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헐적 천재 (5) >
그 시각 창고 뒤편에 모인 축구부 아이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몸을 풀고 있다.
상대는 서울에서 전통적인 강호로 인정받는 내들고 녀석들이다.
그들과 역대전적이 1무 10패로 절대적 열세를 보이는 상황.
그런 상대다보니 모두 긴장하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학교에서 특별히 인근 여고에 찾아가 부탁해 모조리 응원까지 와줘서 운동장이 시끌시끌하다.
전에 봤던 그 쌍둥이 여고생들이 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뭔가 힘이 나긴 하지만 상대가 상대다보니 여전히 경기가 부담스러운 건 당연하다.
엊그제, 광기에 사로잡혔던 경기 이후로 팀의 포지션에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몇 번의 연습으로 그것이 더 효율적이더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팀 전력이 더 오른 것이다.
그리고 이번 경기가 변화된 포지션으로 치르는 첫 번째 경기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심리적인 부분이었다.
오랫동안 몇 년에 걸쳐 계속 눌려온 탓에 내들고만 만나면 기가 죽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번 경기에 승리의 여신들이 와준다면 좋은 경기를 할 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었고, 그 때문에 감독이 나선 것이다.
곧장 감독은 교감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그 교감과 함께 여고에 가서 부탁한 게 운 좋게 먹힌 것이다.
물론 그건 순전히 교감과 여고의 교장이 고향 선후배 사이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물론 쌍둥이들만 따로 부르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하다는 판단에 여고생 전체를 부르는 것으로 결론을 낸 것이다.
그리고 단체로 팀을 응원해 준다면 더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런 상황임이었지만, 역시 내들고 선수들과의 경기에 주눅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때 축구부원 하나가 소리쳤다.
“내들고 애들 도착했어요!”
“진짜?”
경기장에 내들고 축구부 선수들이 들어오는 게 보인다.
학교로 들어서다 여자애들이 많다는 사실에 주춤거리기는 하지만 이내 여유로운 표정이 된다. 아마도 큰 경기를 많이 치러본 탓이리라.
그리고 잠시 후 운동장 한쪽 편에서 몸을 가볍게 풀기 시작한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자 선수들 모두가 더 긴장해 버렸다.
“젠장, 더럽게 여유롭네.”
“그러게. 저 자식들, 아마 가벼운 연습게임 한다는 기분으로 왔겠지?”
“그래 보여요. 특히 저 박두진이랑 주전들 대부분이 아예 나오지도 않을 모양인데요?”
“전에도 안 나왔잖아. 그때도 주전중 절반만 나왔었지?”
“그러고도 5대0이었으니까요.”
그 말에 한 아이가 머리를 감싸 쥔다.
“악, 그때의 악몽이 또 떠오른다.”
그런데 그때였다.
모두들 긴장으로 경직된 채 어설프게 모두 몸을 풀고 있는 그 곳으로 누군가 불쑥 다가온 것이다.
그리고 그 다가온 대상을 확인한 축구부원들이 크게 놀랐다.
“앗!”
“아앗!”
“악, 쌍둥이 여신!”
“진짜다!”
며칠 전에 봤던 그 쌍둥이 여자애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갑작스런 상황에 축구부원 모두가 경직상태가 되어버렸다.
여고생 무리 속에 쌍둥이가 있을 거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이곳에 불쑥 찾아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탓이다.
모두가 그렇게 충격에 빠져있을 때 쌍둥이 여자애 중 한명이 주장 완장을 찬 우락부락한 3학년 남자에게 다가와 느닷없는 질문을 던졌다.
“여기 대장이시죠?”
갑작스런 질문에 주장은 어쩔 줄을 몰라하며 더듬거렸다.
“대, 대장······ 이라니. 뭐, 비슷하긴 한데······.”
“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네?”
예쁘게 생긴 여자아이가 마치 뉴스의 기자라도 되는 양, 당돌하게 뭔가를 물어왔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은 그저 혼란으로 가득 찬 탓에 쉽게 생각이 정
리되지 않는다.
그런 주장을 멀뚱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경희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아, 죄송해요. 그냥 오늘 기분이 어떤지 알고 싶어서 물었어요. 개인적으로 좀 필요한 일이라······.”
“아니, 뭐. 괜찮아요. 그렇기는 한데······.”
그때 한쪽 편에 있던 축구부원 하나가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제, 제가 마,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런데 경희를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 부끄러운지 시선이 위로 향한 채로 더듬거리며 소리를 지른 것이다.
“그럼요. 그렇게 해주면 저야 고맙죠.”
그때 갑자기 정신을 차린 주장이 소리를 지른 남자애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얌마! 나에게 먼저 물었잖아!”
“네가 바보처럼 말을 못하니까, 그렇지.”
“내가 말을 왜 못해? 그리고 바보 같긴 너도 마찬가지가 아니냐!”
“난 아니지!”
“저기 싸우지는 마시고요.”
“아, 넵!”
“옙!”
두 남자애가 부동자세를 취하자 다시 경희가 주장에게 물었다.
“기분은 어떠세요?”
“아, 그게······.”
“그 봐, 내가 한다니까!”
“할 수 있어!”
3학년 선배들이 다투자 아래 후배들은 눈치를 보며 속닥거렸다.
“우리는 더 잘할 것 같은데.”
“맞아.”
그때 감독이 끼어들더니 소리쳤다.
“모두 입 다물 엇!”
모두가 놀라 입을 다물자 그 순간 경희도 화들짝 놀랐다. 근처에 감독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경희가 이젠 어쩌나하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감독에게 인사했다.
“저기, 안녕하세요. 전······.”
“그래, 그래. 와줘서 정말 고맙다. 너희들 엊그제 찾아왔던 쌍둥이들 맞지?”
“아, 네에.”
경희가 눈치를 보며 대답한다.
선희는 여전히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같이 머리를 끄덕일 뿐이다.
“자자, 뭐 물어볼게 있으면 물어봐. 아무 거라도. 대신 부탁을 들어줬으면 하는 부탁이 있는데.”
“부탁이요?”
“그래.”
감독이 밝은 표정으로 웃었다.
한참 뒤 운동장 가운데로 빡빡고 선수들이 나왔다.
내들고 애들은 이미 몸을 가볍게 풀었는지 준비가 끝나있는 상태.
그런 그들의 눈빛엔 빡빡고 애들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며 잡담까지 나누고 있다.
빡빡고 애들도 처음보다는 긴장이 많이 풀린 표정이다.
그리고 빡빡고 애들의 시선이 이내 VIP석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빡빡고와 여고 교장들과 교감들이 앉아있는 장소다. 하지만 아이들의 시선은 그들 곁에 있는 두 명의 여고생에게 향해있었다.
그들이 그동안 승리의 여신들이라 부르짖던 바로 그 쌍둥이들이다.
쌍둥이들을 본 감독이 교장에게 특별히 부탁해 자리를 만든 것이다. 사정을 들은 교장도 그것을 흔쾌히 허락했다.
아무튼 그런 자리에 앉아 있음에도 쌍둥이들은 별달리 어색한 표정 없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한 명은 밝은 표정으로,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도도한 표
정으로.
쌍둥이의 시선을 받으며 축구부원들이 중앙으로 모였다.
“으�X! 으�X!”
빡빡고 축구부 애들이 소리를 지르며 곧 내들고 맞은편에 포지션대로 자리를 잡고 섰다.
그리고 곧 경기가 시작되는 호각소리가 울렸다.
삐익!
그리고 설마 하던 이변이 경기 시작 3분 만에 일어났다.
놀랍게도 선제골을 빡빡고 애들이 터트린 것이다.
“우와아아아아아!”
“쿠오오오오!”
“앗싸아아아!”
생각도 못한 이변을 일으키며 빡빡고 아이들이 포효를 내 질렀다.
그리고 응원하던 아이들도 난리가 났다.
“만세에에에에!”
“골이다아아!”
“야야~ 야야야야~ 야야야~”
그렇게 경기의 열기가 폭발해 나갔다.
***
“우리 왔어요오!”
“다녀왔습니다.”
선희와 경희, 두 녀석들이 학교를 마치고 화실에 들어왔다.
그런데 어째 경희의 인사가 이대봉을 닮아가는 느낌인데? 그나저나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신 웃고 있다.
“뭐, 좋은 일 있었냐? 왜 그렇게 웃어?”
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경희가 단번에 웃으며 대답했다.
“아하하, 오늘 경기가 엄청 재밌었걸랑.”
“경기? 무슨 경기?”
“아, 오늘 옆에 있는 빡빡고에서 축구시합이 있었어.”
“빡빡고는 또 뭐야? 그런데 축구시합?”
“응. 오늘 5교시 끝내고 학교 단체로 남고에 축구 보러 갔는데, 너무 재밌었어. 뭐 결국 5대4로 지긴 했지만. 그래도 내들고등학교 애들, 주전까지 몽땅
나오고,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나 축구 재밌다는 거 처음 알았어. 이젠 테레비에서 하는 축구경기도 꼭 볼래.”
“뭐야? 앞부분을 그냥 잘라먹고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알아들어?”
“아, 미안. 내가 너무 흥분했나 봐. 사실은 말이야.”
경희가 그동안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상세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처음 남자고등학교에 들어갔던 일이랑, 학교에 남자애들 찾아온 얘기.
그런데 평소였다면 수다스러운 경희가 안했을 리 없을 텐데.
하긴, 요즘 멍 때리는 시간이 많았으니 이런 이야기를 할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지.
아무튼 전후사정을 알게 된 화실 식구들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 정말로 무작정 남학교에 들어갔던 거예요? 요즘은 그게 되나?”
“그래도 승리의 쌍둥이 여신이라니. 너무 멋진데요?”
“아하하, 뭘요.”
경희가 웃으며 뒷머리를 긁자 선희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보동생.”
“아니거든!”
솔직히 내 입장에선 그게 어째서 대단한 일인지는 납득하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쌍둥이들이 남자고등학교에 들어간 일은 커다란 사
건인 모양이다.
물론 내 경우엔 축구부 애들, 그리고 경기 내용이 더 흥미진진하긴 했지만.
아무튼 본인 말로는 경기 전에 선수들과의 인터뷰에서 몰랐던 사실을 많이 깨달았다나 뭐라나.
“강팀과의 경기를 앞두고 남자애들이 긴장을 어찌나 하던지. 솔직히, 축구부 애들 평소에 소리 막 지르면서 길거리에 뛰어다니는 거 보고는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더라고.”
경희가 조잘 거리 길래 내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나를 대신해 어느새 데생 작업 중이던 선희가 입을 열었다.
“무식해보여.”
“야! 너는 말을 해도.”
“······.”
“못들은 척 외면하지 마!”
그렇게 두 녀석이 투닥거리던 그때, 이대봉이 화실을 찾아왔다.
“나 왔어요오!”
“어서와.”
이대봉이 들어오자마자 경희를 보더니 묻는다.
“우리 경희 콘티 작업한다더니 그건 잘 되어가고 있니?”
그러자 경희가 거만한 웃음을 지었다.
“후후, 잠시만 기다려 줘. 곧 완성할 테니.”
“오,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이네? 너희 오빠의 그 까다로운 기준을 과연 만족시킬 수 있다는 거니?”
“당연하지. 이번엔 진짜 자신 있거든.”
그렇게 말하더니 금방 경희가 자신이 오늘 작성했다는 메모지를 꺼내 확인하며 콘티노트를 수정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경희를 이대봉이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잠시 후 수정이 끝났는지 곧장 그 노트를 이대봉에게 내밀었다.
“오? 다 완성 한 거야?”
“아직 완성한 건 아니지만, 대충 수정이 되었으니까. 제임스 오빠가 한번 읽어보고 판단해 봐.”
“오호라, 그러니까 내가 모의고사라는 거구나.”
“모의고사보다는 솔직히 좀 부족하지.”
“너는 다 좋은데, 너무 직설적이야.”
그렇게 말한 이대봉이 콘티를 천천히 살펴본다.
처음엔 여유 있는 표정으로 노트를 펼쳤던 그가 잠시 후 표정이 심각해진다. 그리고는 곧 나를 돌아보더니, 불쑥 그것을 내민다.
“너, 이런 걸 퇴짜 놓은 거야?”
그 말에 경희가 버럭 했다.
“이거, 수정한 거라고!”
“아 참. 그랬지? 아무튼 수정한 콘티는 너무 좋아. 이제 네 의견을 들어보자.”
콘티노트를 받아 곧장 페이지를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전에 내가 말했던 대로 잡담이라 지적했던 부분은 거의 삭제를 해서 깔끔해져 있다. 하지만 놀라운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빡빡고인지 뭔지 하는 고등학교의 축구부 애들과 인터뷰를 했다더니, 전에 썼던 라커룸의 이야기가 더 생생한 느낌이었다.
전엔 단순히 재미있다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어린 선수들의 긴장된 마음이 놀랍도록 제대로 전해진다고나 할까.
과연 고교 강팀과의 경기를 앞둔 상황에서 애들이 얼마나 긴장했을지 파시엔시아의 콘티를 보니 그 마음이 더 진하게 느껴진다.
“이번엔 정말 좋은데.”
내 반응에 경희가 팔짝 뛴다.
“정말? 이번엔 인정하는 거야?”
“그래. 한편 정도는 이 내용을 그대로 넣어 사용해도 될 것 같네.”
“진짜? 한편은 몽땅 내가 쓴 이야기로 할 거야?”
“그래. 대사를 조금 수정해야 하겠지만, 그 정도는 뭐. 금방 될 것 같고.”
“아싸싸!”
곧장 경희의 콘티는 파시엔시아 중간 스토리에 삽입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해당 파트의 스토리료는 따로 계산해서 주기로 결정하고, 몇 곳을 수정한 뒤 곧장 선희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변한 건 경희의 콘티뿐만이 아니었다.
선희가 그린 데생에도 큰 변화가 생긴 것이다.
분명 스토리는 내가 넘겨준 콘티 그대로가 맞다. 그런데도 캐릭터의 느낌이 달라진 것이다.
뭐가 달라졌냐.
바로 같은 상황에서도 경기를 대하는 선수들의 절실함이 더욱 크게 와 닿을 정도다.
같은 대사라도 표정의 변화라든가, 장면 몇 개가 더해지거나 빼면서 캐릭터의 심리를 더 잘 표현한 것이다.
미래 식 표현으로 하자면, 압도적인 그림의 묘사로 스토리를 캐리해 버린 상황인 것이다.
그동안 파시엔시아는 솔직히 폼생폼사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멋에 살고 멋에 죽는다는 그런 느낌이 강한 만화였던 것이다.
그랬던 선희의 캐릭터 이해력이 늘어 더 생동감 있는 캐릭터로 변모해버렸다.
경희의 뜬금없었던 행동으로 인해 의도치 않았지만 선희도 같이 성장을 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파시엔시아 새로운 업그레이드에 가장 만족한 이는 바로 실버였다.
“이래야 나도 펜선을 넣는 맛이 있지.”
모처럼 실버가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 간헐적 천재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