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타입 (4) >
“아무래도 붓으로 그린 배경은 일반 배경보다는 더 생생하다고나 할까, 눈에 더 띄잖아.”
내 말에 여전히 실버가 입 꼬리를 끌어올린 채 말했다.
“후후, 대만이나 중국에 붓으로만 그리는 만화가가 몇몇 있긴 하지. 그렇지만 펜으로 커버하지 못할 배경 따윈 없어.”
오, 역시 펜 마스터다운 자신감.
“그럼 형도 이런 스타일의 배경이 파시엔시아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아직은 모르지. 그리고 그건 화실 대장인 너나 선희가 결정해야 할 문제 아니냐? 내가 무슨 결정권이 있다고. 나야, 결정되면 그에 맞는 스타일로 그리
기만 할 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표정에서는 묘한 기대감이 보인다.
“알았어.”
“배경으로 넣을 거지?”
“알아서 한다니까.”
“끄응. 그래.”
저렇게 미련이 남는 표정이라니, 역시 기대를 하고 있구만.
“그런데, 이거 누가 그린 거냐? 새로 온 남자애?”
“어.”
“호오, 눈에도 잘 안 띄게 생긴 녀석이 재미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네.”
“형이 너무 눈에 띄는 거지.”
“······그거 칭찬 아니지?”
“······.”
*
한 참 데생 중이던 선희에게 다가가 물었다.
“데생 원고 두 페이지만 연습용으로 만들어 줄래?”
“왜?”
“새로운 스타일의 배경을 실험해 보게.”
“그럼, 이거 써도 돼.”
그리던 원고 중 두 페이지를 집어서는 내게 내밀었다.
“어? 이거 다음 원고잖아. 간단하게 그리면 돼.”
“다시 그릴거야. 그거 마음에 안 들어.”
“그래?”
내 눈엔 괜찮아 보이는데.
뭐, 본인이 다시 그리고 싶다면 그렇겠지.
곧바로 그것을 들고 실버에게로 갔다.
“여기.”
내가 파시엔시아 데생 원고 두 장을 내밀자, 실버가 그것을 받더니 시선을 김기철에게 돌린다.
“야, 신입. 너 아까 그리던 거 가져와 봐. 혹시 다른 것도 있으면 그것도 몽땅.”
“앗, 네!”
김기철이 책상 앞 책꽂이에서 백지 노트를 하나 꺼내더니 서둘러 그것을 들고 뛰다시피 다가온다.
아무래도 실버가 어렵게 느껴진 모양인지 군기가 바짝 들어 있다. 그 상태로 노트를 실버에게 내밀었다.
“그래. 됐어.”
“네.”
김기철이 쭈뼛거리며 돌아가자 노트를 펴서는 옆에 펼쳐두고는 그것을 한참 바라본다. 그리고는 자신 앞에 놓인 수십여 개의 펜을 고른다.
실버는 평소에도 저렇게 수십 개의 펜을 꺼내놓고 작업을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손때가 많이 탄 것 같아 보이는 펜을 들어 펜선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펜선이라고 보기엔 굉장히 굵은 느낌의 선이 펜에서 뽑혀져 나온다. 그리고는 가늘고 긴 선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슥슥슥
평소보다 좀 더 몰입해 보이는 모습.
아무래도 새로운 펜선의 테스트를 겸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평소보다 더 거칠고 강한 펜선이 주류를 이루는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그림의 입체감은 더해져 간다.
잠시 후 두 페이지의 펜선이 마무리되자 그것을 바로 김기철에게 넘겼다.
그런데 실버에게 받은 원고를 보며 움찔 놀라는 모습이다.
아무래도 강렬한 펜선에 압도된 탓이겠지.
“자, 네 스타일대로 마음껏 그려봐.”
곧 김기철이 날 보며 물었다.
“정말, 제 스타일로 그려도 될까요?”
“어. 한 번 마음 놓고 원하는 대로 해. 실패해도 괜찮으니까. 처음부터 실패를 염두에 두고 그리는 원고거든.”
그런데 내 말을 들은 실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푹 쉰다.
“하아, 뭔가 힘 빠지네.”
“왜?”
“온 힘을 기울여서 그린 펜선인데 실패해도 된다고 쉽게 말하니까.”
그 말에 김기철이 움찔거린다.
“형은 왜 부담을 주고 그래?”
“부담을 이기는 것도 어시가 할 일이야.”
하긴.
이미 배경을 맡아 그려야 하는 입장이라면 당연한 말이다.
그래도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김기철을 돌아봤는데, 의외로 담담해 보인다.
방금까지 긴장을 잔뜩 하는 것 같더니 막상 그림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표정이 달라진 것이다.
붓을 가지고 배경을 슥슥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여자 어시들도 그런 김기철의 그림이 궁금한지 작업을 하면서도 힐끔거리고 있다. 물론 보이지는 않겠지만.
데생 속에 나오는 배경을 확인하고 세 개의 붓 중에서 적당한 것을 고른다. 그리고 잉크병에 먹물을 섞어 농도를 조절하더니 붓을 찍어 빠르게 그려나
가기 시작했다.
가는 선과 굵은 선을 적당히 조절해가며 그려나간다.
처음엔 묘하게 이질감이 느껴지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천천히 배경으로서의 느낌이 자리를 잡는다.
자를 사용하지 않아 묘하게 이질감이 생길수도 있을 텐데도 그런 느낌이 거의 없이 자연스럽다. 오히려 자를 사용하지 않아 더 느낌이 산다고나 할까.
덕분에 배경이 생동감이 있다.
실버의 펜선이 들어간 인물 캐릭터 뒤의 배경이 묘하게 어울린다.
기존의 실버가 그리던 펜선과 조금 다르다 여겼는데, 이렇게 배경과 합쳐지니 정말 한사람이 그린 것처럼 너무 자연스럽다.
그렇게 한참을 그리던 김기철의 붓이 멈췄다.
“다 됐어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왜 그렇게 땀을 많이 흘려?”
“긴장해서요.”
그렇게 말하며 어색하게 웃는다.
배경이 완성되자마자 먹칠은 제외한 채로 지우개질만 한 뒤 선희에게 가져갔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어시들이 선희의 자리로 모여들어 그림을 살핀다.
모두 의외라는 듯 깜짝 놀라는 분이기다.
하지만, 먼저 선희의 반응이 궁금했는지 모두 입을 열지 않고 선희를 힐끔거린다.
“다시 안 그릴래.”
“그게 무슨 소리야?”
“이거 마음에 들어.”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살짝 미소까지 짓는다.
“그럼, 이 방식으로 갈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응.”
선희가 머리를 끄덕이며 만족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아 원고 작업을 시작한다.
“이번 화부터는 파시엔시아 배경은 너에게 맡기겠어. 속도 보니까 너 혼자 다 그릴 수 있겠던데. 괜찮겠어?”
“네. 이 정도의 퀄리티라면 혼자서 주당 30페이지까지는 커버할 수 있습니다. 무리하면 40페이지까지도······.”
그 말에 내가 김기철의 말을 끊었다.
“무리를 왜해? 그리고 기본은 20페이지니까 지금의 페이스만 잘 유지해 줘.”
“아, 네.”
*
전상길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며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쉽네. 이젠 파시엔시아 완전히 가져가는 건가?”
“네. 배경맨도 구했고 했으니까. 그동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그 말은 오히려 내가 해야지. 네 덕분에 화실 운영에도 도움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지금도 평발 스트라이커를 그리고 있으니까. 아 참, 이번 원고
료.”
그렇게 말하며 평소처럼 두툼한 봉투 두 개를 내민다.
내거랑 박상식의 것이다.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요즘 상식이는 바쁜가보네.”
“아, 네. 요즘 신작 콘티 만드느라고요.”
“신작? 단독작품?”
“네. 가끔 제가 돕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이야기는 상식이 형이 다 만든 거니까요.”
“그래? 궁금하네. 예전에 강형석 선생의 곰탱이시리즈 원작자였지?”
“네. 안 그래도 이번 새롭게 준비하는 이야기가 그때 그 곰탱이 시리즈를 다시 다른 식으로 만든 겁니다. 그때 마무리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어서요. 물
론 캐릭터의 이름과 내용은 전혀 다르긴 하지만.”
“나도 곰탱이시리즈는 재밌게 봤었는데. 그런데 누구랑 작업할 생각이래?”
“글쎄요. 일단 스토리를 어느 정도 완성시키고 그다음 찾아볼 생각이라고 하더군요.”
그 말에 전상길이 머리를 끄덕인다.
“그래. 일단 이야기부터 완성하는 게 먼저지. 아 참, 잊고 있었는데 잠시만.”
그렇게 말하더니 소파에서 일어서서는 자신의 자리로 간다. 그리고는 책상위에 있던 비닐봉투와 종이박스 하나를 들고 왔다. 그리고는 그것을 내게 내
밀었다.
“이게 뭔데요?”
“문방구에 납품될 예정인 평발 스트라이크 문구류들이랑 딱지.”
“문구요?”
박스를 열어보니 지우개, 필통, 책받침에 공책까지 있다.
비닐봉지엔 애들이 가지고 노는 동그란 종이 딱지다.
이 모든 것에 평발 스트라이커의 컬러 그림이 그려져 있다.
“다시 영업 시작하셨어요?”
“영업이라니, 사업이지. 아무튼 조그마한 회사 몇 곳이랑 계약해서 만든 샘플들이야. 돈은 조만간 들어올 테니까, 그때 줄게.”
“네.”
이 인간 차라리 만화 그리지 말고 사업을 해봐도 될 것 같은데.
“아, 그리고 평발 스트라이커 콘티는 이제 좀 더 빨리 넘겨줘. 요즘 작업속도가 많이 빨라졌거든. 거기다 이젠 너희 파시엔시아 작업도 안하니까 더 빨
라질 테니까. 괜찮지?”
“네. 다음엔 세권 분량 이상씩 넘겨드릴게요.”
“그래 부탁해.”
평발 스트라이커의 스토리는 파시엔시아에 비해 비현실적인 부분이 많고, 이야기는 가볍지만 아직 만화방에서의 인기는 엄청 높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작업량이 많아서 파시엔시아에 비해 효율은 떨어진다. 그럼에도 평발 스트라이커를 그만두지 않는 이유는 바로 스토리 감각을 계속
유지시켜주는 훈련이 연재만화에 비해 좋은 편이라 그렇다.
현금이 빨리 돈다는 장점도 있지만, 그보다 빠르게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된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그래. 시간 나면 새로 옮겼다는 화실 구경삼아 한번 들릴게.”
“네.”
***
“어?”
한국에서 날아온 박스에 들어있던 원고를 보고 지로가 깜짝 놀랐다.
삼사라는 기존과 달라진 것이 없었는데, 파시엔시아는 한눈에 보기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인물 펜터치가 더 강렬해 졌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그보다······, 배경의 변화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존 배경은 그동안 외주로 작업했던 덕분에 퀄리티는 그냥 평범한 수준이었다.
솔직히 스포츠 특유의 실감나는 이야기와 인물펜터치가 다 커버하고 있던 터라 배경의 부족함 따위는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번 배경은 완전히 달랐다.
디테일 부분에서는 좀 아쉽기는 하지만, 반대로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보면 충분히 대단하다고 할 수 있는 그림이었다.
펜이라고 하기엔 그렇고······.
자세히 원고를 들여다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이거? 설마 붓인가?”
그렇다면 이건 정말 혁명이었다.
배경을 붓으로 그렸다니.
물론 이런 방식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스포츠 만화에서는 처음이다.
붓을 이렇게까지 능숙하게 다뤄서 배경을 그릴 정도의 실력자라니.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곧장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카깁니다. 이 선생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선생님. 안녕하세요.”
- 네. 안녕하세요. 아카기 씨.
“이번에 보내신 파시엔시아 배경 말인······.”
그러자 대뜸 이윤환이 물어온다.
- 괜찮죠?
“네? 아 네. 상당히요. 이거 붓으로 그린 거 맞습니까?”
- 네. 맞아요. 그래서 인물 펜선에도 변화를 줬고요.
“아, 그렇군요. 그래서 배경이 이런데도 위화감이 없군요.”
대단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펜선이었다.
이런 느낌의 배경을 가지고도 인물이 결코 죽지 않으니.
- 천천히 파시엔시아에 적용하려했는데, 생각보다 잘 어울려서 바로 원고에 넣었습니다.
파격적인 방식의 변화.
그럼에도 결코 이전의 만화에 비해 큰 이질감이 없다.
오히려 갑자기 더 안정감을 찾은 느낌이랄까.
“하하, 그나저나 이거 혹시 키도선생님이 보시면 또 불태우시겠군요. 안 그래도 그쪽 어시들 고생 많다고 들었는데.”
- 네?
그때 마침 편집부로 키도와 담당인 테고시가 들어온다.
그런데 들어오던 키도가 전화기를 든 채로 한쪽 손으로 원고를 들고 있는 지로의 모습을 본다.
키도가 서둘러 다가오자 지로가 화들짝 놀랐다.
“어, 그거. 파시엔시아인가?”
“앗! 전화 끊어야겠습니다. 키도 선생님이 이 원고를 보셨어요.”
- 네? 그게 무슨······.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서둘러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원고를 다시 서류봉투에 넣으려 했지만 이미 키도는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이 휘둥그레져 있다
지로는 이마에 손을 얹고는 곧 한숨을 푹 쉬었다.
“늦었다.”
“오옷! 또냐! 또 레벨업인건가?!”
“서, 선생님!”
또 편집부가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 뉴타입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