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41화 (141/425)
  • < 소년 히어로를 넘어 >

    "산스크리트어를 어떻게 그런데 넣을 생각을 했냐?"

    늦은 밤, 택시를 타고 료칸으로 돌아갈 때 선희에게 물었다.

    그러자 선희는 도쿄시내의 야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입을 열었다.

    "그냥. 예뻐서."

    뭐, 대충 예상한 대답이긴 한데, 어째 직접 본인에게 들으니 좀 허무하긴 하네.

    그래도 은연중에 아주 특별한 이유가 있었으며 했는데.

    그런데 밖에 시선을 고정했던 선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예뻐서 쓰다가…… 아무 의미가 없이 그냥 쓰는 거 보다는 오빠가 가르쳐 준 물건의 사용법을 잊지 않으려고."

    "…….뭐? 잊지 않으려고?"

    그러니까, 일종의 메모 같은 거냐?

    각종 물건에 대놓고 메모를 하기보다는 그렇게 일반인이 알아볼 수 없는 단어로 메모를 했다는 거구만.

    이유가 더 있어서 괜찮기는 하지만……, 어째 이 이유가 더 힘 빠지는 기분이네.

    "혹시 나 모르게 더 넣은 거는 없어?"

    "있어."

    "어? 정말?"

    "어. 그냥 기록 같은 거."

    "기록? 무슨 기록?"

    "얼마 전에 언니 생일날, 그때 생일 축하한다는 말도 새겨 넣었어."

    "뭐? 어디?"

    "림보의 큰 석탑귀퉁이에."

    "아."

    그러고 보니 림보의 가장 큰 석탑이 있다.

    워낙 많은 문양들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어서 그건 진짜 만들어낸 무늬라고 생각했는데, 거기다가 누나 생일 축하한다고 산스크리트어로 적어놨다니.

    경희만 별난 줄 알았더니, 얘도 은근히 별난 구석이 있구나, 그런데 그건 그거대로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잘못한 거야?"

    "아니, 잘했어."

    내 말에 선희가 만족했는지 다시 창밖의 풍경에 몰두한다.

    그런데 그때 반대쪽 차창을 바라보던 경희가 갑자기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내가 돌아보며 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

    "방금……. 본 것 같은데."

    "뭘?"

    "……설기."

    "설기? 백설기?"

    내가 바로 묻자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고 있던 경희가 곧 머리를 흔들었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안 그래? 결 갑자기 일본에서 볼 이유가 없잖아. 며칠 전에도 화실에 있었는데."

    "맞을 거야."

    선희의 말에 깜짝 놀라던 경희가 곧 피식 웃었다.

    "맞아, 설기라고 외국여행하지 말라는 법도 없고, 사실, 사람한테나 외국이지 섀들한텐 상관없잖아? 하하."

    농담으로 받아들였는지 웃으며 머리를 긁적인다.

    선희 말대로 설기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떠드는 사이 어느새 택시가 료칸에 도착했다.

    다음날.

    지로와 앞으로 진행될 삼사라, 파시엔시아와 관련한 이야기를 료칸에서 나눈 후 시내에서 가족과 화실식구들을 위한 선물들을 산 후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

    ***

    "이렇게 한 장씩 밥풀로 붙이면 되는 거지."

    선희가 거실에 앉아 문방구에서 사온 가오리연의 꼬리에 신문지를 길게 잘라 밥풀로 이어가자 준모와 미령이가 박수치며 좋아한다.

    새해가 되고나자 빈 공터나 옥상에선 아이들이 연을 날리는 풍경이 자주 보인다. 그 때문에 준모가 연에 관심을 보이자 경희가 근처문방구로 가서 가오리연 몇 개를 사온 것이다.

    연을 날릴 때 쓸 얼레도 몇 개 같이 사왔는데, 의외로 경희가 연을 날리는 재주가 있다.

    작년에도 경희가 연 날리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아주 능숙하게 연을 공중에 띄워서 얼레를 풀었다 감았다 하는 모습에 놀란 기억이 있다.

    "자, 다 만들었다. 우리 언덕에 가서 연날릴까?"

    "응."

    "갈래, 갈래."

    두 녀석들이 좋아라하며 경회를 따라 화실을 나선다.

    그 모습을 보던 박상식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야, 어릴 적에 친구들이랑 연싸움하던 거 기억나네."

    박상식의 말에 어시들이 옛날 생각이 떠오르는지 연에 관한 추억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저도 그거 엄청 좋아했는데, 오빠 따라다니며 구경하는데도 엄청 재미있었어요."

    "저는 이번 연휴에 고향 가서 연싸움 했어요."

    "역시 연싸움을 제대로 하려면 줄에 유리가루를 먹여야지."

    실버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몰린다.

    "역시 실버 씨 다워요."

    "맞아요."

    실버가 그들의 말에 썩소를 날려준다.

    아무튼 연휴 때 모두 고향에 다녀왔는 데, 연휴기간에 저런 걸 하며 놀았던 모양이다.

    연휴기간은 12월 30일부터 1월 2일까지 4일간이었다.

    물론 연재원고 때문에 그전에 어느 정도 미리 작업을 마무리하긴 했지만, 아무튼 이 시절은 우리가 살던 때처럼 음력 1월 1일은 설로 인정되지 않던 때였다.

    물론 올해(1985년)부터는 '민속의 날'이라고 정해진 탓에 하루는 쉬는 날로 지정되기는 했지만.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따르르릉.

    "선생님, 아카기 씨 전화예요."

    "네. 전화 바꿨습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나자 지로는 OVA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알려주고 나서 본론을 말했다.

    -지금 빅 히어로에 이벤트 엽서가 엄청나게 많이 도착했습니다. 월간지 판매도 최고였지만 그보다 팬 엽서는 다크 프린 세스가 압도적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재미난 소문을 들은 게 있는데요.

    "재미있는 소문이요?"

    -네. 도쿄에 있는 십여 개의 삼사라연구회중 한곳에 써니가 찾아왔었다는 이야기인데, 여고생이라는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너무 정확한 소식이라 혹시, 연구회모임에 가신 적이 있으셨는지 해서요.

    "네, 타츠노코 프로덕션에 갔던 날 저녁에 우연히 아는 사람의 모임에 갔는데, 거기가 삼사라연구회라고 하더군요."

    -그럼, 확실히 소문이 사실이군요. 안 그래도 삼남매가 왔었다는 이야기까지 있어서 혹시나 했습니다.

    "하하,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혹시, 한국이라는 사실은…….

    "그건 괜찮아요. 알리지 않았으니까."

    내 말에 뭔가 안도하는 듯한 숨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더불어 새로운 이스터 에그에 관한 얘기도 들었는데요.

    "네. 알고 있습니다. 전 의도하지 않았는데, 선희가 숨겨놓은 게 있더군요. 저도 이번에 그 모임에 가서야 처음 들었을 정도입니다."

    -아, 그럼. 그게 정말이군요. 문양이 새로운 이스터 에그라는 거.

    "네. 맞아요."

    그렇게 말하고는 대략적인 숨은 뜻에 대해 알려주었다. 워낙 숨겨진 것이 많다 보니 일일이 설명하긴 힘들지만, 당장 기억나는 것 몇 개만 알려주었다.

    물론 스포일러가 될 만한 얘기는 빼고, 아무리 담당이라도 너무 많이 알려주면 재미없다.

    담당을 속일 정도의 이야기가 나와야 독자도 깜짝 놀랄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오후가 되자 밖에서 연을 날리며 놀던 애들과 이대봉이 같이 들어온다.

    그런데 미령이와 준모의 손엔 가지고 나갔던 가오리연이 아니라 방패연이 쥐어져 있다.

    "나 왔어어~!"

    "어서와."

    "어서 와요. 오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아이들이 마당에서 방패연을 가지고 놀고 있다.

    "저 방패연은 뭐야?"

    "아, 저거? 아까 오다가 언덕에서 연들이 잔뜩 보이더라고, 재미있어 보이길래문방구에서 방패연이랑 얼레를 사다가 올라가서 나도 날리며 놀았었거든? 그런데 말이야……."

    "갑자기 연싸움이 하고 싶어졌던 거군."

    실버가 낄낄거리며 이대봉의 말에 끼어들었다.

    "어? 어떻게 알았어?"

    "네 녀석을 내가 몰라? 예전에도 아이들과 연싸움 종종 했었잖아. 물론 이겨본 적이 없었을 테지만."

    "이번엔 이겼지."

    이대봉이 자랑스럽게 말하며 어깨를 삐쭉 세운다.

    그러자 실버가 밖을 보더니 다시 이대 봉을 보며 물었다.

    "물론 저 애들을 상대로 말이지."

    "……어? 너 무당이냐?"

    "무당은 개뿔, 애들이 가오리연을 들고 나갔다가 방패연을 들고 들어왔으니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

    "…… 그런가?"

    그렇게 말하며 어색하게 웃는다.

    "어쩔 수 없이 애들 달래느라 방패연을 사준거야. 애들이 날 죽이려고 하더라고."

    "형이 잘못했네."

    박상식의 말에 화실 식구들이 모두 웃는다.

    "아, 윤환아. 그런데 혹시 나 좀 도와 줄수 있겠니?"

    "뭔데?"

    "사실 요즘 '중원요리왕' 스토리를 만들면서 느낀 건데, 뭔가 의견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느낌이랄까? 나름 일본어를 공부해서 최대한 내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의견을 써두기는 하는데, 막상 만화로 나올 때 보면 뭔가 다르거든?"

    "아. 그렇겠네."

    알만한 말이었다.

    스토리라는 것이 그저 콘티만 덜렁 만들어 건네주면 끝나는 일이 아니니까.

    어쨌건 스토리작가 생각한 것을 만화가가 표현하는 일이니, 중요한 장면에서는 반드시 스토리작가의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제대로 표현이 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일본만화계는 스토리와 만화가가 분리된 채 서로 만나지 않고, 편집자의 중개만으로 작업하는 게 일반적이다.

    물론 가끔 전화통화로 서로 의견을 교환하기도 하겠지만, 역시 제대로 하려면 자주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대봉의 경우엔 한국인이라 일본어가 서툴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어서 제대로 뜻을 전달하는 것이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물론 보내기 전에 내가 번역을 새롭게 수정해주고는 있지만, 말 그대로 난 그저 자연스럽게 고칠 뿐 이대봉의 생각을 알수 있는 건 아니니까.

    아무튼 그 때문에 이대봉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느낌의 만화가 되어간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내가 그림을 잘 모르잖니. 그래서 설정 부분을 다시 알려주는 게 어려워."

    "아는 사람 많지 않아?"

    "그래도 최고가 여기에 있으니까."

    선희?

    "그래서?"

    "선희에게 도움을 좀 요청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그건 나보다 선희에게 물어봐야지."

    "그럼, 넌 괜찮은 거지?"

    "난 상관없어. 선희가 좋다면, 반대로 말하면 선희가 노하면 끝인 거지."

    "알았어."

    그렇게 대답한 이대봉이 곧바로 선희에게 다가갔다.

    "선희야 나 그림 좀 부탁해도 될까?"

    그 말에 데생 작업하던 선희가 머리를 들더니 이대봉을 무표정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인다.

    "알았어."

    "역시 우리 선희이~, 고마워."

    그렇게 말하더니 곧장 필요한 것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아, 배경이랑, 세계관에 대한 건데 말이야."

    이대봉이 선희에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박상식과 다음 삼사라 이야기에 대해 의논을 시작했다.

    박상식도 이번 다크 프린세스에 엄청난 분량의 이스터 에그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내게 듣고 나서야 알게 되서 꽤나 충격을 받았었다.

    그래서 그것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좀 더 파고들어가는 날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겠냐? 시작부터 이거 스토리가 엄청나서 나는 정말 엄두도 못 내겠더라."

    "형은 정리만 잘 해줘. 스토리는 내가 감당할 테니까."

    "그나저나 그 삼사라연구회 사람들 대단하다. 어떻게 이런 걸 찾아내냐? 너도 몰랐다며?"

    "그러게. 나도 놀랐다니까. 어떻게 그렇게 깊게 파고들어갈 수 있는 건지."

    "아무튼 덕분에 재밌기는 하잖아. 이거 제대로만 끌고 가면 진짜 대단한 작품이 될 것 같다."

    "앞으론 삼사라에도 적용할거야. 선희와 벌써 얘기도 끝났어."

    "정말이지 삼사라가 앞으로 어떤 스케일의 만화가 될지 감도 안 온다. 진짜."

    "나도 모르겠어."

    이미 처음에 잡아두었던 설정은 조금씩 수정에 들어간 상태다.

    기존의 스토리만으로는 북두의 권이나 드래곤볼에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올해 호죠 츠카사가 캣츠 아이의 연재를 끝내고 시티헌터를 시작한다.

    이젠 본격적으로 괴물 같은 만화들이 소년점프에서 튀어나올 테니, 나도 준비를 해야 할 입장이다.

    다소 덕후스럽던 삼사라를 대중적 느낌에 맞게 만들었지만, 덕후들이 좋아할 만한 떡밥들도 던져주면서 만화의 스케일도 키우고, 재미있는 설정도 더 붙였다.

    순수하게 내가 만든 이야기로 레전드급 만화들과의 싸움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가장 바라던 일이 이제 시작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까지 소년 히어로에서 순위다툼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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