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도의 화실에서 >
"어머, 어서 오세요."
키도의 부인이 밝게 미소 지으며 우리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다.
"어머나, 쌍둥이라고 듣긴 했는데, 이렇게 똑같다니. 그보다, 전보다 더 예뻐졌군요."
자그마한 체형에다 귀염상을 한 키도 부인이 호들갑을 떨다 곧 우리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거실 소파에 모두 앉고 나자 곧장 마실 것을 내어 놓는다.
마치 미리 준비라고 하고 있었건 것처럼 부엌에 들어가자마자 가지고 나온다.
그것도 여러 가지 스타일의 차를 내왔다.
차 이름을 말하기는 했지만 내가 알리는 없으니 그냥 주는 대로 마실 수밖에.
그런데 이거………, 생각보다 맛있네?
"어머, 이거 엄청 맛있어. 내 취향이야."
"나도."
쌍둥이 녀석들이 차를 한 모금씩 마시고는 표정이 확 밝아지며 좋아한다.
저 쪽은 다른 색깔의 차인데, 어떤 맛일까?
"나도 좀 먹어보자."
"꺅!"
내가 경희의 차를 슬쩍해서 약간 맛보았다.
그런데 이쪽은 생각보다 별로다.
"뭐하는 짓이야? 그럼 나도!"
이번엔 경희가 내 것을 가져가 맛보더니 혀를 날름 내민다.
"엑, 내거보다 맛없어."
그런 사이에도 선희는 자신의 차를 홀짝이며 맛을 음미하고 있다.
그나저나, 이거 키도부인이 각자 취향에 맞춘 차를 내왔다는 건가?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티 마스터?
그때 거실 문이 활짝 열리며 키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째 산발한 머리도 그렇고, 얼굴도 전보다 핼쑥한 느낌이다.
뭐지? 요즘 바빴나?
아니면 다른 이유?
아무튼 키도가 우리를 보더니 크게 반가워한다.
"오, 너희들 왔구나!"
"어. 우리 왔어."
"키도 오빠, 반가워!"
"안녕."
"어? 일본말 잘하는데?"
키도가 손을 번쩍 들며 인사한 경희를 보며 감탄했다는 듯 묻자 우쭐거린다.
"나 일본어 열심히 했어! 실력 엄청 좋아! 선희에게 따로 과외까지 받고 있어!"
"오, 그래도 그새 이만큼 늘었다니 대단한데. 역시 써니와 쌍둥이라 머리가 좋은 모양이야."
"선희가 날 닮아서 머리가 좋은 거지."
"내가 언닌데."
"밖에 나온 순서 따윈 상관없잖아. 생길 땐 내가 먼저일수도 있지."
"아닐걸?"
두 녀석들이 한국말로 떠들자 키도가 의아한 표정을 하며 날 돌아본다.
"얘들 지금 둘이서 뭐라고 하는 거냐?"
"서열다툼."
"서열다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 키도가 이내 크게 웃었다.
"하하하, 맞아. 그건 중요한 일이지."
"그게 왜 중요해?"
그런데 갑자기 선희도 키도를 따라 "하하하" 하며 웃는다.
뭐야, 이 녀석.
"그런데, 말도 없이 어쩐 일이야? 혹시 연재 1위 기념, 가족여행?"
"1위 기념으로 일본에 올만큼 해외여행이 만만하지 않지. 그리고 만약 가족여행이면 엄마랑 누나도 같이 왔어야지."
"그럼 무슨 일인데, 그런 것이냐?"
그때 경희가 끼어들었다.
"우리 오빠, 이번에 오부예를 만든데.오부예."
"오부예? 그게 뭐야?"
키도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선회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 오브이에이 (OVA)"
"아, 오바(OVA)."
키도가 그제야 알겠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삼사라가 드디어 애니로 나온다는 거구만."
키도의 말에 경희가 놀랍다는 듯 물었다.
"어? 삼사라인지는 어떻게 알았어? 대단하네?"
"하하, 당연히 파시엔시아는 스포츠고 이제 이야기도 얼마 진행되지 않았잖아.
그리고 스포츠 물은 짧은 OVA로 잘 제작되지 않지. 아직은 대부분 SF쪽이니까."
키도의 말대로다.
이제 OVA시장이 형성된 지 2년도 되지 않았고, 그동안 만들어진 작품들의 대부분이 SF, 판타지 계열이다.
"하핫, 그래도 대단한데? 아직 만화가 연재된 지 얼만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애니메이션 화라니, '불타라 마구'도 연재한 지 2년 가까이 되어서야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그 말에 내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거, 애니로 만들어졌었어?"
내 기억에 없는 애니라서.
"아, 이야기만 나왔어. 이야기만, 결국 뭐 제작비 문제로 취소지."
"아."
어쩐지 이 시대에 나온 애니라면 내가 모를 리 없지.
"그런데 이유가 뭐야?"
"망할 놈들이 스폰서가 붙지 않아서라나. 뭐라나. 요즘엔 로봇물이 대세라."
"건담으로 반다이가 대기업이 되었잖아. 지금은 흐름이니까."
"그래, 역시 넌 잘 알고 있구나."
그렇게 말한 키도가 내 어깨를 툭 치더니 말한다.
"그나저나 많이 성장했구나. 우리 동생들."
흐뭇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성장한 친동생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이번엔 키도가 경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경이, 너도 스토리에 참여했다고 들었다만."
"경희라고, 경희."
그렇게 말하던 경희가 한숨을 푹 쉬었다가 피식 웃더니 팔짱을 끼며 머리를 치켜들며 말했다.
"뭐, 어쩌겠어? 우리 오빠 스토리가 좀 부족하니까 나라도 좀 거들어야지."
"오, 역시 유난의 동생이라는 건가? 스토리에 재능이 타고난 재능이 있었군."
"당연하지."
둘이서 헛소리를 하며 같이 크게 웃는다.
저 둘은 전혀 다른 외모를 하고 있으면서도 은근히 서로 잘 통하는 느낌이다.
그때 다시 키도부인이 부엌에서 쟁반을 들고 나온다.
조각 케이크와 화과자다.
"와, 너무 이쁘다. 이거 케이크 맞죠?"
"네. 맞아요."
"너무 맛있겠다! 잘 먹겠습니다!"
경희가 머리를 숙이며 큰소리로 말하자 키도부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 혹시 드시고 모자라면 말씀하세요.
많이 있으니까."
"정말 더 먹어도 돼요?"
"네."
"저도."
"네. 많으니까."
그렇게 웃으며 말하고는 곧장 다시 부엌을 향해 총총걸음으로 사라진다.
쌍둥이들이 조각케이크를 한입 떠 넣더니 온몸을 부르르 떨며 좋아라한다.
"음. 이거, 천국에 맛이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다니? 너도 그렇지?"
"어. 맛있어."
"아, 꿈만 같아. 햄버거를 처음 먹은 것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젠 이런 것도 맛보다니. 오래 살면 재미난 걸 많이 경험할 수 있구나."
정말 맛있나보다 저렇게 감동의 눈물까지 흘리면서 헛소리를 하는 걸 보면, 선희도 한 숟갈씩 떠먹으며 감동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나저나 이번 다크 프린세스를 보고 좀 많이 놀랐다. 이스터 에그라는 거 정말 흥미로운 방식이었다."
"그랬어?"
"그래. 덕분에 우리 어시들도 삼사라랑 다크 프린세스 이야기를 자주 이야기 할 정도란다."
"그나저나 진심의 남자도 이번 에피소드 엄청 재밌던데. 형 이번에 완전 칼을 갈았나 봐?"
파시엔시아에게 1위를 빼앗긴지 2주째긴 했어도 진심의 남자 인기는 여전하다.
거기다 이번 에피소드는 호수에 있다는 거대메기를 잡는다는, 어찌 보면 다소 황당한 이야기지만, 진심의 남자 특유의 열혈이야기가 더욱 빛이 나고 있었다.
미녀 과부의 바람을 들어주려 비바람이 부는 날 대물낚시대로 거대메기와의 한판 대결을 벌였지만 낚싯대가 부러지며 패배해 버렸다. 그런 황당한 상황인데도 특유의 느낌 때문에 보는 이도 비장한 기분을 들게 만드는 매력이 바로 진심의 남자니까.
그나저나 희한하게 진심의 남자에는 미녀 과부가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전에 전화통화로 물어본 적이 있는데, 본인 말로는 '메종일각'의 영향을 받았다나 뭐라나.
하긴, 이 시절 메종일각의 인기로 미녀과부가 인기가 많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무튼 이번 거대메기 편은 이야기가 흘러갈수록 흥미를 더하고 있었다.
솔직히 지금 파시엔시아가 1위를 하고 있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다시 빼앗길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어씬 일인지 키도의 표정이 좋지 않다.
"하하하 그게……."
키도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줄인다.
"……?"
"사실은 그 뒤 이야기가 없다."
"없다니? 지금 잘 진행되고 있잖아."
"……그렇긴 한데,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만 떠오르고 있거든."
그래서 얼굴이 좋지 않았던 거군.
하기야, 스토리가 막히면 사람이 죽어가는 꼴로 변하긴 하지.
물론 난 어찌된 영문인지 크게 스토리가 막히거나 하는 걸로 고생하지 않는 걸 보면 아마도 뭔가 알 수 없는 버프(어쩌면 백설기 버프)를 받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그때 스푼을 입에 문 경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거 이무기 아니야?"
"얘가 갑자기 뭐라는 거야? 여기서 이무기가 왜 튀어나와?"
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하는데, 어라? 키도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경희의 말에 관심을 보인다.
"이무기? 그게 뭐냐?"
"이무기 몰라? 아, 그거 일본에는 없는 이야긴가?"
"말해 보거라."
"이무기가 뭐냐면 그러니까……."
경회가 이무기에 대해 나름 자세히 이야기를 해주려하지만 언어실력이 딸리니 설명이 쉽지 않다. 거기다 구렁이가 뭔지를 모르니 쉽지가 않겠지.
어쩔 수 없이 이무기에 대한 이야기를 내가 대신 설명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 설명을 들은 키도가 초롱초통한 눈으로 다시 경희에게 물었다.
"오, 그거 좋구나. 그래서?"
키도의 반응에 힘을 얻은 경희가 두 손을 꽉 쥐며 다시 말했다.
"혹시 그 메기가 이무기 종류가 아닌가 해서 말이야."
"그러니까, 그 메기는 곧 용이 될 괴물이었다는 거군."
"그런 거지."
"오, 그거 흥미로운데?"
키도가 눈알을 데굴거리며 턱을 만지작거린다.
뭔가 스치는 생각이 많은 모양이다.
이럴 땐 가만히 놔둬야한다.
지금 키도의 머릿속은 뭔가 생각이 정신없이 쏟아지며 동시에 정리가 되고 있을 테니까.
할 말을 다한 경희가 마저 조각케이크를 다 먹고 나자 빈 스푼을 빨며 아쉬워한다. 선희는 이미 경희가 떠들고 있을 때 다 먹어버린 상태라 접시도 완전 깨끗하다.
그런데 딱 맞춰서 다시 키도부인이 나타나 둘에게 더 큰 조각케이크를 주고는 다시 웃으며 부엌으로 돌아간다.
뭔가 신기한 느낌의 여자다.
그때 키도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그래! 그거야! 그 과부도 이무기였던 거야!"
"엥? 또 이무기?"
"그래. 그 젊은 과부는 사람의 모습을 한 이무기라는 거지. 그러니까, 용이 되기 마지막 미션이 인간과 혼례를 치러 20년을 사는 것인데, 이 메기가 그것을 방해한 거고, 다시 말하면 뭐 라이벌 같은 거겠지."
너무 나간 거 아닌가?
하지만, 생각해보면 진심의 남자는 현실에선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난무하는 만화다.
전에 요괴이야기도 한번 다룬 것 같으니까, 문제는 없으려나?
이무기야 익숙한 소재지만 일본인에게는 신선한 것일 수도 있는 거고.
그런데 그 얘기를 들은 경희가 신나서 다시 나선다.
"우와, 그거 좋다! 완전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라서 너무 마음에 들어."
"그렇지?"
"응. 그런데 그 다음은?"
"그다음은 당연히 주인공이 다시 거대 메기를 잡기 위해 도전 하는 거지. 목숨을 거는 거야.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 목숨을 거는 건 남자의 로망 아니겠느냐?"
"멋있어, 멋있어! 그리고?"
"하하, 다시 비와 폭풍이 오는 날 더 강력한 슈퍼합금으로 된 대물 낚싯대를 이용해 사투를 벌이는 거다!"
슈퍼합금은 또 뭐야?
그냥 듣고 있으니 완전 정신 나간 이야기로 들린다.
물론 저 인간이 저렇게 이상해보여도 열혈표현 만큼은 최고다.
아마도 그럴듯한 내용에 사람들을 강제로 감동 먹게 만들 만한 그런 약을 타겠아무튼 둘이서 저렇게 흥분해 계속 이야기를 떠드는 시끄러운 와중에도 선희는 혼자 조용히 케이크를 먹고만 있다.
아주 만족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