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21화 (121/425)
  • < 이젠 전쟁이다 (2) >

    지로를 통해 ‘다크 프린세스’ 연재에 대한 의지를 전달했다.

    그리고 다음날 모든 것이 다 준비가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월간지인 빅 히어로 편집부에선 따로 연재회의 없이 무조건 통과란다.

    우리 입장에서야 편하고 좋긴 하지만, 너무 일사천리라 좀 얼떨떨하긴 한데.

    아무튼, 월간지 연재가 결정되고 나자 가장 먼저 선희에게 일러둘 일이 있었다.

    “단순화 작업부터 하자.”

    “단순화?”

    “그래. 네가 꼼꼼한 그림을 좋아한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만화라는 게 일단 독자들에게 잘 읽히는 걸 목적으로 해야 하는 거야. 그건 잘 알고 있지?”

    내 말에 선희가 머리를 끄덕인다.

    “응.”

    “너무 복잡하기만 한 그림은 오히려 눈에 피로를 줘. 그림 한 장짜리 승부라면 모를까 그림을 이야기로 계속 넘겨보는 사람들에게 너무 복잡한 그림이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하거든.”

    잘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야무지게 머리를 끄덕인다.

    “응.”

    “앞으론 파시엔시아나 삼사라도 필요 이상의 디테일은 좀 삼가 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했으면 좋겠고.”

    선희가 눈알을 데굴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럼 시시하지 않아?”

    “아니, 절대로 시시하지 않아. 오히려 단순화 시키는 게 좋아. 그리고 그게 오히려 더 어려워.”

    어렵다는 말에 눈을 반짝이며 머리를 끄덕인다.

    “알았어.”

    주먹까지 꽉 쥐고.

    이런 걸로 납득한 거냐?

    제대로 이해는 한 건가?

    뭔가 맥이 확 풀리는 기분이다.

    하지만 이해를 했건 아니건 간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어쨌거나 선희가 오래 만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부분이었으니까.

    까놓고, 복잡하고 디테일한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부분 만화를 광적으로 좋아하거나, 혹은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일반인의 경우엔 사정이 좀 다르다는 거다.

    실제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들도 그림 하나만 놓고 보면 그냥 그런 수준의 그림도 많은 편이다.

    개인적으로도 그림이 복잡한데다가 스크린톤이 화려하게 된 그림보다는 전체적으로 단순화, 혹은 생략한 방식의 그림을 좋아하는 편이다.

    대표적으로는 ‘아리온’과 ‘비너스전기’의 만화를 그린 ‘야스히코 요시카즈’다.

    애니메이터 출신이며 초기 건담의 캐릭터 디자인을 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며, 후엔 ‘건담 디 오리진’을 만화로 그리기도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만큼 애니 작화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지만, 아리온과 비너스전기 극장판의 실패로 결국 애니판에서 떠났지만 후에 ‘건담 디 오리진’의

    OVA판 감독으로 복귀하기도 했다.

    1984년인 지금은 만화가인 동시에, 작년에 극장판 애니 ‘크러셔 죠’로 감독에 데뷔한 상황이다.

    아무튼 이 사람의 그림 특징이 복잡해 보이는 듯 해 보이지만 실제론 굉장히 단순화 시킨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만화가로서 어시를 두지 않고 혼자 작업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런 점은 토리야마 아키라와도 닮아있다. 그리고 대부분 붓으로 그리는 것도 특징이

    다.

    선희도 지금은 그림에 대한 욕심이 많은 편이라 되도록 밀도가 높은 그림을 그리려하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그런 그림은 언젠가 이 아이의 미래에 걸

    림돌이 될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론 디테일과 데포르메(단순화)를 적절하게 쓰는 노련함을 가지는 것이 가장 좋다고 판단하고 있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렇게 결정을 내리고 선희도 받아들인 상황이니 이래저래 바쁘게 된 건 사실이다.

    일단 내게는 다크 프린세스의 스토리 작업을 당장 시작해야하는 일 외에 선희의 그림에 참견해야 하기 때문이니 당연한 일이다.

    먼저 단순화가 잘 된 만화 몇 가지를 선정해 이태원으로 가서 책을 구입했다.

    지로에게도 다음에 올 때 가져올만한 만화책을 따로 불러주었다.

    그렇게 대략적인 준비를 한 뒤 선희가 연재용 원고인 삼사라와 파시엔시아를 끝내고 난 뒤 곧장 데포르메 작업에 돌입했다.

    선희가 내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난 스토리를 구상하다가 완성된 그림에 대해 한마디씩 거들었다.

    “이런 세세한 선은 생략해도 돼. 그냥 평범한 잔선으로 명암을 주는 것도 괜찮고.”

    “알았어.”

    “림보세계에서 어차피 나무가 없으니까, 내게 그린 설정을 여기 있는 만화들처럼 이런 방식으로 그려보면 어때?”

    만화책을 내밀며 말하자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곧장 배경에 그려 넣는다.

    “이렇게?”

    “너무 따라가지는 말고, 우리 쪽 배경에 맞게끔 변형시켜야지.”

    선희가 다시 그리더니 내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그럼 이렇게?”

    “음, 그래 이것도 괜찮기는 한데······, 좀 다르게 가보자. 사실 명암부분이 너무 강해도 곤란하거든. 잔선도 충분히 들어가야 입체감을 느끼지. 먹칠과 선

    만 있어도 그림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그 말에 여러 번 지우개질을 하며 그림을 고쳐나간다.

    그리고는 뭔가 마음에 들었는지 내게 보여준다.

    이번엔 좀 자신이 있다는 표정이다.

    “음. 좋아. 이정도면 괜찮겠네.”

    내가 웃으며 머리를 끄덕이자 선희도 만족했는지 입 꼬리를 살짝 끌어올린다.

    그림을 그렇게 하나하나 수정해 나가자 확실히 전에 비해 단순화 되었음에도 섬세함은 어느 정도 유지된 듯한 느낌을 준다. 거기다 일단 보기가 많이 편

    해졌다.

    거기다 선희 특유의 캐릭터 균형 감각이 더해지자 그림이 전에 비해 한 단계 상승했다는 게 느껴질 정도다.

    “이젠, 파시엔시아나 삼사라에도 조금씩 적용해봐. 갑자기 확 변하면 이질감이 너무 생길 테니까, 조금씩.”

    “알았어.”

    그림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지만 어시들은 그것을 금방 눈치 채기 시작했다. 특히 실버는 그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이거 제법인데? 그림의 입체감이 더 좋아졌군.”

    “느낌이 와?”

    “내가 무슨 해태 눈이냐? 이런 건 누구라도 눈치 챌 거다.”

    “누구라도는 아니지.”

    실버가 파시엔시아의 데생을 확인하며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이젠 파시엔시아 펜선에도 변화를 줄 시점이라는 거군.”

    “그냥 그 펜선을 유지해도 괜찮지 않을까?”

    “무슨 소리. 그럼 데생의 느낌을 제대로 살리지 못해."

    그 말에 근처에서 열심히 작업 중이던 정미자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로 조용하게 말했다.

    “죄송하네요. 데생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서.”

    “아, 아니. 그건 아니고.”

    자신감에 넘치던 실버가 금방 쩔쩔맨다.

    저 인간은 평소 그렇게 힘이 잔뜩 들어가는 말을 하면서도 정미자에게는 꼼짝을 못한다.

    사이가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그런 현상은 더 심하니, 보는 내가 다 딱할 지경이다.

    쯧쯧.

    그런데 사실, 정미자가 말은 저렇게 하고 있지만, 그동안 실버에게 엄청나게 특훈을 받고 있어서 예전에 비해 삼사라의 펜선도 엄청나게 좋아진 상황이

    다. 실버만큼은 아니라도 추양구에겐 충분히 필적할 정도로.

    아무튼 그런 분위기는 다른 어시들도 마찬가지였다.

    새로 들어온 김기철의 배경그림에 영향을 받았는지, 다른 세 사람도 배경을 단순히 데생대로만 그리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에 맞춰 변형시키고,

    그것을 다시 세 명이 의논해 서로의 스킬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젠 속도뿐만이 아니라 그림 자체도 많은 발전을 이뤄내고 있었다.

    정확한 평균을 판단하긴 힘들지만, 한국 내에선 이만한 인력을 구하는 게 이젠 어려울지 모르겠다. 어쩌면 일본에서도 마찬가지 일지도.

    이제는 세 개의 작품을 그리더라도 기존 두 작품에 비해 부담이 적으면서도 충분히 경쟁력 있는 그림이 되었다. 어시들에게도 충분히 여력이 생겨 커버

    가 가능해졌고.

    앞으로 남은 일은 매일 똑같이 진행될 일과를 별 문제없이 끌고 갈 컨디션 관리가 관건이다.

    그래도 부담을 줄였으니 충분히 해볼 수 있을 것이다.

    ***

    [월간 빅 히어로, 다크 프린세스 연재 확정]

    주간소년 히어로의 센터 컬러 홍보로 인해 편집부가 다시 바빠졌다.

    다크 프린세스의 연재에 대한 문의전화가 많아진 탓이다.

    “아우, 정신없어.”

    “빅 히어로 쪽은 더해. 그쪽은 정말 전화가 빗발친다더라.”

    “이거, 그쪽 편집장님 엄청 좋아하시겠네.”

    “안 그래도 매일 입이 찢어졌다더라. 요즘 소년 히어로 직원들만 보면 엄청 반갑게 인사하고. 정말 난리도 아니야.”

    그때 다른 직원이 이상한 표정으로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흐흐, 난 어제 밥도 얻어먹었지.”

    “억! 진짜냐?”

    편집부 직원들이 가끔씩 오는 전화를 받으며 이렇게 떠드는 사이 지로는 가방을 챙겨 외근준비를 서둘렀다.

    그때 야지마가 지로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어디 가는데?”

    “서점요. 담당 선생님께 책을 부탁받았거든요. 그리고 삼사라 팬들 모임이 있다고 해서 거기도 한번 들러보려고요.”

    “잘 됐네. 그럼 나랑 같이 가자.”

    “선배도 서점에 가시게요?”

    “어. 무카이 녀석, 아니 우리 무카이 선생께 가져다 줄 자료도 있고.”

    “그래요, 그럼.”

    지로가 대답하자 야지마도 서둘러 가방을 챙겨 그를 따라 편집부를 나섰다.

    두 사람은 출판사 건물을 나선 뒤, 택시를 잡아타고 시내에 있는 서점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먼저 서점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지로가 누군가를 발견하

    고는 멈칫했다.

    서점의 문을 열고 나오는 남자와 지로의 시선이 마주친 것이다.

    상대방도 지로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멈칫한다.

    그런데 그런 그의 손에 쥐어진 비닐, 그리고 다른 쪽 손에 쥐어진 잡지, 그건 소년 히어로였다. 문제는 그 책을 쥐고 있는 사내의 정체였다.

    그는 지로의 전 직장, 주간소년 토부의 편집장인 나사키 코지였다.

    “······.”

    “······.”

    순간 두 사람이 멈칫하자 지로의 곁에 있던 야지마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지로의 어깨를 툭 치고 말했다.

    “나, 먼저 들어갈게.”

    야지마가 서점 안으로 들어가자 눈을 크게 뜨고 있던 토부의 편집장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아카기 군. 오랜만이야.”

    “네. 안녕하세요. 편집장님.”

    “그래. 그 동안 잘 지냈나?”

    “네. 덕분에요. 그런데 편집장님은 여기 어쩐 일로.”

    “여기 지인도 만날 겸, 뭐 겸사겸사.”

    그렇게 말하더니 자신의 손에 쥐어진 소년 히어로에 지로의 시선이 닿았음을 알고는 살짝 당황하는 기색을 보인다.

    “아, 삼사라 요즘 잘 보고 있다네.”

    설마 토부의 편집장 입에서 저런 말이 튀어나올 거라고는 생각 못한 탓에 조금 놀랐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러시군요.”

    “듣기론······, 파시엔시아도 담당한다고 들었네만.”

    “네.”

    특별히 놀랄 일은 아니다.

    출판사 바닥은 좁으니까.

    그 역시도 최근 토부의 사정에 대해, 들은 바도 있었다.

    “······그랬군. 그랬어.”

    뭔가 약간 기가 죽은 듯 보이는 모습이다.

    그리고는 곧 지로를 향해 웃으며 어깨를 툭툭 친다.

    “그래, 그럼 나는 바빠서 말이지.”

    그렇게 말한 편집장이 손을 살짝 들며 돌아선다.

    그런 그를 향해 지로가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머리를 들어 편집장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힘없이 축 늘어진 어깨.

    최근 주간소년 토부가 폐간 될 거라는 얘기가 돌고 있었다. 아무래도 계속되는 판매부진이 이유인 모양이었다.

    지금은 수많은 만화출판사들이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는 시대다.

    그래서 출판사들은 히트 작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지금 멀어지고 있는 편집장은 이 시대의 패배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모든 것이 풍족한 시대이지만, 그만큼 처절한 약육강식의 시대.

    그런 무거운 생각에 빠져 들었다가 곧 몸을 돌려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 이젠 전쟁이다 (2)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