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원 요리왕 (5) >
소년 히어로 편집부.
지로가 만화잡지를 뒤적거리고 있다가 야지마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어? 벌써 돌아왔어요?”
“어.”
야지마가 웃으며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는 지로가 보는 잡지를 슬쩍 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뭐야? 후레쉬점프? 너, 타 회사 만화잡지를 편집부에서 너무 당당하게 읽는 거 아니냐?”
“뭐, 어때요. 이것도 공분데.”
“하하, 공부는 무슨. 그런데 무슨 만화를 그렇게 열심히 봐?”
야지마의 질문에 지로가 잡지를 펼쳐 보이며 대답했다.
“토리야마 선생의 단편요.”
“토리야마 선생?”
“네. 조만간 닥터슬럼프 연재를 끝낸다는 얘기가 있더라고요. 긴가민가했는데 후레쉬점프에 단편 작을 이렇게 계속 올리는 걸 보면 그 소문이 맞는 모
양이에요.”
“음,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뭐였지? 거 뭐냐. 용 나오고 중국무술 하는 소년 나오는 단편 본거 같은데.”
“‘기룡소년’이요. 선배도 그거 보셨군요. 그때 소년점프에선 ‘쵸빗’이라는 단편도 올렸고.”
“그래 그거. 그동안 개그물만 열심히 그리더니 갑자기 스타일을 바꾼 모양이던데. 그런 거 그리려는 건가?”
“그래도 개그가 전문이니까, 결국 개그 쪽으로 가지 않겠어요? 아무튼 분위기 봐서는 올해 안에 신작 내지 않을까요?”
“너, 엄청 팬인가 보다.”
“그럼요. 저 닥터슬럼프도 다 모았는데요.”
그 말에 야지마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편집자라는 녀석이 타 잡지 만화가 팬인 게 자랑이냐?”
“하하.”
“그나저나 그 토리야마 선생도 참 별나지. 그렇게 잘나가는 만화를 왜 끝내고 싶다는 건지.”
“왜긴요. 이젠 돈도 많이 벌었겠다. 같은 패턴의 만화가 질리신 거죠.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자꾸 먹으면 질리잖아요.”
“비교예시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뭐. 그럴지도. 어쨌거나 차기작이 뭐가 될지는 몰라도 닥터슬럼프를 넘기는 어려울 거야.”
그렇게 말하며 지로 앞 자신의 자리에 털썩 앉았다.
“아마도요.”
“그나저나 6년차 신인 만나러 가신 일은 잘되셨습니까?”
지로의 질문에 야지마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얼레?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그것도 6년차란 것까지. 나 뒷조사 하냐?”
“내가 무슨 스파입니까? 부편집장님이 말씀해 주셨어요.”
“아.”
“어떻게 됐어요? 만났어요?”
“만났지.”
“작화 맡을 거래요?”
“조금 있으면 알게 되겠지.”
야지마가 마치 남의 일 인양 느긋하게 말하며 의자에 등을 푹 기댄다.
그 모습을 보던 지로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조금 있으면 이라니, 뭔 말이에요? 못 만났어요?”
“너 관심이 지나친 거 아니냐?”
“네? 제가 그 네임 가져다 준거 잊었습니까?”
“아, 참. 네가 중계자였지?”
“······.”
“······아, 저기 오네.”
“······?”
누군가 서류봉투를 쥔 채 편집부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말끔하게 생긴 젊은 남자다.
“야지마 씨!”
“어, 왔어?”
야지마가 손을 흔들며 말하자, 무카이가 인상을 팍 썼다.
“뭐야? 그 태도는. 나 올 거 알고 있었다는 얼굴이잖아. 기분 나쁘네.”
“미안.”
“영혼 없는 사과 따윈 됐으니까, 빨리 회의합시다.”
야지마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지로를 힐끔 본다.
‘봐, 맞지?’하는 표정으로.
“뭐해요?”
무카이가 재촉하자 야지마가 어깨를 으쓱했다.
“뭘 그렇게 서둘러. 커피 한잔씩 마시고 천천히 하지.”
“당신 담당 맞아? 왜 그렇게 느긋해?”“난 샐러리맨이잖아. 만화가들이랑은 다르지. 열심히 한다고 돈을 더 주길 하나, 그렇다고 만화가가 알아주길 하
나.”
“젠장, 그런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고. 그게 담당이 할 소리야?”
“하하.”
“뭐가 우스워?”
무카이가 버럭 했지만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곁에 있던 지로를 확인하고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아, 무카이 인사해. 이쪽은 내 후배 아카기. 몇 달 전에 입사해서 잘 모를 거야.”
갑자기 후배를 인사시키는 야지마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는 곧장 지로에게 인사했다.
“무카이 하지메입니다.”
“안녕하세요. 아카기 지로입니다.”
그때 야지마가 지로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무카이에게 말했다.
“너, 앞으로 이 친구에게 잘 보이라고.”
“당신이 내 담당인데 왜 다른 편집자에게 잘 보이라는 건데? 어, 설마 담당 바뀐 거야?”
“설마.”
“그럼 왜?”
“이 친구, 삼사라랑 파시엔시아 담당이야. 지금 여기서 제일 잘나가는 편집자. 차기 편집장 자리 따 논거나 다름없는 인재야.”
야지마의 말에 지로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윽, 뭡니까. 사람 당황스럽게.”
하지만 무카이는 삼사라와 파시엔시아의 담당이라는 말에 벌써 경악하고 있었다.
“뭐요? 진짜!”
“그래. 네가 들고 있는 그 네임도 이친구가 물어온 거고.”
“······.”
“그러니까 알겠지. 이 친구를······.”
야지마의 말을 끊고는 곧바로 꾸벅 90도 인사를 했다.
“다시 한 번 인사드릴게요. 전 무카이 하지메라고 하고, 나이는 23살. 데뷔 6년차지만 2년을 놀았고······.”
“야야,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저자세로 굴면 어쩌자는 거야. 네가 그러면 내 체면이 뭐가 돼?”
“내가 왜 당신 체면까지 신경 써야 돼? 나 혼자 해먹기도 바쁜데.”
“하아, 이 자식 사회생활 좀 하더니, 순 나쁜 것만 배웠네.”
“험한 세상 살아가는 참지식이지. 그리고 이 자식이 뭐야, 앞으로는 선생으로 불러.”
“나 참, 어이가 없네.”
그렇게 말한 야지마가 곧 낄낄거렸다.
그러자 무카이도 이내 같이 낄낄거리며 웃는다.
두 사람을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던 지로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 두 사람, 묘하게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
“여기가 써니 선생님 댁이라고?”
“네.”
분명 한국임에도 일본인인 야지마에게 익숙한 형태의 주택이라는 생각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한국에는 예전 일본인들이 거주했던 건물들이 아직 남아 있는 곳이 많습니다.”
“용케도 전쟁 통에 남은 건물들이 있구나.”
야지마가 중얼거리는 사이 지로가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렇게 막 들어가도 돼?”
“네. 평소엔 문 안 잠가둬요.”
“아.”
안으로 들어가자 잔디가 깔린 작은 마당과 2층집 주택이 눈에 들어온다.
커다란 창문이 여럿달린 형태인데, 아무래도 좀 손을 봤는지, 전통적인 일본주택과는 비슷한 듯 하면서 다른 느낌이다.
“······?”
두 사람이 안으로 마당을 지나 주택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꼬마 아이가 고양이를 꼭 껴안은 채 어기적거리며 잔디 위를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아이가
너무 작아서 그런지 아래로 축 늘어진 고양이의 다리가 바닥에 닿을 랑 말랑 한다.
그런데 그때.
“어어.”
아이가 비틀거리더니 앞으로 풀썩 넘어진다.
니아아아아앙!
앞으로 넘어지는 바람에 아이는 안전했지만 사이에 끼인 고양이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던 두 남자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몸을 일으켰지만, 하얀 고양이는 바닥에 축 늘어져 있다.
“어? 저 고양이 죽은 거 아니야?”
“놔둬요. 평소에 저렇게 노는 모양이니까.”
“평소에?”
야지마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곧 지로를 따라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화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나름 한국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실내의 장식이 생각이상으로 괜찮다. 뭔가 알 수 없지만, 책상이나 벽의 색, 전체적인 느낌이 생각보다 세련되어
꽤나 놀랐다.
그렇게 두 사람이 실내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지로를 알아보고는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그리고 곧 지로가 능숙한 한국어로 그들과 인사를 하다 자신을
소개한다.
야지마는 출발 전에 익혀둔 어설픈 한국어로 간단한 인사를 하자 그들도 자신을 반겨준다.
곧 지로가 야지마를 데리고 한 쪽 자리로 다가간다.
약간은 날카로워 보이는 얼굴, 얼핏 운동한 사람의 느낌을 풍기는 젊은 남자에게로 다가가서는 인사를 하며 뭔가 이야기하자, 그가 입을 열었다.
“아, 대봉, 아니 제임스 형, 스토리 담당하실 분이군요.”
“선배, 이쪽이 텐겐 스토리작가 선생님이세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편집부에서 짧게 스치듯 본 기억이 났다.
“아, 네. 안녕하세요. 야지마 준입니다.”
“네. 이윤환입니다. 역시 텐겐이 더 익숙하려나.”
그렇게 말하며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인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화실로 들어온다. 일반인이라고 보기엔 너무 잘 생긴 남자다. 마치 연예인 같은 외모.
그런 사내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지로에게 한국어로 인사한다. 그 때 지로가 그를 야지마에게 소개하자, 그가 약간 어눌한 일본어로 입을 열었다.
“반가워요. 제임스랍니다.”
이 사람이 중원 요리왕의 스토리작가 제임스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외모가 결코 이 바닥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제임스가 머리를 갸웃하며 야지마를 바라본다.
“나, 안 반가운가?”
“아, 죄송합니다. 안녕하세요. 야지마 준입니다. 앞으로 선생님의 담당을 하게 될 편집자입니다.”
“네, 반가워요.”
조금은 독특한 사람이지만, 밝은 느낌의 사람이라 야지마는 안심했다. 스토리가 제법 꼼꼼하게 만들어져 있어, 작가정신에 찌든 별난 사람일거라 생각
했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서로 인사를 나눈 뒤, 곧장 한쪽 대화를 위해 옆방으로 이동했다.
***
“이건 작화 선생님의 네임입니다.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야지마가 이대봉에게 복사된 종이들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은 이대봉이 그림을 보고는 표정이 밝아진다.
그러더니 다 본 콘티를 내게 한 장 내민다.
일반적인 콘티가 아니라 거의 원고 느낌에 가까운 디테일한 그림이다.
연필로 그렸지만 의도적으로 강약을 줘서 그림에 입체감을 능숙하게 표현했다. 전에 듣기론 신인이라던데, 이 정도라면 보통의 신인처럼 보이지는 않
는데.
아무튼 느낌은 마크로스의 일러스트레이터인 미키모토 하루이코의 그림과 비슷해 보인다. 물론 전체적인 디테일은 더 섬세한 느낌이고.
특히 콘티의 그림인데도 중국의 절경이 잘 표현되어 있다.
한 장씩 넘기며 콘티를 보니, 이대봉이 만든 것과는 전혀 다른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하기야, 이대봉이 만화가가 아니니, 칸나누기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겠지. 물론, 그동안 전상길 화실이나 여기저기 화실에서 콘티를 만들었다고는 해도
대본소 만화 같은 단순한 형태로만 만들어 봤을 테니.
덕분에 만화는 실제 이대봉의 콘티에 비해 느리게 진행이 된다.
시작부분의 열 페이지가 전부 중국 풍경을 표현하는데 할애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주인공이 살고 있는 객잔의 풍경도 제법 상세한 느낌이다.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그들을 맞이하는 점소이 역할의 주인공.
너무나 자연스럽게 묘사되어있다.
“네임인데 디테일하네요. 특히 이런 중국 객잔의 풍경이 자연스러워요.”
“네. 안 그래도 이 장면을 만들기 위해 중국무협 영화비디오를 보며 작업했다고 하더군요. 장면, 장면을 멈추거나, 혹은 필요에 따라 사진까지 찍어서
작업했다고 합니다.”
엄청나다.
그림에 대해서는 완벽주의자인 모양이다.
이정도면 선희에게도 많은 공부가 될 것 같다. 디테일한 부분만 따지면 선희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만화적인 느낌에선 선희보다 조금 더 나은 것처
럼 보인다.
“상당한 그림실력이군요.”
“네. 나름 그림에서는 충분히 인정받았던 친구거든요.”
“그렇겠군요. 그런데 이런 사람이 아직 신인인가요?”
“데뷔한 건 6년입니다만, 그동안 작가로서 활동이 미비해서요. 중간엔 어시생활도 많이 했고.”
“아.”
“원고는 더 디테일할겁니다. 이 작품에 모든 걸 건다는 기분으로 그릴 생각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요?”
“그 만큼 제임스 선생님의 스토리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 말에 이대봉의 입이 찢어진다.
“이거 스토리 만드느라 정말 고생했어요. 윤환이 너도 잘 알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너무하잖아. 그렇게 꼭 말해야 하니?”
“······.”
곧 이대봉을 외면하고 야지마에게 물었다.
“그럼, 편집회의는 통과한 겁니까?”
“네. 여기 이 3회분의 콘티만으로 연재가 결정되었습니다. 편집장님도 크게 만족하셨습니다. 연재는 3주 뒤부터 시작하기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 중원 요리왕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