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25화 (125/425)

< 간헐적 천재 (2) <5권 끝> >

경희가 서둘러 선희의 뒤쪽에 있는 책장으로 다가가 거기서 노트 한권을 꺼낸다. 그리고는 그것을 가지고 실버에게 가져다줬다.

작업을 중단한 실버가 경희가 건넨 노트를 받아 펼쳤다.

그리고 잠시 동안 그것을 읽어보던 실버가 피식 웃었다.

“이거 참신한데.”

뭐? 참신해?

또 병맛 개그 스토리로 만든 건 아니겠지?

“정말?”

경희가 팔짝뛰며 좋아한다.

“네가 한번 읽어봐라.”

실버가 그렇게 말하며 내게 경희의 노트를 가져다준다.

얼떨결에 노트를 받긴 했는데.

일단 노트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심각한 표정으로 째려봤다.

아무래도 전에 경희의 황당한 콘티를 읽었던 경험 때문인지 영 꺼려진 것이다.

얘가 또 이야기를 어떻게 난장판으로 만들어 놨을지 걱정이 되긴 하는데.

뭐, 물론 나야  받아줄 의무 따윈 없긴 하지만, 쟤가 또 매달리면 귀찮기는 하다.

의욕은 선희만큼 강한데, 재능은 좀 미묘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라.

그런데 내가 계속 노트만 째려보고 있어서 그런지 경희가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내 노트에 병균 있어? 표정이 왜 그래?”

“아, 내가 그랬냐? 표정관리, 표정관리.”

“우쒸. 너무해.”

경희가 허리에 손을 얹고 크게 화났다는 시늉을 해보이자, 곧장 시선을 피하고는 서둘러 노트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어디보자.

응? 경기장 내용이 아닌가보네.

뭔가 큰 경기를 앞두고 라커룸에서 벌어지는 선수들 간의 이야기가 주 내용인 듯 보인다.

일단 대사들은 그렇다 치고 콘티에 그려진 건 그림이 아니라 설명글이다.

이 파트엔 ‘엘리오, 마르틴 바닥에 앉아 심각한 모습임’이라고 적혀있고 그 위에 말풍선이 달려 있는 식이다.

설마 얘네들 이렇게 모여 앉아서 갑자기 병맛 개그를 시전 하는 건 아니겠지.

전에 봤던 콘티의 후유증이 너무 큰가보다.

계속 이야기가 병맛개그로 흘러 갈 거라는 생각 때문에 집중하기 힘들 정도니까.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의외로 대화는 정상적이고 사람들도 무난해 보인다.

어떤 대사는 생각과 달리 오히려 진중하고 무게감 있어보기도 한다. 가끔 센스 있는 대사도 마음에 들고.

하기야, 경희가 대사에 좀 센스가 있긴 하지.

전에 그 이상한 이야기도 센스는 제법 있었으니까. 물론 취향문제 때문에 감당하기는 힘들었지만.

아무튼 읽어가다 보니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콘티 속 대화에 빠져 들어갔다.

빈칸마다 누구의 대사인지 이름이 적혀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기가 좋다.

그럼에도 읽어나가면 나갈수록 묘하게 이들 모두에게 각자의 사정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몇몇은 나름 개성 있는 말투로 구체적인 성격을 보여주기도

하고.

물론 흘러가는 대화자체가 가끔 종잡을 수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화만으로 이만큼의 집중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놀라기는 했다.

이제까지 유소년팀 동료로 등장하긴 했어도 별다른 캐릭터성을 부여하지 않았던 인물들이 경희의 콘티 속에서는 나름 비중 있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

이다.

그동안 보였던 모습에서 성격을 파악했는지 캐릭터 구축도 잘 되어있다.

이제껏 강력한 상대팀과 싸우는 팀으로서의 이야기가 혹은 주인공의 활약에 중심을 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런 식의 라커룸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얘

기도 나쁘지 않았다.

특히나 강한 상대와의 경기를 앞둔 팀원들의 긴장한 모습도 잘 표현되었고.

주인공은 평소에도 대담한 편이라 별다른 고뇌를 많이 하지 않는 캐릭터로 설정한 탓에 이런 이야기가 별로 필요하지 않다고 은연중에 생각했었던 것

같은데 이런 식의 이야기도 상당히 재밌다.

어쩌면 경희라서 쓸 수 있는 이야기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거기다 이제까지 우리의 작품을 빠짐없이 여러 번 읽었던 경희답게 소소한 캐릭터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고 잘 살려간다.

조금씩 읽어가면서 나도 모르게 ‘이 녀석에겐 이런 과거가 있었구나.’ 혹은 ‘평소 경기 전에 이런 마음가짐이 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는

곧 이 모든 캐릭터를 내가 창조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란다.

경희 이 녀석 이런 재주가 있었네.

처음부터 자신이 창조한 얘기가 아니면 이런 식의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다는 건가?

생각해보면 일본의 유명 애니메이션 명감독이라 불리는 사람들조차, 이런 경우가 흔하다.

원작이 있는 작품을 더욱 멋지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만의 오리지널 작품에는 재능을 빛내지 못하는 감독들도 많다.

대표적으로 공각기동대, 페트레이버로 유명한 오시이 마모루나 내일의 죠, 보물섬,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만들었던 데자키 오사무 같은 사람들.

물론 경희의 병맛개그는 내가 제대로 이해를 못하는 분야인 만큼 확인과정이 필요하고, 이런 대감독들과 비교하는 것도 좀 이르기는 하겠지만.

아무튼 생각이상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얘도 나름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는 건가? 선희만큼 독보적이진 않지만, 간혹 이런 의외성을 보여주고 있다.

“어때?”

이번엔 예전처럼 기대감으로 반짝거리는 눈빛이 아닌 조심스러움이 엿보인다.

아무래도 전에 기대했던 작품(?)이 좌절된 경험이 있는 탓이겠지.

“음. 나쁘지 않네.”

“좋지도 않고?”

“좋아.”

이제야 경희의 표정이 밝아진다.

“정말?”

“그런데 아쉬운 점이 좀 많아.”

“뭔데? 뭔데?”

“대화 내용의 50%는 잡담이야. 스토리에선 필요 없는 대사. 그리고 사람들이 뒤섞여 말하는 부분은 누가누군지 구분하기 힘들어. 너무 난잡하고.”

“에이. 괜찮아, 괜찮아. 그런 거야 오빠가 사용할 생각이 있으면 알아서 바꿔.”

“네가 만든 거니까, 네가 마무리를 지어야지.”

내 말에 경희가 움찔하더니 곧 눈이 화등잔만해진다.

“뭐? 정말로 내가 마무리 지어?”

“그래. 할 수 있겠냐?”

“나, 그럼 통과된 거야? 이거 내 생애 최초의 일감을 받은 거 맞지?”

“뭐, 반려될 수도 있고.”

“그런 건 괜찮아.”

“이 파트 이야기라면 다음 경기 전, 라커룸 장면으로 넣으면 될 것 같으니까.”

“거기에 내 이야기가 들어간다는 거지?”

“들어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상관없어!”

“음. 시간이 별로 없어. 해볼래? 몇 가지 부분은 내가 가르쳐 줄 테니까.”

경희가 양손을 옴팡지게 꾹 쥐며 의욕을 보인다.

“응. 맡겨줘.”

***

평일 오후.

여자고등학교 하교시간.

학교 정문을 나서는 여고생들의 수다로 주변이 시끌벅적하다.

“어제 가요톱텐 봤어? 1위 바뀐 거.”

그 말에 다른 여자애가 손을 짝짝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눈물의 파티 4주 연속 1위 도전이었는데, 너무 아깝더라. 나 그거 보면서 좌절했다니까.”

“용필이 오빠가 1위를 빼앗기다니 충격이었어. 5주 1위는 기본이었는데.”

“난, 1위 노래 괜찮았어. 요즘 라디오에서 엄청 나오던데.”

“그런데 그거 부른 가수 말이야. 선희 너랑 이름이 똑 같더라.”

여자애의 말에 말없이 걸어가던 선희가 돌아본다.

“······?”

그런 선희의 반응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여자애들이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여름에 있었던 강변가요제 대상이었잖아.”

“그땐 남자랑 같이 듀엣 아니었니? 4막5장이던가?”

“노래는 엄청 잘 부르더라. 진짜.”

“그나저나 오늘따라······, 얘네 둘 다 왜 이러니?”

세 명의 친구들이 선희와 경희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선희는 평소에도 별로 말이 없는 편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의 경희는 정말 이상했다.

안 그래도 선희와 경희는 쌍둥이인데다가 머리스타일까지 비슷해서 구분하기 힘들다.

그나마 경희와 선희가 전혀 다른 행동과 말투를 가진 덕분에 평소엔 구분하기가 쉬웠는데, 오늘은 둘 다 말이 없으니 누가 누군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나마 선희는 평소처럼 말하면 반응이라도 하는데, 경희는 아예 반응도 없으니 더 이상하다.

“얘, 경희야!”

곁에 있던 안경 쓴 여자애가 툭 치자 그제야 돌아볼 정도다.

“왜?”

“너 오늘따라 이상해? 무슨 일 있니?”

“아니.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무슨 생각?”

“그냥······, 어?”

뭔가를 말하려던 경희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섰다.

“왜 그래?”

“······.”

같이 걸어가던 친구들이 모두 멈추었다.

선희도 뒤늦게 알고는 멈춰 서서는 경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경희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이 갔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남자고등학교다.

그런데 잠시 멈춰서 그쪽을 바라보던 경희가 갑자기 고등학교 안으로 들어간다.

그때 우르르 떼를 지어 하교 중이던 남자고등학생들이 화들짝 놀라며 길을 열어준다. 몇몇 남자애들은 경희를 보며 휘파람을 불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는 여자애들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얘, 경희야! 거긴 왜 들어가!”

“쟤가 갑자기 왜 저래?”

“선희야 네가 좀 말려 봐.”

그러자 선희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곧 경희를 따라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두 명의 여자애들이 갑자기 학교 안으로 들어가자 남자애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평소 선생님을 제외하면 금녀의 구역이나 마찬가지인 곳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선이 모여든 것이다.

그 때문에 세 명의 친구들은 발만 동동 구를 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소리만 쳤다.

“얘, 선희야! 경희야!”

“쟤들 진짜 미쳤나봐! 이걸 어째?”

“우리 어쩌니? 따라 들어갈까?”

“너도 미친 거니? 저걸 어떻게 들어가?”

“아, 정말.”

그 와중에 먼저 들어간 경희가 어딘가로 시선을 고정 시킨 채 걸어가다 곧 멈춰 선다.

남자고등학교의 운동장.

그곳에서는 지금 축구부원들의 연습경기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선희도 곧 그녀 근처에 다가와 같은 곳을 바라본다.

“······.”

운동복을 입은 남자애들이 먼지를 잔뜩 일으키며 운동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는 모습을 보며 경희가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오빠가 부족하다 이야기했던 부분의 실마리가 이곳에서 풀리지 않을까하는 묘한 기대감이 생긴다.

그동안 스포츠 만화와는 담을 쌓고 있었던 덕에 짧은 콘티를 쓰면서도 공감할 수 없는 장면이 제법 있었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제법 많은 양의 소설책을 읽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독자의 공감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점에 대해 오늘 하루 종일 고민해봤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인근 남자고등학교 축구부의 경기모습을 보니, 뭔가 떠오를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경희가 한참동안 말없이 축구부의 경기를 치켜보고 있다 보니 운동장에서도 슬슬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운동장을 뛰어다니던 축구부원들이 두 명의 여자애들을 의식한 것이다.

“억! 뭐야! 여자애잖아!”

“정말이네. 뭐지? 왜 우리 경기를 보고 있는 거지?”

“뭐야? 우리부에 저런 여자애들의 주목을 받는 녀석이 있는 거냐!”

“엇! 방금 날 봤어!”

“무슨 소리! 방금 나와 눈이 마주쳤구만.”

“이것들이 단체로 쳐 돌았나.”

“우오옷! 갑자기 힘이 솟는다! 난 이만기다!”

“축구장에서 이만기를 왜 찾아!”

“난 이준희다!”

“미친놈들! 여기가 모래판이냐?!”

한 녀석이 공을 가로채고는 미친 듯이 달려가며 외쳤다.

“내가 결승골을 넣고 말겠다. 평발 스트라이커 나가신다!”

“시끄럽다! 그 공은 내꺼야!”

운동장의 남자애들이 광기에 사로잡혀 미친 듯 공에 달려들었다.

< 간헐적 천재 (2) <5권 끝>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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