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년 히어로를 넘어 (2) >
"앙케이트입니다."
"아, 고마워요."
직원이 내민 앙케이트 결과표를 지로가 받아들었다.
그리고 서둘러 결과를 확인했다.
1위는…….
삼사라다.
짝!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치고는 주먹을 불끈 쥐며 웃었다. 그러다 근처에 있던 테고시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아."
약간은 무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테고 시는 그저 웃으며 "축하해요."라는 말을 전한다.
하지만 테고시의 눈빛에 아쉬움이 남아 있다.
이번에야말로 진심의 남자가 파시엔시아를 이겨 1위를 탈환할거라 믿었는데, 엉뚱하게 삼사라에게 그 자리를 내어준 것이다.
"키도 선생님이 이번엔 자신 있다고 하셨는데, 좀 아쉽네요. 그래도 파시엔시아는 이겼으니까."
몇 주 동안 진심의 남자를 2위로 밀어냈던 파시엔시아를 이겼지만 다시 2위다.
그래서 그 아쉬움이 더 했다.
이번에도 1위를 하지 못했으니까.
그때 야지마가 찌푸린 얼굴로 그들 대화에 끼어들었다.
"야, 테고시, 배부른 소리마라. 너 그러다 다른 직원들에게 욕먹어."
그때야 주변 직원들이 힐끔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다.
"아, 죄송합니다."
"솔직히 나도 4위라 좀 아쉽기는 하다. 중원요리왕도 이번에 엄청 재밌었는데, 너희 둘이서 담당하는 세 작품이 너무 막 강하니까. 비집고 들어가기가 힘드네. 망할 인간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직원들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도, 야지마 씨는 3위라도 가봤지. 우리는 애초에 4위까지는 제쳐두고 5위쟁탈전을 벌이고 있잖아요."
그 말에 야지마가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하하하."
"야, 너무하네. 방금, 남 생각도 좀 하라더니."
"그랬나? 기억이 안 나서."
"뭐야? 금붕어에요? 왜 그렇게 금방 잊어버려?"
"하하하."
그렇게 직원들이 떠드는데 말끔하게 차려입은 여직원이 편집부로 들어온다.
깔끔한 블라우스 차림의 여직원은 누가 봐도 회사 중역의 비서쯤으로 보인다.
그런 그녀가 편집장의 자리로 다가가더니 조용하게 뭔가를 이야기하자 편집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곧장 여자를 따라 편집부를 나선다.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직원들이 수군거렸다.
"어디 비서지?"
"전무님 비서 같은데?"
"전무님? 전무님 비서가 왜 편집장님을 데려간 거야?"
"또 전무님이 뭔가를 걸고넘어지려는 건 아닐까?"
"진짜, 그 인간은 정말 왜 우리 편집장님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그 말에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은 직원이 입을 열었다.
"우리 편집장님은 부사장님과 연결되어 있잖아. 그러니까 그러지."
"젠장. 짜증나."
직원들 간의 대화를 듣던 야지마가 혀를 차더니 지로에게 말했다.
"커피나 한잔 하자. 아래 1층 자판기 커피가 맛있더라."
"그러죠."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야지마가 말했던 자판기 앞으로 걸어가는데, 소년 히어로 편집부 소속의 팀장 한명이 30대 초반의 턱수염 남자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 닛타 팀장님 아니에요?"
"그러네?"
"그런데 같이 있는 남자는 누구죠?"
야지마가 그곳을 잠시 바라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한다.
"어?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인데?"
"선배, 아는 사람이에요?"
지로의 질문에 야지마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낯은 익은 게 맞는데 누군지는 기억이 안 나네."
그렇게 말하고는 어깨를 으쓱하는가 싶더니 곧 뭔가가 떠오른 표정이 되었다.
"아."
그리고는 곧장 아까 들어갔던 엘리베이터 쪽으로 시선을 보낸다.
그 모습을 보던 지로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혹시 생각났어요?"
"그래."
"누굽니까?"
"에스퍼 존을 그린 니시다 유키야."
"에스퍼 존요?"
그렇게 말한 지로가 잠시 생각했다가 곧 눈이 커다랗게 떠지며 물었다.
"주간 파이어에 연재중인 그 만화요?"
지로도 순간 떠올랐던 것이다.
70년대 초반부터 청년지인 주간 파이 어에서 연재중인 SF만화.
동인지부터 시작한 만화였는데, 주간 파이어의 편집자가 발굴해 연재를 시작해 현재까지 연재를 이어오는 인기 만화다.
"그래, 연재가 아마 10년이 넘었지?"
"네, 30권이 넘게 나왔을 겁니다. 지금 애니메이션도 나올 거라는 얘기가 있던데."
"맞아."
"그럼 니시다 선생님이 혹시 소년 히어로에서?"
"설마, 그래도 인기잡지에서 연재하는 분인데."
"그런데 좀 찝찝하네요."
"그러게. 왜 하필이면 닛타 팀장이랑 들어오는 거지?"
그러다 뭔가를 떠올렸는지 야지마의 눈이 커졌다.
"설마, 니시다 선생, 전무랑 관계있는거 아니야?"
"앗!"
닛타 팀장은 소년 히어로의 팀장을 맡고 있는 네 명의 팀장 중 한명이지만, 그가 전무의 사람이라는 건 알 만한 사람은다 아는 이야기다.
그런 닛타 팀장이 니시다 선생을 개인적인 친분으로 데려왔을 리는 없지 않은가?
거기다 아까 편집장이 전무의 비서를 따라 간 것도 보았으니, 뭔가 찝찝한 생각이 든 것이다.
"젠장,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 그 너 구리가 이번엔 또 뭐로 편집부를 괴롭히려고 하는 건지."
"……제발, 예상이 빗나갔으면 좋겠는데요."
"쯧."
***
키도가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버럭소리쳤다.
"니시다? 그 또라이 녀석이 소년 히어로에?"
"네. 혹시 니시다 선생님을 아세요?"
테고시의 질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뭐, 예전에 같이 동인지를 그렸으니, 잘 알고 있지."
처음 듣는 이야기에 테고시가 깜짝 놀랐다.
"어? 정말이세요? 같은 동인지요?"
"그래."
"얘기 좀 해주세요."
잠시 표정을 수습하던 키도가 곧 입을 열었다.
"뭐, 녀석이야 동인지를 그리던 만화연구회 시절부터 잘나간 녀석이지. 특히 SF에 재능이 있어서, 대학시절부터 잡지사 편집자들이 찾아오곤 했었거든."
"오, 역시 그랬군요."
"그런데 그 놈이 왜 갑자기 소년 히어로에서 연재를 시작한다는 거지? '에스퍼존'이라는 만화 아직 연재 중인 거 아니었어?"
"네. 그런데 요즘 주간 파이어에서 순위가 밀린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이번에 저희 쪽에서 에스퍼 존을 이어서 연재를 하는 모양입니다."
그 말에 키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참, 많고 많은 잡지 중에서 왜 하필 소년 히어로지?"
"그게……. 듣기론 전무님이 손을 쓰신 모양이더군요."
"전무라니, 미쯔다쇼텐의 전무?"
"네."
"오, 그 양반이 소년 히어로에 유명 작가를 더 끌어 모아서 인기잡지로 만들려는 건가?"
"아뇨, 그런 건 아닌 모양입니다."
테고시의 말에 키도가 미간을 찌푸린다.
"아니라니?"
"제가 알기론 전무님이 편집장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니까요."
그 말에 키도가 알겠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뭐야, 파벌싸움인가? 그럼 니시다 그녀석 좋은 뜻으로 온건 아니라는 거군."
"네. 편집장님과 담판을 지었답니다."
"담판?"
"네. 미쯔다쇼텐에서 새로운 소년지를 만들려는 건 예전부터 계속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삼사라가 연재된 이후에 소년 히어로가 잘나가다보니까 그 계획이 완전히 무산 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도대체 왜 새로운 잡지가 필요한 건가?"
키도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주간소년 히어로는 그 어느 때보다 인기가 높은 상태다. 그런 잡지를 굳이 새롭게 만든다는 건 누가 봐도 미친 짓이니까.
"전무 쪽 사람이 편집장을 맡을 셈이었으니까요."
"아, 그러니까 이쪽 편집장은 자기사람이 아니라는 거군."
"네. 아무튼, 새로운 잡지계획이 흐지부지 되었는데. 그게 다시 수면위로 올라온 모양입니다."
"어째서?"
"전무님이 사장님 처남이거든요. 아마도 사장님 부인인 자신의 누나에게 매달렸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사장님과 조건을 걸고 이야기를 했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뭐, 예상이긴 하지만요."
테고시의 말에 키도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러니까, 회사의 발전보다는 제 수족을 많이 만들어 얼마나 회사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놈이라는 거군. 재수 없는 새끼군. 그래, 그 조건이 뭔가?"
"랭킹 1위를 하는 겁니다. 5주 연속으로요."
그 말에 키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곧장 심각해졌다.
"5주 연속? 만약 그게 실행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새로운 잡지가 창간될 테고, 지금 소년 히어로 팀은 해체될 겁니다. 물론 상위권 만화들은 그대로 이어받을 거고요. 하위권 만화들은 모조리 잘려나갈 겁니다."
"전무 그놈은 회사에 있어서는 안 될 해충 같은 놈이군."
"해충보다 더 나쁘죠. 힘까지 있으니까."
"흐음."
키도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턱을 긁적였다.
"이거 좋지 않은데?"
"네. 안 그래도 편집부 내에서도 이건 말도 안 되는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애초에 니시다 선생님은 레벨이 다르잖아요. 그 선생님 단행본 판매만 권당 평균 40만권 이상입니다.
일단 명성이 다르잖습니까?"
"그래. 그 자식 하는 짓은 꼴 보기 싫어도 실력은 있으니까. 아무리 요즘 인기가 많이 죽었다고 해도 한 작품을 10년 이상 연재한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그 때문에 편집부도 분위기가 엉망입니다."
테고시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키도가 그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래도 여긴 우리구역이야. 아무리 다른 곳에서 잘나가던 놈이라 해도 1위를 5주나 하는 건 쉽지 않을 거다. 그리고 나도 이전의 내가 아니야. 그리고 나보다 더 괴물도 있으니까. 그래, 이참에 완벽하게 승부를 보는 거다!"
***
딸깍.
지로의 전화를 받고나서 한숨이 나왔다.
나 참, 어이가 없네.
회사 내 파벌 싸움이라니.
어디를 가나 꼭 또라이 같은 놈들이 있다더니.
전무라는 작자가 사장의 처남이라는 직책만 믿고 날뛴다니.
나야, 솔직히 잡지가 바뀌든 말든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담당이 바뀔 수 있다는 말엔 짜증이 막 솟구친다.
전에 얼핏 전무가 삼사라 연재를 반대 했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냥 해프닝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이쯤 되면 민폐덩어리가 분명하다.
사실, 니시다 유키에 대해선 잘 알고 있다.
SF만화가로서 70년대 초반부터 '에스퍼 존'을 연재중인데, 이게 2010년까지 거의 40년간 연재가 되는 만화로 내 기억엔 70권 정도에서 완결이 되었을 것이다.
처음엔 착실하게 연재하다가 언제부턴가 부정기 연재가 되어 결국 70권에서 어중간한 느낌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에스퍼 존'이라는 만화는 지금 시대엔 인기 만화가 분명하고 판매부수도 엄청나다.
새로운 만화를 연재하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이 만화를 그대로 이 잡지에서 연재를 시작한다면 당장 잡지 판매부수가 달라질게 분명할 정도로 인지도가 높은 만화다.
지금의 삼사라나 파시엔시아로는 분명 버거운 상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얌전하게 1위를 내어줄 생각은 없다.
소년 히어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도 그대로 넘어갈 수가 없는 일이다.
안 그래도 올해부터는 일본 만화계에서 엄청난 만화들이 쏟아져 나올 테고, 그것에 대비해 만화를 좀 더 업그레이드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소년 점프의 괴물들과 앞으로 싸우기 위해선 어차피 넘어야 할 언덕이다.
나도 모르게 막 흥분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