인기로 되돌려 놓겠다고 선생님께도 약속했고요."
그 말에 니시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젠 됐어. 그런 약속 따위. 이젠 자네 편집부로 돌아가. 더 이상 찾아오지 말고."
"에스퍼 존은 저랑 선생님이 만들어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선생님도 제 말에 동의하셨잖습니까."
"……다. 예전의 이야기 일뿐이야. 이제, 그러니까 포기해."
"제가 포기하게 해 주십시오."
"……뭐?"
"납득할 만한 이야기를 만드신다면 당장이라도 포기할 테니까요."
"고집은………. 마음대로 해."
***
무카이의 화실.
"어때?"
담당인 야지마가 무카이에게 복사된 네임노트를 내밀었다. 그러자 그것을 확인하던 무카이의 눈이 커졌다.
"어? 음식으로 몸을 일깨운다? 이거 무슨 아이템 같잖아?"
"그렇지? 제임스 씨가 이번에 보내준 네임은 정말 대단하더라. 이제까진 그저 엄청나게 맛있는 요리만을 만든다는 이야야기로 알았는데, 이 번 부터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요리가 등장했어. 이번 네임을 보는데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더라고."
"이거 굉장히 좋아. 이번화도 그릴 맛이 나겠는데요? 주자웅이 단순히 요리만 잘한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는데."
"그래도 주인공이잖아. 특별해야지."
"하긴. 그나저나 혹시 이번 이야기, 니시마 선생 때문?"
무카이가 묘한 표정으로 야지마를 바라보자 그가 피식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단번에 생각해낼 수는 없을 걸? 아마 미리 생각해둔 이야기가 아닐까?"
"그렇겠네."
무카이가 납득을 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키도 선생님의 화실도 다시 1위를 탈환하겠다며 난리래. 스토리의 방향에 대해서도 다시 고민을 하는 모양이더라."
"키도 선생님이야 원래 스토리를 미리 만들어 두는 타입도 아니잖아. 애초에 뜯어 고치고 말고 할 것도 없을 거야. 아마도 다시 그 열혈모드가 발동한 거겠지. 물론 그게 키도 선생님의 무서운 점이기도 하지만,
"담당인 테고시도 그러더라. 키도 선생님 한번 열 받으면 이야기가 엄청 재밌어진다고, 무슨 분노의 힘으로 만화를 그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며 야지마가 웃자 무카이도 따라 웃었다.
"그건 맞는 말. 나도 어시 생활할 때 불가사의 했다는 거 아뇨. 낄낄."
"이번엔 나도 1위 한번 노려볼까? 다음 주부터는 괴물 작가가 등판할 테니까. 이번 주가 1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잖아요."
"그래. 한번 해보자."
"오케이!"
***
2주 후,
주간소년 히어로 편집실.
"앙케이트 나왔어요!"
"나부터 줘!"
"빨리 줘!"
직원들이 서로 앙케이트를 확인하려고 달려든다.
지로도 앙케이트 순위표를 확인하기 전에 심호흡부터 했다.
그리고는 펼쳤다.
1위…….
삼사라.
지로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