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16화 (116/425)
  • < 중원 요리왕 (2) >

    지로가 화실을 찾아왔다.

    “어? 이번엔 일찍 오셨네요? 몇 주 정도 더 있다 오실 줄 알았는데.”

    “아, 네. 뭐, 이것도 가져다 드릴 겸해서요.”

    왜 이렇게 어물쩡거리지? 뭐 숨기는 거 있나?

    뭐, 대단한 건 아닐 테지.

    난 금방 어깨를 으쓱해버리고 말았다.

    어쨌건 그가 가지고 온 물건에 더 관심이 가니까.

    빅 히어로에서 받았다는 팬레터 박스랑, 선물박스, 그리고 최근 녹화를 시작했다는 ‘중전기 엘가임’ 비디오테이프에다 최초의 OVA인 ‘달로스’까지 가

    지고 왔다.

    박스를 확인하자마자 제일 신난 건 선희와 경희다.

    경희가 기쁨에 소리를 질렀다.

    “와, 엄청나게 많아!”

    선희는 편지, 경희는 선물.

    이미 전에 받았던 팬레터와 선물도 선희가 자신의 방에 따로 잘 모아두었다.

    선희는 틈만 나면 혼자 2층 베란다로 올라가 팬레터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본인 말로는 편지를 읽으면 에너지가 차오르는 기분이라나 뭐라나.

    뭐, 좋은 뜻이면 된 거지.

    아무튼 경희도 선물을 확인하며 좋아라 한다.

    “와, 이거 예쁘다.”

    예쁘게 생긴 인형들을 만지작거리다 품에 앉고는 좋아 죽는다.

    그런 모습을 보다가 곧장 중전기 엘가임이라 적혀있는 비디오테이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현재 일본에서 한참 방영 중인 애니로, ‘더 파이브 스타 스토리’의 ‘나가노 마모루’가 무명이던 시절임에도 캐릭터와 메카닉 디자인을 맡았던 작품이다.

    물론 감독은 건담의 아버지 ‘토미노 요시유키’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해서 실시간 방영 중이던 것을 지로에게 따로 부탁한 일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한국에 올 때 녹화 테이프와 몇 개의

    테이프를 따로 구입해 달라는 부탁도 해 두었다.

    사실 이런 것을 위해 화실을 이곳으로 옮길 때 가장 먼저 산 전자제품도 바로 비디오였다.

    화실 바로 옆방에 따로 설치해 두었는데 모두에겐 신세계를 경험하게 만드는 물건이었다.

    경희는 가끔 즐겨보는 드라마 같은걸 녹화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고, 어머니도 토요일과 일요일에 하는 더빙 외화들을 좋아하셔서 따로 녹화해서

    한 번씩 돌려보시기도 한다.

    아무튼 곧장 비디오테이프를 플레이 한다.

    “새로운 만화예요?”

    “제목이 뭐예요?”

    “중전기 엘가임요.”

    “무슨 만화인지 아세요?”

    “로봇만화요. 지금 일본에서 방영중인 만화인데 건담을 만든 감독이 만든 겁니다.”

    “와, 그래요?”

    화실 식구 몇몇이 옆방으로 넘어와 같이 시청을 한다.

    자막도 없는 비디오임에도 전혀 지루하다는 표정 없이 신기하다는 듯 열중해 본다.

    “와, 정말 일본은 만화 천국이에요. 어떻게 저렇게 그릴수가 있죠? 볼 때마다 감탄할 수밖에 없어요.”

    박수미가 감동한 얼굴로 엘가임에 열중하며 말했다.

    새로 들어온 두 명의 어시들과 선희도 사람들 사이에 끼어 꽤나 열중해 본다.

    이 시절 TV에서 방영 중이던 애니 대부분이 오래된 것이거나, 혹은 아동용 애니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고 퀄리티의 신작 애니를 한국에서 본다는 건 거

    의 불가능에 가깝던 시절이다.

    듣기론 부산 지역에선 안테나 성능만 좋다면 일본방송도 잡힌다는 얘기도 있고, 위성안테나를 달아 일본방송을 시청하는 사람도 있다는 소문도 들었지

    만.

    아무튼 이 시절엔 이런 만화를 거의 실시간이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본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적인 일인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 만화영화를 시청하는 사이 모처럼 이대봉이 화실을 찾아왔다.

    “나 왔어요오.”

    그렇게 말하더니 사람들이 전부 모여 비디오 시청에 열을 올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호기심어린 표정이 된다.

    “모두 뭐 봐요?”

    “제임스 오빠도 이거 봐. 재미있어.”

    “아, 나중에.”

    그렇게 말하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지로를 발견하고는 곧장 그에게 다가간다.

    “여어, 반가워요. 아카시 씨.”

    “안녕하세요.”

    그런데 갑자기 이대봉이 일본어로 말한다.

    “일부러 저 때문에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아뇨, 안 그래도 화실에 들려보려던 참이라, 괜찮습니다. 그런데 일본어 잘하시네요.”

    “그럼요. 저 죽기 살기로 했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웃는다.

    내가 듣기에도 제법 일본어가 능숙하다.

    언제 저렇게 일본어를 익힌 거지?

    “진짜,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중이신가 봐요.”

    지로의 질문에 이대봉이 히죽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요. 이젠 미래도 생각해야하니까.”

    미래?

    “미래를 생각하는데 왜 일본어야? 영어 아닌가?”

    내 말에 이대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지. 영어가 맞지. 하지만 미래도 가까운 게 있고 먼 게 있으니까.”

    “뭔 소리야?”

    “나도 이젠 일본을 목표로 삼았어.”

    “뭐? 그럼, 슬슬 일본을 노리는 거야?”

    “흐흐흐흐. 자자 일단 자세한 건 저쪽으로 가서.”

    그렇게 말하더니 마루 쪽으로 지로와 나를 데리고 가서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리고는 가져온 가방을 열어 그곳에서 노트 하나를 꺼내 펼친다.

    “여기 콘티, 아카기 씨. 한번 읽어봐 줘요. 윤환이 넌, 복사본.”

    “두개나 준비했어?”

    “네가 지적한 거 모조리 고민해서 고친거야. 그동안 한국 음식에 대한 공부를 무지하게 했는데, 일단 그건 나중에 하기로 하고, 지금은 고대 중국배경의

    음식이야기에 집중하기로 했어. 역시 한국보다는 중국배경이 더 좋을 것 같으니까.”

    “잘 생각했어.”

    뭔가 호기심이 들어 서둘러 복사한 종이를 펼쳤다.

    지로는 이미 노트를 열심히 읽어가고 있다.

    첫 장에 적힌 제목은 ‘중원 요리왕’이다.

    중원 요리왕?

    요리왕 비룡(원제: 중화일번) 같은 제목이네.

    하지만 일단은 이 만화가 나온 게 1995년경이니까, 아직 봤을 리도 없겠지만.

    하긴, 전에 봤던 제목인 ‘식도락’이 좀 촌스럽다고 한소리 했더니 이렇게 바꾼 모양이다.

    그래도 소년만화를 노린다면 이쪽이 훨씬 더 좋긴 하겠네.

    그나저나 어떤 내용일까나.

    콘티를 펼쳐보니, 그림에 재능 없는 이대봉답게 졸라맨들의 향연이다.

    이 인간이 아무리 콘티라고 이런 식으로······.

    하기야, 만화가도 아니니.

    그래도 배경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적혀있어 대략적인 분위기는 알 것 같다.

    전에 봤던 형식의 일상물은 확실히 아니다.

    중원이 들어간 제목답게 배경은 고대 중국이 배경이지만, 일단 시대적 배경이 자세히 나오진 않는다. 그냥 보통 무협지 배경 쯤 되는 시대겠지.

    외진 마을의 자그마한 객잔을 운영하는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주인공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10살밖에 되지 않은 주인공이 요리에 대한 재능이 엄청나서 점점 객잔이 유명해져 많은 이들이 찾게 되는 곳이 되어간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대부분이 그렇듯, 무공이 엄청난 정체불명의 인간이 등장해 객잔에서 요리를 먹고 감탄하는 이야기, 그리고 그를 쫓아온 무리.

    결국 이들의 싸움에 객잔 전체가 풍비박산이 나고, 부모도 희생된다.

    아이는 결국 홀로 남게 되었지만, 이런 이야기가 으레 그렇듯 엄청난 고수의 늙은이와 인연을 가지게 된다.

    흔히 말하는 기연을 얻은 것이다.

    물론 그 인연의 시작은 옥미갱(玉米羹) 이라는 음식을 노도사에게 해주면서 시작된다.

    맛있는 요리에 반한 노도사가 주인공 꼬마 아이들 데리고 다니게 된다.

    요리를 통해 그에게 무공을 조금씩 전수받으며 부모를 희생시킨 무리를 찾아 나선다는 일종의 복수물이다.

    전에 쓰던 스토리와 전혀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는 방식임에도 전혀 어색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이대봉 특유의 언어적 센스가 살아있어 읽는 것

    이 즐거울 정도다.

    그동안 수없이 내게 까이면서 꿋꿋하게 스토리를 만들어가더니, 결국 이만한 걸 만들어 버렸다.

    물론, 아직은 몇 장면에서 개연성부분이 걸리긴 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장점이 너무 많아 충분히 경쟁력이 있어 보인다.

    정확한 거야 알 수 없지만, 이만하면 충분히 재미부분은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아직은 도입부분이라 뭐라 딱 꼬집어 말할 단계는 아니지만, 일단 무협이라는 배틀물의 형식과 음식이라는 것을 조합한 느낌, 거기다 자연에서 음식재

    료를 구한다는 부분은 토리코와도 비슷해 보인다.

    물론 그런 것들보다는 시대적으로 엄청 앞서있으니, 이쪽이 원조가 되려나?

    그나마 이대봉이 만든 무협세계엔 한국인에게 익숙한 무협의 구파일방 같은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인이 좋아하는 요괴 같은 이야기도

    좀 등장하는 걸 보니, 제대로 먹힐지 모르겠다.

    일본에서는 한국에 알려진 전통적인 무협보다는 서유기나 봉신연의 같은 형식의 다소 판타지적인 게 인기가 있으니까.

    대략 5화 분량의 콘티라 그런지 오래지 않아 다 읽어버렸다.

    지로도 이미 다 읽었는지 노트를 덮은 상태다. 그리고는 나를 보며 묘한 표정이 되어있다.

    나와 지로의 표정을 번갈아 바라보던 이대봉이 결국 나와 시선을 맞췄다.

    “이번 건, 어때?”

    “문제점이 없는 건 아닌데, 확실히 재밌네. 이전보다 훨씬.”

    내 말에 이대봉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리곤 곧장 지로 쪽으로 홱 돌아본다.

    “저도, 재밌어요. 이런 이야기는 저도 처음이지만, 확실히 재밌군요. 뭔가 봉신연의 느낌도 나고.”

    역시 지로도 봉신연의 얘기를 하는걸 보면 이번엔 이대봉이 세계관을 만들기 전에 조사를 좀 많이 한 모양이다.

    이 인간, 역시 스토리 재능에 끝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시대적 한계 때문에 보이는 허술함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제임스 씨. 이거 연재하면 엄청 재밌을 거 같은데요.”

    “아카기 씨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기쁘네요. 하지만, 이거 그려줄 사람이 없어.”

    “그 점은 제가 알아봐도 될까요?”

    지로의 말에 이대봉의 눈이 커다랗게 떠진다.

    “아카기 씨가요?”

    “네. 전 지금 이미 두 작품이나 하고 있는 입장이라, 현재로선 제임스 씨의 작품을 담당하는 건 무리일겁니다. 편집부에서도 한 편집자는 두 작품까지만

    담당하게 돼 있거든요.”

    “흐응, 난 아카기 씨가 담당해주면 좋겠지만, 사정이 그렇다면 뭐. 그나저나 작화만 담당해줄 사람을 정말 이어줄 수 있어요?”

    “그럼요. 편집부에선 스토리와 작화를 이어주는 역할도 하는걸요.”

    “작화를 담당해줄 만화가와 만나야 하는 건가요?”

    “아뇨. 만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네임은 담당 편집자가 되실 분에게 전달해주시고, 내용에서 설명이 필요한 부분도 알려주시면 그대로 작화를 맡

    은 분께 전달해 주는 방식입니다.”

    일본은 출판사가 거의 중계 역할을 한다.

    유명한 ‘히카루의 바둑’ 이나 ‘데스노트’도 스토리작가와 만화가가 직접 만난 건 일 년에 한두 번 그것도 연말행사 같은 곳이 전부였다고 하니.

    물론 그런 점이 개인적으로 좋다고 보는 건 아니다.

    모든 것을 출판사를 거쳐 해야 하는 탓에 문제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니까.

    하지만, 지금의 이대봉에겐 어쨌건 기회니까.

    “확답은 드리지 못하겠지만, 일단 여기 복사된 네임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그리고 회의를 통해 결정이 나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좋아요오.”

    이대봉도 기분이 좋은지 어깨를 까닥거리며 싱글벙글이다.

    그때 언제 다가왔는지 경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와아! 제임스 오빠, 일본 가는 거야?”

    “으앗, 깜짝이야!”

    “대봉이 형이 가는 게 아니고, 원고가 가는 거지.”

    “그럼, 제임스 오빠도 돈 많이 버는 거 아냐?”

    그 말에 이대봉이 턱을 긁적이며 근엄한 표정을 짓는다.

    “어쩌면, 그럴지도······.”

    “와아, 그럼 제임스 오빠 나 좀 써 줘라.”

    “왜? 식모하게?”

    “칫, 그게 아니라 스토리, 스토리.”

    “자자, 아카기 씨. 오늘은 수고하셨고, 그럼 다음에 또 만나요.”

    “무시?!”

    그 모습을 보던 지로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 중원 요리왕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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