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터 에그 (2) >
그런데 갑자기 선희가 새로운 원고용지를 꺼냈다.
간단하게 화이트로 수정한 뒤 그림을 그려 넣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페이지 전체를 다시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거, 완성된 원고인데 굳이 다시 그릴 필요가 있냐?”
“확실하게 하고 싶어.”
“확실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로 어시들을 힐끔 돌아봤다.
솔직히 선희보다는 어시들에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이미 완성된 원고를 다시 하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정도는 나도 예전에 잠시나마 경험해 봤으니까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어시들은 그런 내 생각과 달리 의욕을 보이고 있다.
“괜찮아요. 그런 방식의 만화를 시작한 이상 저희도 동참해야죠.”
“네. 저도 찬성이에요.”
그렇다면야 다행인거고.
어쨌거나 페이지를 새롭게 만드는 작업은 선희의 손에서 빠르게 작업되고 있었다.
선희야 뭐, 데생 한 장정도 그리는 건 일도 아니니까.
거기다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일부 배경까지 직접 펜으로 작업한다. 특히 내가 말했던 장면에는 특히 더 공을 들이는 모습이다.
“너무 눈에 띄게는 하지 말고. 어디까지나 배경의 느낌으로.”
“알았어.”
머리를 끄덕이며 나름 신중하게 그림을 완성해간다.
마치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이는 단순한 배경일 수도 있는 그림이지만, 그것에 들이는 노력은 상당하다. 선희도 나름 이 장면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제 인지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어쨌거나 만화를 보는 일반 독자들은 거의 인식하지 못할 정도가 딱 좋은 수준이다.
거기다 전체적인 그림의 밸런스까지 생각하며 그려야 하니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뭐,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고, 선희는 전혀 다르게 보이긴 하지만.
가벼운 펜선의 움직임만으로 배경을 슥슥 완성해 가고 있으니까.
이 모습을 곁눈질로 보는 배경 담당의 어시들 표정이 가관이다.
천재란 존재와 같이 있다 보면 자신이 실력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다시금 돌아보게 만들고 있을 테니까.
그래도 이젠 제법 익숙해졌는지 금방 인정해버리는 모습이다.
아무튼 어느새 기본적인 배경을 제외하고는 작업이 끝나버렸다.
나머지 일반 배경은 어시들에게 맡겨두면 된다.
“특별한 지시는 없어요?”
선희에게 원고를 받은 박수미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아뇨. 평소처럼 그리시면 돼요. 방금 완성된 그림이 배경이 묻힐수록 좋으니까.”
“네. 알겠어요.”
내 말에 박수미가 머리를 끄덕이고는 배경작업을 시작한다.
박수미의 펜을 쥔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굉장히 능숙한 솜씨로 데생위에 펜선을 입혀나간다.
펜선의 움직임이 놀랍도록 정확하며 빠르다.
그동안 화실 생활하면서 실력이 엄청나게 늘어버린 탓이다.
하기야, 선희나 실버 같은 괴물들을 곁에서 늘 지켜봐 온 상태다. 거기다가 동료들의 실력도 일취월장 중이라면 당연한 일이겠지.
더불어 우리만화들의 경쟁 대상도 일본의 만화들이다보니 이젠 일반적인 한국만화들은 아예 눈에 차지 않을 정도의 실력을 가져버렸다.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도 지금 화실 사람들의 실력은 내가 살던 미래의 기준으로 봐도 상당한 실력자들이니까.
어느 순간부터 이 화실의 시간만 미래인 것처럼 모든 것의 수준이 높아져 있다.
아무튼 박수미가 남아있는 배경을 모두 완성하고 난 뒤, 원고를 다시 성준희에게 넘긴다.
원고를 받은 성준희가 능숙한 동작으로 마무리 작업에 돌입한다.
사실, 성준희는 이곳 어시들 중 유일하게 미경험자로 출발한 경우다.
애초에 만화를 그릴 줄도 모르고 관심도 없었던 여자였다.
화실을 시작할 때 그냥 일손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시작한 케이스라 솔직히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저 화실의 잡일과 간단한 뒤처리 정도면 만족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요즘 성준희의 실력은 정말 장난이 아니다.
물론 그림 실력은 여전히 제로에 가까울 정도로 그냥 그런 수준이지만, 뒤처리의 실력은 그야말로 스페셜리스트다.
화이트, 먹칠, 같은 것은 당연하고, 요즘엔 스크린톤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다.
이 시대엔 일본과 달리 스크린톤 사용이 보편화 되어 있지 않던 때라서 다른 어시들도 그 부분에서 만큼은 능숙하지 못한 기술이 바로 톤 붙이기였다.
유일하게 같은 선상에서 출발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화실에선 스크린톤을 거의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다.
재료는 지로에게 꾸준히 보내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으니까.
그러다보니 어시들 모두가 이제는 톤 사용이 능숙해져 있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성준희의 실력은 그야말로 독보적이었다.
특히 초창기에 내가 모두에게 전수해 주었던 톤 겹쳐 쓰기의 수준은 그야말로 최고의 경지에 오르고 말았다.
당연히 나 따위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어느 정도냐면 점박이 스크린톤 세장만 겹치면 어지간한 입체감을 만들 수 있고, 심지어 폭발 같은 불길장면을 묘사하는 수준은 그야말로 예술의 경지다.
어떻게 연습하는지 지켜봤더니 흑백도트로 찍혀있는 신문의 사진을 분석해 그것을 톤으로 묘사하는 것을 연구하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보고 정말 얘가 좀 더 일찍 만화분야에 뛰어들었다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저렇게 열심히 하는 이유가 아마도 집안 사정 때문일 가능성이 크긴 하지만.
그리고 내게 이렇게 얘기한 적도 있었다.
‘주변엔 모두 실력자들이잖아. 민폐는 끼치지 말아야지. 그리고 나도 여기서 계속 일하고 싶으니까, 죽도록 할 생각이고.’
한마디로 절실하기 때문에 이만한 실력을 쌓았다는 뜻이다.
어쩌면 어떤 재능보다 중요한 게 절실함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새롭게 수정된 페이지가 완전히 완성되고 다른 페이지들의 작업도 모두 마무리 되었다.
처음부터 다시 천천히 원고를 살펴봤다.
첫 연재분이니 그림에 힘을 잔뜩 준 게 느껴질 정도로 퀄리티에도 신경 써서 그런지 때깔이 아주 좋다.
그리고 한 페이지가 완벽히 바뀐 페이지가 눈에 들어온다. 그다음 엔딩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페이지.
확실히 바뀐 페이지의 장면으로 인해 전체적인 인상이 바뀌었다.
영화에서 후반부가 인상에 남으면 명작으로 인식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인가? 아무튼 괜찮은 느낌이다.
이제 원고를 종이박스에 담아 출판사로 보내면 끝이다.
***
빅 히어로의 직원이 다급한 표정으로 지로에게 찾아왔다.
“원고가 도착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의 말에 지로가 책상위에 놓인 원고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네. 이거에요.”
“아. 그렇군요.”
남자가 눈을 빛내며 지로의 앞에 있는 원고를 힐끔 본다. 궁금함,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이다. 하지만, 자신의 일은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열었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시면.”
“네. 제가 지금은 바쁜데, 빅 히어로에서 식자작업을 해줄 직원을 좀 지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에 노련한 직원 둘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서둘러 소년 히어로 편집부를 빠져나간다.
그 모습을 본 야지마가 지로에게 말했다.
“저 사람 빅 히어로 쪽 팀장 아니야?”
“네.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팀장급이 직접 널 서포트 하는 거야?”
“네. 필요한 것을 처리하려면 팀장급 정도가 적당하다고 하더군요.”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대단하네. 팀장급을 부리다니.”
“부리는 건 아니죠. 그냥 단순한 서포트 정도니까.”
“그 정도면 부리는 게 맞지.”
“······그런가요?”
지로가 눈알을 굴리더니 곧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해보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팀장까지 붙여준 거 보니까, 이번에 빅 히어로가 다크 프린세스에게 기대하는 게 엄청 큰가보다.”
“그렇다고 들었어요. 전에 단편을 실었을 때도 판매부수가 엄청 늘었다고 했으니까.”
“그래. 나도 그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엔 아예 몇 만부를 추가로 더 찍자고 그쪽 편집장님이 출판부장님을 압박하는 모양이더라고. 출판부 직원 중 내 동기 녀석이 있는데, 출판부장님이 빅 히어로 편집장님 때문에 힘들어 하는 모양이야. 하기야, 그럴 만도 하지. 빅 히어로 편집장님이 임원 빼고 서열 1위 아니냐. 낄낄.”
뭐가 재밌는지 야지마가 혼자 말하고 혼자 낄낄거리며 웃는다.
하지만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지로의 시선을 느끼고는 이내 헛기침을 하고는 표정을 관리한다.
“짜식이 이럴 땐 박자도 좀 맞춰주지.”
“아 참. 이번에 빅 히어로 편집부에 유명 만화가 선생님들의 축전이 몇 장 날아왔다고 하던데요.”
그 말에 야지마의 눈이 커진다.
“그래? 누구, 누군데?”
“이시노모리 선생님이랑, 오카자키 선생님이요.”
그 말에 야지마가 화들짝 놀랐다.
“설마, 이시노모리 쇼타로 선생님? ‘사이보그009’ 랑 ‘가면 라이더’를 그리신?”
“네.”
“거기다 ‘저스티’랑 ‘라그나로크 가이’로 유명하신 오카자키 츠구오 선생님까지?”
“네. 맞아요.”
지로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입을 떡 벌렸다.
“이건 진짜 대단한 일이다.”
“저도 처음엔 놀랬는데, 축전에 보니까, 삼사라의 팬이시라고 하시더군요. SF의 거장들 눈에도 삼사라는 대단하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아참, 다크 프린세스의 단편도 재미있게 보셨대요.”
“그래서? 그 축전 일러스트는?”
“당연히 축전은 복사해서 빅 히어로에 같이 싣기로 했구요. 원본은 써니 선생님 댁에 보내드렸죠.”
“정말? 써니 선생님, 아니 대부분은 텐겐 선생님이랑 통화한다고 했었지? 그래, 텐겐 선생님은 뭐라고 하셔?”
“평소에 두 분의 엄청난 팬이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굉장히 감동한 눈치던데.”
“와, 부럽다. 그런 분들의 축전 일러스트까지 받을 정도로 유명해 지다니. 지금 네 기분이 어떨지 상상도 안 돼. 우리 무카이 선생도 빨리 성공해야 할 텐데.”
그렇게 중얼거리다 아차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바쁘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나도 어서 무카이 선생 화실에나 가봐야겠다.”
그렇게 말하며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간다.
이제야 여유가 생긴 지로가 원고를 천천히 살펴본다.
확실히 완성도가 높은 원고다.
그런데 네임과 달라 보이는 페이지가 하나 있다.
“······?”
이상하다는 생각에 전에 받아두었던 복사네임을 꺼내 비교를 해본다.
써니가 만드는 네임은 다른 만화가들의 네임에 비해 퀄리티가 높은 편이다. 그래서 네임만 보고도 완성도가 거의 짐작된다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그런 네임을 지로는 수도 없이 반복해서 보는 편이라, 스토리의 모든 상황을 머릿속에 두고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번 원고엔 네임에서 본적 없는 페이지가 분명 끼어있다.
전체적인 그림은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히 다르다.
써니가 실수로 그렸을 리도 없고, 갑자기 새로운 영감을 받아서 그린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비춰보면 분명이 이 페이지는 새로 만들어진 게 분명하다.
왜 이 페이지만 콘티와 다르게 만든 걸까?
갑자기 새로운 의문이 생겨났다.
물론 담당으로서 전화를 걸어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뭔가 스스로 알아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담당으로서 누구보다 삼사라와 다크 프린세스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담당 편집자라는 사실을 자각할 필요는 있으니 만약이라도 알아내지 못한다면 반드시 전화로 확인할 필요는 있다.
이것이 담당의 특권이기도 하니까.
그나저나······.
이 페이지에 무슨 특별함이 있는 걸까?
굳이 기존의 네임을 갈아엎을 정도로 중요하나?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꾸만 생기자 곧장 자세히 페이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냥 봐서는 특별할 것이 없다.
장면이 기존 네임에 비해 큼직해 졌다는 것 정도다.
응?
커졌다고?
왜 커졌지?
순간 지로는 커진 장면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곳에서 뭔가를 찾아낸 그의 눈이 커졌다.
“······이거, 삼사라와 실시간으로 이어지는 건가?”
분명 2주전에 연재된 삼사라의 장면에서 나온 주인공 켄의 흔적이 놀랍게도 이곳 다크 프린세스의 배경인 림보에 남아있었다.
< 이스터 에그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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