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사라 OVA (2)>
하지만 한편으로는 좀 이상한 점이 있다.
왜 타츠노코 프로덕션이 삼사라에 관심을 보인 걸까?
2권도 안 되는 분량만 연재된 건 둘째치고, 애초에 이 양반들은 원작이 있는 애니보단 오리지널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한 회사다.
내가 알기로도 타임보칸, 캐산, 개구리 왕눈이, 이상한 나라의 폴, 갓챠맨(독수리 5형제) 같은 자신만의 색깔인 애니를 만들어 왔으니까.
그러니까 원래대로라면 원작이 있는 삼사라 같은 만화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뜻이다.
확실하진 않지만, 삼사라 때문에 역사가 바뀐 모양이다.
하기야, 나비의 날개 짓만으로도 태풍이 생긴다는데, 삼사라 같은 걸 만들었으니 아무것도 안 바뀌길 바라는 건 무리 일려나?
"왜 삼사라에 관심을 가졌답니까?"
- 일단 자세한 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선생님이 찬성하신다면 미팅을 꼭 하고 싶다는 얘기도 하더군요.
"미팅요?"
- 네. 아무래도 원작자와 상의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 모양이더군요. 혹시 미팅을 원하지 않으시면 적당한 핑계로 이야기 해 두겠습니다. 간단한 건 저를 통해 전달해 주셔도 되고요.
"아뇨, 만나보도록 하죠. 선희도 함께."
사실, 나 같은 경우엔 일본사람들도 쉽게 눈치 채기 힘들 정도의 언어실력을 가지고 있고, 선희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회화실력이다. 그러니까, 굳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내 쪽에서 밝히지 않는다면 특별히 알아차리긴 힘들 것이다.
그걸 아니까 지로도 내게 물어본 것일테고, 일단 만화로 일본에서 연재를 시작한 이상, 애니메이션 화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내 입장에서도 이건 영광이고, 어차피 앞으로 겪어야 할 일이니 굳이 미룰 이유는 없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전화를 끊고 나자 어시들이 내 쪽으로 힐끔거린다.
내가 통화하는 내용을 들었지만, 정확한 사정을 몰라 궁금하다는 표정들이다.
그때 실버가 입을 열었다.
"혹시 만화영화에 관한 얘기냐?"
그 말에 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맞아."
그러자 일순간 어시들이 작업을 멈추고 나를 바라본다.
그들의 표정이 죄다 경악으로 물들어 있다.
하기야, 이 시절의 애니, 그것도 만화 최강국이라 할 수 있는 일본에서 우리가 그린 만화를 애니 화 한다니 놀라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번엔 박상식이 물었다.
"그래서? 만들기로 결정은 한 거야?"
"일단 만나고 나서."
"만난다고? 그 사람들이 온다든?"
"아니, 내가 가야지."
"괜찮아? 아직 너랑 선희 출판사 말고는 한국인인거 알리지 않았다며."
"어."
내가 머리를 끄덕이자 박상식이 나와 선희를 번갈아 보더니 곧 머리를 끄덕인다.
"하기야, 너희들은 일본어 잘하니까. 굳이 말하지 않으면 모르긴 하겠다."
"그나저나 부러워요. 우리는 평생 외국여행 한번이나 할 수 있을라나?"
구자희가 턱을 양손으로 괴며 부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지금이야 당연히 해외여행에 제한이 많아서 저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삼사라 일본에서 만화영화 나오면 수입할까요?"
정미자가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한편짜리 단편애니에요."
"한편짜리요? 극장용인가요?"
"극장용은 아니고, OVA라고 비디오 판매를 목적으로 한 건데, 그걸로 만들어 본답니다."
"아."
어시들이 알겠다는 듯 머리를 끄덕인다. 전에 내게서 몇 번 들어서 이해를 한 것이다.
"운 좋으면 휴일 특집으로 방영할 지도 모르겠네."
"맞아."
사람들이 기대감을 가지며 머리를 끄덕인다.
어차피 일본판으로야 내가 가져와 화실에서 틀어볼 수는 있지만, 그래도 우리말로 된 더빙 판으로 TV에서 방영하면 감회가 새로울 테니까.
그러고 보면 지금의 시대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어느 시절 보다 방송에 대한 규제가 강하고, 만화에 대한 탄압이 많았음에도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만화영화를 방영하기도 했으니까.
은하철도999같은 경우도 자세히 이야기를 살펴보면 어린이용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내용이 많았음에도 방영이 결정될 정도면.
그것 말고도 은근히 그런 경우가 흔했다던 시절인데, 이런걸 보면 만화를 그냥 규제만 했지 제대로 확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어디 이 시절뿐일까?
미래에도 이런 건 여전할 것이다.
***
경희가 코를 심하게 벌름거리더니 공기를 쭉 들이킨다.
"흡!"
그 상태로 얼굴이 벌게질 때까지 버티자 내가 녀석의 뒤통수를 탁 쳤다.
"캑! 콜록! 콜록! 왜 때려!"
"야! 뭐하냐?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자살이라도 할 셈이야?"
공항을 나오자마자 뭐가 좋은지 호들갑을 떨 때부터 요란스럽더니. 이젠 별 짓을 다한다.
"아니지. 일본공기를 느껴보는 거라고."
"일본공기엔 뭐 특별한 거라도 들었든?"
"다르지. 뭔가 확실히 달라. 선진국 공기라 그런 가, 뭔가 특별해."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가자. 바쁘니까."
"어. 알았어."
결국 일본에 경희까지 데려오고 말았다.
사실, 경희가 특별히 떼를 쓰거나 한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선희랑 잘 다녀오고, 선물이나 잊지 말라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데리고 왔냐면………, 마음에 걸려서다.
늘 오고 싶어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선희도 그런 경희의 마음을 알고 있고, 그렇지만 식구 중 누구도 경희를 데리고 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엄마나 누나는 당연하고, 경희도 자신이 폐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 시대에 외국여행이라는 것이 그만큼 큰일이니까.
그래도 데려온다는 결정을 내리고 나니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김포공항에서 출발할 때부터 난리도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공항 밖으로 나가자 지로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다가오며 인사를 한다.
그러자 경희가 지로를 가장 반긴다.
"안녕하세요. 일본 아저씨."
우리도 덩달아 인사를 하자 지로가 반갑게 웃으며 답했다.
"어서들 오세요. 이번엔 묵으실 만한 곳을 따로 찾아두었으니까, 저랑 함께 가시면 됩니다."
그 말에 경희가 눈을 크게 뜨며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호텔요?"
"아뇨. 호텔은 아니고, 료칸입니다."
"료칸이 뭐예요?"
"뭐긴, 여관이지. 일본말로 료칸이고."
"…….아."
뭔가 잔뜩 실망한 표정이다.
지로가 뭔가 말하려하다 내 표정을 보더니 피식 웃고는 그냥 웃을 뿐이다.
"뭐, 그래도 괜찮아. 일본에 왔으니까 돈은 아껴야지. 거기다 나까지 끼었으니 돈 많이 들었을 거 아냐."
"아무래도 그렇지."
내 말에도 경희는 괜찮다는 표정이다.
하기야, 일본까지 왔으니 숙박시설이 좀 후져도 상관없다는 그런 생각인 모양이니까.
하지만 택시를 타고 료칸 앞에 도착하자마자 그 생각은 저 하늘로 흔적 없이 사라진 표정이다.
"여, 여기가 료칸?"
"네. 전통식 숙박업소인데, 여긴 꽤 평이 좋은 곳입니다."
"이거 설마 아카기 씨가……?"
"예약은 제가 할 수 있지만, 돈은 무립니다. 하하."
"그럼……?"
"회사에서 일정에 관한 모든 비용을 부담하기로 했으니까, 세분은 그냥 편하게 쉬시다 가시면 됩니다."
그 말에 제일 신난 건 경희였다.
"그럼, 모두 공짜에요?"
"네. 혹시 사고 싶으신 물건이 있으시면 따로 말씀해 주셔도 되고요. 이미 사셨다.
면 영수증을 제게 주시면 그 비용도 회사에서 처리해 드릴 겁니다."
"어? 그것도 괜찮은 거예요?"
"그럼요. 이미 결재를 받았습니다."
"와, 모두 공짜래!"
그렇게 말하며 선희를 힘껏 껴안는다.
"캑. 놔."
"어쩜 좋니?"
"놔."
"오늘 최고야."
곧장 료칸의 직원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가자 지로는 금방 돌아간다.
일단 애니제작사의 미팅은 내일이니까, 오늘은 도쿄 시내를 구경하거나 아니면 푹 쉬란다.
물론 경희나 선희가 그냥 료칸 내에서 쉴 인간들은 아니지.
겨우 3일짜리니까. 매순간 시간이 아까 울 것이다.
우리는 방에서 짐을 풀자마자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택시를 잡아타고는 곧장 도쿄시내로 출발했다.
"와, 여기 택시는 정말 신기해. 문이 자동으로 열리네? 버스 자동문 같아. 버스도 버스안내양 없어지고 자동문으로 바뀐지 얼마 안됐는데. 아직 다른 동네엔 버스안내양이 있는 곳도 있다던데."
경희가 흥분한 표정으로 계속 주절거린다.
전에 선희랑 왔을 땐 너무 조용했는데, 지금은 또 너무 시끄럽다.
선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로 창밖의 모습만을 눈 속에 담고 있을 뿐이다.
앤 이렇게 본 것들을 가끔 스케치 해두기도 하던데, 알고 보니 그것들도 만화 배경으로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삼사라도 처음엔 한국의 도시풍경만으로 진행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일본식 배경이 많이 등장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물론 따로 사진 같은 자료를 받기도 하지만, 아무튼 선회가 계속 떠들어대니 운전기사도 신경이 쓰이는지 뒤를 한 번씩 힐끔 거린다.
어느새 도쿄시내로 들어서자 경희가 경악한다.
"와, 도시 정말 으리으리하다. 역시 일본은 선진국이구나, 과연, 미국을 따라잡을 거라더니."
"와, 사람들 옷 정말 멋지게 입었어! 다 세련된 사람들 같아. 신사랑 숙녀뿐인 곳 같아."
"여기 사람들 엄청 친절하다며."
택시가 멈출 때까지 쉴 새 없이 떠들자 운전기사도 당황스러운지 눈알만 계속 데굴거리고 있다.
택시에서 내리고 난 뒤 먼저 우리가 찾아간 곳은 아키하바라다.
전에도 와서 느낀 거지만, 지금은 만화와는 별로 큰 상관이 없는 거리다.
하지만 구경할 것도 많고, 실제로 가장 사람이 많이 지나가는 곳이라 재미있기도 할 테니까.
그리고 내 예상대로 경희는 연신 감탄만 하고 있을 뿐이다.
"저건 뭐야?"
"저건?"
"저 언니 엄청 예쁘다. 목소리도 좋아."
"이런 걸 길거리에서 막 나눠줘도 돼? 와, 역시 선진국."
경희가 그렇게 한참을 떠들며 걷고 있는데, 그때였다.
"어머, 너 정말 오랜만이다!"
갑자기 일본여자가 경희에게 아는 척을 하며 다가와 반갑다며 말하는 게 아닌가?
쟤 일본에 처음 왔을 텐데, 어떻게 아는 사람이 있는 걸까 싶은 생각을 했다가 경희가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고는 상대가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내 곁에 있던 선희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무 그려줬던 언니."
"뭐?"
그렇게 되물었다가 곧 기억이 났다.
전에 왔을 때 극장에서 만났던 오타쿠무리를 사이에서 선회가 어떤 여자에게 나우시카에 등장하는 거대한 벌레를 그려 줬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인형을 받았던 것 같은데.
아마도 그 때 그 여자인 모양이다.
그러니까, 저 여자는 지금 경희를 선희로 착각하고 있다는 거고.
그나저나 저 여자도 기억력이 엄청 좋구나. 그때 한번 봤는데 얼굴까지 기억하고 있으니, 그런데 아직 여자가 경희에게 계속 말을 걸고 있다.
"너 기억 안나니? 나야, 네가 그림 오무그려줬던, 네 이름이 사니라고 했었지 아마?"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네?
물론 경희도 요즘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한 탓에 말은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는 실력이다. 다만, 상대가 하는 이야기는 전혀 모르는 것일 뿐.
경희가 나를 보며 눈빛으로 도움을 청한다.
그때 선희가 앞으로 다가가 그녀 앞에 서자 깜짝 놀란다.
"어?"
그리고는 곧 입을 떡 벌리더니 "쌍둥이?" 라고 말한다.
그러자 선회가 머리를 끄덕이더니 자신을 가리켰다.
그제야 여자는 자신이 착각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웃으며 경희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난 두 사람이 쌍둥이라는 사실을 몰랐어. 그나저나 엄청 반갑네."
그 말에 선희도 머리를 끄덕인다.
"나도, 미도리."
"어머, 내 이름 기억하고 있구나?"
"응."
"전에 내가 줬던 테토는 잘 있지?"
그 말에 선회가 머리를 끄덕인다.테토란 나우시카에 등장하는 여우다람쥐로 그때 이 여자가 준 개러지 킷(피규어)이다.
"혹시 널 다시 만날 수 있을까싶어서 자주 주변을 돌아다녔는데, 한 번도 못 만나서 아쉬웠거든."
"왜?"
"왜긴, 너처럼 그림 잘 그리는 애는 우리 삼사라연구회 모임에서 꼭 필요하거든."
뭐? 삼사라 연구회?
얘, 삼사라 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