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20화 (120/425)

< 이젠 전쟁이다 (1) >

허겁지겁 문을 열고 무카이의 집에 들어온 야지마가 말했다.

“잘 돼 가고 있어?”

“완성된 건 그쪽에.”

무카이가 시선을 원고에 고정한 채 머리를 까닥거리며 말했다.

예전에 사용하던 책상은 진작 버려버렸는지 무카이는 지금 밥상위에서 원고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런 그의 곁을 보니 바닥에 원고들이 겹쳐져 놓여있다.

“야, 원고를 이렇게 바닥에 두면 어떡하냐? 잘 관리해야지. 얼레? 그런데 너 얼굴이 왜 그래?”

무카이의 눈 밑이 검게 변해있었다.

“설마, 못잔 거야?”

놀란 표정으로 물었지만 무카이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바쁘잖아. 어시도 없는데.”

그 말에 야지마가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 미안하다. 내가 요즘 어시 알아보고는 있는데. 쉽지가 않네. 친분이 있는 작가들이나 편집자들에게 모두 얘기해봤지만, 너도 알다시피 요즘 잡지

가 바빠지면서 다 일손이 부족한 모양이라서. 정말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소리는 한번이면 돼. 그리고 어시 쯤, 뭐가 대수라고. 정 안되면 혼자해도 되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잠깐은 괜찮지만 계속 이렇게 무리하면 죽을지도 몰라.”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어?”

“무슨 소리. 넌 뉴스도 안 봐? 가끔 지하철에서 과로사로 죽는 사람이 나온다는 거.”

그 말에 무카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야? 가만히 있는 사람을 부추긴 주제에.”

“아, 그것도 미안.”

“나 참.”

무카이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런 그를 웃으며 바라보던 그가 원고를 집어 들려하다 곧 시선이 방 한쪽 구석으로 향한다. 그곳엔 종이들이 구겨진 채로 잔뜩 쌓여있었다.

야지마는 원고를 집으려다 말고 버려진 종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구겨진 종이들을 펼쳤다.

잉크작업을 하다 만 원고였다.

다들 종이들도 한 장씩 펼쳐보니 다 그런 식이었다.

쫙 펼쳐 자세히 보니 나쁘지 않은 그림들이었다. 예전의 무카이 실력에 비해 조금 모자라는 감이 있지만, 그동안 쉬었던 기간이 길었으니 이 정도는 당

연한 일이다. 그리고 예상하던 일이기도 했다.

“이것도 괜찮은데 굳이 버릴 필요가 있었냐?”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버려진 원고가 수십 장에 이르니 황당할 뿐이다.

이제야 손이 빠른 무카이가 생각보다 작업량이 작은 이유를 알 것 같다.

하지만 굳이 원고를 이렇게 구겨버릴 이유가 있었을까.

“화이트로 수정하면 될 텐데.”

“화이트로 수정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잖아.”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이건 좀······.”

“스토리에 부끄럽지 않아야 할 거 아뇨.”

그 말에 야지마가 깜짝 놀랐다.

무카이가 이런 말도 할 줄 알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나름 오랫동안 고생을 하면서 정신적으로도 성장한 느낌이다.

야지마가 피식 웃었다.

“아. 그런 거냐? 장하네.”

“그게 싫다고. 담당이 말이야, 선생한테 장하네가 뭐야, 장하네가.”

“하하. 그건 그러네. 이것도 미안.”

그 말에 열심히 펜을 잡고 움직이던 무카이의 오른손이 멈칫하더니 이내 그가 한숨을 푹 쉬었다.

“화낼 맛도 안 나네.”

그러고는 다시 열심히 펜을 움직이며 원고를 작업하기 시작했다.

야지마는 그런 그의 곁으로 다시 다가와서는 바닥에 놓인 원고들 다시 펼쳐본다.

여전히 잔선을 많이 사용하는 그림이다.

데생의 느낌도 좋았지만, 펜선으로 완성된 무카이의 그림은 특별하다.

묘하게 사람을 끄는 외모의 캐릭터.

처음 야지마가 무카이의 그림을 보고는 가슴이 두근거렸던 그때가 떠오른다.

한동안 그림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만큼 다듬어 놓은 걸 보니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오히려 예전엔 잔선마저 너무 정확하게 그려놓은 탓에 오히려 기계가 그린 그림처럼 인간미가 없었는데, 지금은 굉장히 자연스러워 친숙한 느낌이 든

다.

나름 고민을 많이 했다는 증거다.

피식 웃으며 그림을 한 장씩 넘겨간다.

담당을 오래 한 탓에 익숙한 느낌이라는 건 변함없지만, 그동안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무카이도 성장을 많이 했다는 게 확 와 닿는다.

숲속에 있는 객잔의 그림에선 그리움이 느껴질 정도다.

느낌이 너무 좋다.

이번 중원 요리왕은 틀림없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아 참.”

원고를 다 본 야지마가 다시 바닥에 놓아두고는 곧장 자신의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종이 뭉치를 꺼내 무카이의 밥상 위에 턱 놓았다.

중원 요리왕의 복사한 네임이었다.

“이건 중원 요리왕 네임, 저번 것은 수정된 거.”

작업을 멈춘 무카이가 네임을 펼쳐 이야기를 읽어본다. 그런데 한참을 읽어가던 그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더니 곧 머리를 번쩍 들어 야지마를 쳐다본다.

“뭐야? 이거 변했는데?”

“어때, 느낌은?”

“확실히 좋아졌어. 무슨 일이야?”

“응. 삼사라 스토리작가 선생님이 대사부분을 좀 수정해 주셨다더라. 아무래도 제임스 선생님이 아직 일본어가 서툴러서.”

무카이도 제임스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들어 알고 있었다.

덕분에 대사에서 느껴지는 묘한 이질감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가져온 콘티의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문장을 살짝 고친 것만으로 이렇게나 다른 느낌의 만화가 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훨씬 재밌어.”

“그렇지? 나도 놀랬다니까. 고치기 전에도 굉장히 재미있었는데 이번엔 두 배 정도 더 재밌어진 것 같더라.”

두 배라는 말이 저렇게 실감나게 들리긴 처음이라 무카이도 무심결에 머리를 끄덕일 정도였다.

“아참, 그리고 이거.”

“······?”

야지마가 그렇게 말하며 이번에도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검은색의 서류봉투 하나를 꺼낸다.

“그게 뭔데?”

“축전.”

“축전?”

의외라는 표정으로 봉투를 받아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낸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러스트가 들어있었다.

“어? 이거······.”

캐릭터, 그림체 모두 확실하다.

순간 무카이가 감동하며 야지마를 돌아본다.

“어때? 마음에 드냐?”

“······다크 프린세스? 이거 설마, 써니의 그림이야?”

그 말에 야지마가 머리를 끄덕였다.

“맞아. 한국에 갔을 때 특별히 부탁해서 받아온 거야.”

“당신, 좋은 담당이잖아.”

“이제 알았냐? 그러니까 제대로 그려.”

보통 때라면 분명 버럭 하며 욕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어지간히도 감동했는지 머리를 정신없이 끄덕이며 대답한다.

“알았어! 미련이 남지 않게 모든 걸 새하얗게 불태울게.”

“아니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이거 그리다 죽어도 좋아!”

“미친놈아, 그러지 말라고!”

***

“오빠.”

“어?”

“이거 읽어봐.”

선희가 갑자기 예쁘게 생긴 편지지 한 장을 내 앞에 불쑥 내밀었다.

“이거, 팬레터 아니야?”

“맞아.”

“너 일본어 읽을 줄 알잖아. 모르는 글자가 있어서 그래?”

“아니. 그냥 읽어봐.”

선희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일단 선희가 내민 편지지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삼사라의 팬이면서 동시에 다크 프린세스의 열렬한 팬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더니 곧장 다크 프린세스를 왜 계속 연재를 해야 하는지 잔뜩 흥분된 느

낌의 문장이 주류를 이룬다.

결국 주 내용은 다크 프린세스를 연재하라는 건데······.

물론 빅 히어로 쪽에서 받은 대부분의 팬레터가 ‘기승전 다크 프린세스 연재요청’으로 끝나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작업량이 많다고 판단하는 중이라 일단 그 부분은 지로에게도 힘들다고 얘기해 두었는데.

“하고 싶어.”

“네 마음은 알겠는데, 그래도 지금 하는 게······.”

그런데 내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자신의 자리로 걸어간다.

삐진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곧장 자신의 자리에서 노트들을 잔뜩 챙겨들더니 내게 들고 와 테이블에 턱 놓는다.

“어? 이게 뭐야?”

“······.”

그런데 대답은 하지 않고 그냥 노트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직접 보고 판단하라는 뜻이겠지.

어쩔 수 없이 내려놓은 노트를 한권 집어 들어 그것을 펼쳤다.

“······!”

첫 장부터 종이를 빽빽하게 채운 그림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볼펜으로 그런 것도 있고, 연필로 그린 것도 있다.

낙서처럼 빈틈없이 그림을 꼼꼼하게 채워 넣었지만, 선희의 그림은 결코 낙서라고 보기엔 힘들 정도의 퀄리티다. 거기다 종이를 넘겨가다 보니 그림에

공통점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바로 다크 프린세스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주류를 이룬다는 점이다.

주인공 칼파나의 다양한 복장을 시범적으로 그린 그림부터 단편에서 등장했던 캐릭터들이나 배경들도 잔뜩 그려져 있다.

처음 보는 형식의 무기들과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들도 그림으로 잘 설명되어 있을 정도다.

전에 그렸던 설정집과는 달리 그냥 연습장에 그린 그림답게 두서없다는 느낌이지만 이것을 보는 것만으로 다크 프린세스가 선희의 머릿속에서 얼마나

그 덩치를 부풀려 왔는지 알만하다.

“이거······, 다크 프린세스 설정집이야?

“낙서.”

“낙서치고는 너무 디테일하네.”

그렇게 말하며 계속 연습장을 넘겨본다. 그리고는 문득 ‘언제 이렇게 많이 그렸지?’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동시에 선희가 왜 이것을 내게 보여주는

것인지 이해했다.

“연재 하고 싶다는 거야?”

내 질문에 머리를 끄덕인다.

어시들은 그런 우리들을 힐끔거리며 원고작업을 하고 있다.

일단 선희의 손을 이끌고 옆방으로 건너갔다. 그리고는 조용하게 말했다.

“네 마음은 알고 있어. 하지만 지금 작업량도 많은 거 알잖아.”

“그래서 방금 보여줬는데.”

알고 있다.

연습장에 그린 분량을 보니, 원고와는 또 다른 차원이라는 걸.

어차피 내가 원고를 못하게 해도 이런 식으로 그림은 계속 그려나간다는 것도.

하지만 선희의 작업량은 이미 내 상식을 벗어난 상태다.

고등학교를 다니는 여자아이가 아무리 데생뿐이라고 해도 두 작품이나 주간 연재를 하고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거기서 다시 연재를 하나

더 하겠다니.

물론, 월간 연재라 주간보다야 부담이 덜 하겠지만, 그래도 지금 작업량이 더해질 것이다. 그래서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내가 얼굴을 계속 찌푸린 채로 있으니 선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고 싶어.”

“그렇게 하고 싶니?”

“응.”

표정이 굳건하다.

하긴, 그동안 일부러 두 편의 원고 데생 말고는 시키지 않는데도 뭔가를 끊임없이 그리고 있다. 하지만 진짜 원고랑 낙서처럼 그리는 그림의 부담은 다

르다는 게 문제다.

물론 선희에게 원고가 부담스러운 건지 확신은 서지 않지만.

그런데 그때였다.

“하고 싶다는 데 그냥 좀 시켜줘도 괜찮잖아.”

어느새 실버가 다가와 있었다.

아까 화장실에 간다더니 지나가다 우리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모양이다.

“나는 말이야. 누가 그림을 못 그리게 하면, 목을 졸라버릴 거야.”

그 말에 목이 뻐근해진다.

저 인간은 말로 사람을 진짜 죽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림쟁이로 태어난 이상, 기회가 있는데도 그것을 제지당하면 참을 수가 없게 되지.”

“그건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야.”

“아, 그런가? 그럼 너도 선희의 마음을 잘 알겠구만.”

“······.”

스스로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

하지만 선희만 해결된다고 끝날 문제는 아니다.

그런 내 생각을 알고 있었을까?

실버가 입을 열었다.

“펜선은 여유 있으니까.”

“배경도 괜찮아요. 파시엔시아 배경을 기철이 혼자 담당하니까, 제가 할 일이 별로 없거든요.”

“뭐, 저희도 요즘엔 배경에 여유가 있고요.”

언제 왔는지 어시들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선희가 이젠 어쩔 거냐는 표정으로 날 본다.

뭘 저렇게 당당하게 쏘아보는지.

나는 이내 혀를 한번 쯧 하며 차고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선희에게 말했다.

“절대로 무리하면 안 돼. 원고에 매달리는 시간이 지나치게 길면 그땐 무조건 중단이다.”

내 말에 선희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잡지에 연재되는 건데,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냐?”

“돼! 내가 무조건 그렇게 만들 거니까.”

내 말에 선희가 옅게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 이젠 전쟁이다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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