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원 요리왕 (1) >
“평소처럼 간짜장?”
아주머니의 질문에 선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네.”
“잠시만 기다려.”
“네.”
물 컵 한잔을 선희 앞에 놓던 주인아주머니가 잔뜩 미소 지으며 부엌 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부엌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온다.
“여보, 간짜장 하나. 일본 집에서 온 단골 아가씨.”
“오, 그래. 특별히 고기도 많이 넣어서 맛있게 만들어야겠구만.”
“그래요. 고기도 엄청 좋아하던데. 팍팍 넣어.”
“알았어, 알았어.”
이곳은 화실에서 자주 단체로 식사를 시켜먹는 중국집이다. 그런데 선희는 종종 데생 원고를 마무리하면 이곳에 와서 혼자 간짜장을 시켜먹곤 했다.
처음 이곳의 화실로 이사 와서 먹었던 간짜장이 너무 맛있어서 “자주 먹고 싶다.” 고 중얼거렸더니, 오빠인 이윤환이 “그럼, 데생 한편 마무리하면 와
서 먹으면 되겠네.” 라고 하는 바람에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꼬박꼬박 찾아오고 있었다.
덕분에 이곳 식당 부부는 선희를 잘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첫 번째 식사 때 선희가 보통을 시켜 남김없이 그릇을 싹싹 비우고 아쉬운 표정을 짓고 돌아가는 모습을 본 이후론 일부러 같은 가격으로 곱빼
기 이상의 양을 주고 있었다.
간짜장이 준비되고 있는 사이 선희는 곧장 가져온 연습장을 꺼내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연습장에는 최근 그렸던 그림들이 빼곡히 그려져 있다.
대부분 새롭게 만들고 있는 다크 프린세스의 배경이 되는 림보의 지형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림보는 세상에 없는 지형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 배경을 계속 구상 중이었음에도 마음에 드는 그림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동안 그녀의 오빠인 이윤환이 많은 사진이 실려 있는 책자를 구해다 주었지만, 이야기 속 림보의 세계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느낌이라 계속 좌절하
고 있었다.
물론 이윤환은 늘 “이 정도면 괜찮은데.”라고 얘기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달랐던 것이다.
림보라는 세계는 단순히 삭막한 외국지형을 가져다 쓴다고 만들어질 세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직은 연재를 하지 않고 있지만, 스스로도 꼭 연재를 하고 싶은 작품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이야기의 중심 세계에 대한 배경은 완성해야 하는 것이다.
선희가 미간에 잔뜩 힘을 주며 고민에 빠져있을 때 아주머니의 음성이 들렸다.
“간짜장, 나왔어.”
그렇게 말하며 다가오더니 선희 앞에 그것을 내려놓는다.
곱빼기 분량의 간짜장.
위에 얹힌 계란 프라이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자 저절로 침이 꿀꺽 삼켜진다.
“특별히 고기도 많이 넣었어. 혹시 부족하면 얘기해 더 줄 테니까, 알겠지?”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계란 프라이를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입안에서 터지는 노른자의 맛에 몸을 살짝 떨었다.
그렇게 잠시 맛을 느끼다 곧 간짜장을 비빈다.
비벼지는 소리에 귀가 즐거워지자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그렇게 다 비빈 후 입에 면을 집어넣으려다 순간 젓가락이 공중에서 멈췄다.
“······?”
문득 자신의 눈앞에 놓인 간짜장에서 뭔가를 본 것이다.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다 곧 어깨를 으쓱하고는 곧장 면을 입에 밀어 넣는다.
그러다 다시 멈칫했다.
“······!”
순간 선희의 머리에 뭔가가 스쳤다.
입에 묻은 짜장에 신경을 쓸 겨를도 없이 곧장 연습장에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간짜장과 면의 기묘한 형태에서 자신이 만들고자 한 그 세상의 지형을 떠올린 것이다.
고기와 야채로 이뤄진 산등성이와 면으로 이뤄진 지대.
상상으로만 떠올려야했던 림보의 지옥 같은 지형의 모습이 놀랍게도 그릇 안에 펼쳐진 것이다.
선희는 면을 입에 넣은 채 오물거리며 서둘러 연필로 그것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선희가 쥔 연필이 평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연습장 위를 뛰어다닌다.
슥슥슥
다음 페이지에도 새로운 모습을 그려나간다.
그렇게 몇 장의 그림을 완성하고 나자 다시 면을 먹기 시작한다.
후루룩 후루룩
면이 입속으로 들어가는 와중에도 선희의 눈은 오로지 그릇 안만으로 집중하고 있었다.
원하는 형태가 나올 때를 노리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손이 멈추었다.
더 괜찮은 모양이 나타났다.
다시 선희의 연필이 빠르게 움직이며 스케치를 해 나간다.
즐겁다.
재밌다.
흥분된다.
이제껏 사진을 만화의 배경으로만 줄곧 사용하다가 전혀 뜻밖의 것을 보고 새로운 것을 떠올리는 것이 이렇게나 재미있다는 걸 새롭게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배경은 어떤 것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 깨달았다.
‘간짜장 먹기를 잘 했어.’
그런 생각을 하며 먹고 그리기를 반복하는 데 바로 그때였다.
선희가 연필로 한참 그리던 노트를 누군가 불쑥 채가 버린다.
순간 빈자리를 움직이던 선희의 연필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
선희가 움찔 하더니 머리를 서서히 들어올린다.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처음 보는 20살가량의 머리가 짧고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보인다.
그가 선희의 노트를 보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때 남자의 동료로 보이는 두 명의 남자들이 그에게 낄낄거리며 말한다.
“야야, 애 거를 왜 뺏고 그래?”
“저런, 나쁜 새끼.”
“누가 뺏는대? 잠시만 보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웃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뭐야? 도대체 뭘 그리고 있는 거야? 설마 짜장면을 그리고 있었냐? 살다, 살다 이런 거 그리는 애는 처음 봤네.”
그렇게 이죽거리더니 선희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입가에 묻은 짜장이라도 좀 닦아라.”
그렇게 말하며 이죽거린다.
식당에 손님이라고는 그들밖에 없는 상황.
식당주인아주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는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기, 총각. 그거 그냥 돌려주면 안돼요?”
“누가 훔쳐가요? 그냥 보기만 할 거라니까.”
“······.”
아줌마가 움찔거리며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선희는 별다른 표정 없이 그런 남자를 빤히 올려다보기만 한다.
그러자 남자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왜? 돌려달라고?”
그 말에 선희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여자애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쳐다만 보자 장난기가 발동했다.
“‘돌려주세요, 오빠.’ 이렇게 말해봐.”
그렇게 말하며 낄낄거린다.
“······.”
“그럼 공손하게 돌려줄게.”
“······.”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인상을 찌푸린다.
그때 식당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도 남자는 신경 쓰지 않고 여전히 똑같이 말했다.
“돌려주세요, 오빠. 이렇게만 말하면 바로 돌려준다니까.”
그런데 황당하게도 그가 원했던 대답은 뒤쪽에서 들려왔다.
“돌려주세요, 오빠.”
뭔가 징그럽게 느껴지는 음성.
남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떤 새끼가······.”
그렇게 말하며 홱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그곳엔 남자 두 명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명은 잘생기고 날렵해 보이는 남자, 그리고 한쪽은······,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포스를 뿌리는 덩치 큰 사내다.
순간 말문이 턱 막히는 기분이다.
친구들 쪽을 바라보니 이쪽에 시선을 거둔 채 열심히 짜장면만 흡입하고 있다.
“······.”
“돌려주세요, 오빠. 됐지? 이젠 돌려줄 거지?”
잘생긴 남자가 싱글거리며 말하고 곁에 있는 남자는 살벌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
꿀꺽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는 그들을 바라봤다.
덩치 큰 남자가 자신이 들고 있는 노트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서둘러 노트를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남자의 눈에서 피어나오는 안광이 목을 조르는 기분이라 도무지 기를 펼 수가 없다. 서둘러 슬금슬금 물러나더니 동료들이 있는 자리로 가서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먹다 만 짜장면을 먹기 시작했다.
“선희는 또 간짜장이니? 볶음밥이 더 맛있지 않아?”
“간짜장이 좋아.”
“그래, 그래. 얘는 지 오빠 닮아서 고집이 세다니까.”
그렇게 말하며 실실 웃는 표정으로 이대봉이 선희 앞에 앉는다.
그러자 그의 곁에 무표정한 실버가 앉았다.
“난 볶음밥, 너도 볶음밥 먹을 거지?”
“짬뽕.”
“에이, 그래도 짬뽕보다는······.”
“짬뽕.”
“에휴, 알았어. 아줌마, 여기 볶음밥 하나랑, 짬뽕 하나요!”
그런데 실버의 시선이 곧장 세 명이 모여 있는 테이블로 향한다.
세 명의 남자중 한 사람이 딸꾹질을 한다.
실버가 여전히 그들을 계속 바라본다.
남자 셋은 그런 실버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줌마에게 돈을 지불하고는 식당을 빠져나간다.
“너는······. 좀 그 살벌한 눈빛 어떻게 해라. 사람들이 무서워하잖아.”
“난 그냥 보기만 했어.”
“그게 무섭다는 거야. 그게.”
그렇게 말하며 이대봉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런 와중에도 선희는 다시 간짜장을 후루룩 먹으며 그림을 그리느라 정신이 없다.
“어이구, 정말 얜 그림밖에 모른다니까.”
혀를 차며 말하던 이대봉이 곧 피식 웃었다.
***
두 사람이 각자 커다란 박스 한 개씩 들고 소년 히어로 편집부 안으로 낑낑거리며 들어왔다.
그리고는 가장 먼저 부딪친 직원에게 물었다.
“저기, 삼사라 담당하시는 분 자리가 어디죠?”
“저 쪽인데, 어디서 오셨어요?”
“아, 네. 저희는 빅 히어로 편집부 직원인데요. 이 박스 삼사라 담당 편집자님께 가져다드리라는 명령을 받았거든요.”
그때 지로가 편집부로 들어오자 자리를 가르쳐주던 직원이 손을 흔들며 불렀다.
“아카기 씨. 여기 좀 와 봐요.”
“네?”
“빅 히어로에서 오셨다는데 아카기 씨 찾는데.”
“아, 네.”
박스를 가져왔던 그들은 일단 지로의 자리 근처로 가 박스를 내려놓고 땀을 닦으며 말했다.
“이거 저희 편집장님께서 삼사라 담당자님께 가져다 드리라고 하셔서요.”
“저 한 테요? 이게 뭔데요?”
“저희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전해 드렸으니까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네. 수고하셨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지로에게 인사하며 돌아간다.
지로는 서둘러 박스를 개봉했다.
그런데 그 속에는 엄청난 양의 편지와 포장된 선물들이 가득하다.
“이게 다 뭐야?”
그때 편집부로 빅 히어로의 편집장이 들어왔다.
“어, 아카기. 박스 받았지?”
“이게 다 뭡니까?”
“여기 편집장에게는 미리 전화를 했는데······, 실은 이거 써니 선생님에게 날아온 팬레터랑 선물이야.”
“어? 그런데 왜 빅 히어로에?”
“왜긴 다크 프린세스 때문이지.”
“아.”
단편이긴 하지만 어쨌건 빅 히어로에 연재했으니 그럴 수는 있다.
그런데 단편 하나 연재했는데 이 많은 팬레터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거, 다크 프린세스 연재요청 팬레터야. 아마도 거의 다 그럴걸?”
“네?”
“제발, 연재 해달라고 편집부로 전화도 수없이 왔다니까.”
하긴, 다크 프린세스라면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이미 코미케에서도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었으니까.
“써니 측은 뭐래? 아직 연재 생각이 없다는 거야?”
“네. 일단은 작업량 때문에 생각중이라고 합니다.”
“······그래, 그건 이해하지. 그래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다면 가끔 단편이라도 좋으니까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꼭.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나, 가볼게.”
손을 흔들며 빅 히어로의 편집장이 돌아간다.
그 모습을 본 직원들이 지로를 힐끔거린다.
그리고 팀장이 다가와 툭 친다.
“너, 요즘 너무 잘 나가는 거 아니야?”
“아, 네. 하하.”
“요즘 실적 엄청나지? 보너스도 많이 받았을 거 아니야.”
“······.”
“술 한 잔 사. 알겠지?”
“네. 뭐. 그 정도야.”
“긴자에서.”
“······.”
그때 직원 중 한명이 전화를 받더니 잠시 후 지로를 부른다.
“아카기 씨. 전화.”
“저요?”
“응. 그런데 발음이 좀 이상해. 일본인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윤환의 화실에서 온 전화라면 그곳에서 일본어가 가능한 이는 세 명이다.
이윤환과 이선희, 그리고 실버.
하지만 모두 일본어에 능통하다.
발음이 이상하다니, 그럼 누구지?
곧 전화기를 들었다.
“소년 히어로 편집부, 아카깁니다.”
- 아카기 씨. 나에요. 나.
갑자기 전화기 너머에서 한국어가 들려온다.
익숙한 음성이긴 한데 뜻밖의 사람이다.
“아, 제임스 씨?”
- 오, 금방 알아듣네요. 맞아요. 제임스.
역시 이대봉이다.
그제야 어눌한 일본어라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일본어를 공부하는 중인 걸까?
“안녕하세요.”
- 네엥. 저도 전화상이지만 반가워요.
“그런데 어쩐 일로.”
- 저기, 나. 아카기 씨한테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저한테요?”
- 네.
따로 할 말이라니, 뭘까?
지로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뭡니까?”
< 중원 요리왕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