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타입 (3) >
기본적으로 경희의 콘티 속 배경은 여학교다.
이 당시 인기 있던 순정만화에 등장하는 귀족생활을 하는 여학생들의 이야기다.
그런 곳에 신입생으로 들어온 여자애가 주인공인데······.
이것도 자주 보던 클리셰이긴 한데.
아무튼 이런 무난한 배경인데, 웃기는 건 주인공 여자애가 좀 이상하다는 점이다. 아니, 정확히 내 입장에서 보자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보인다.
“어때? 재밌어?”
“······.”
“표정이 왜 그래? 이상해?”
“너, 평소 책 많이 읽는다고 하지 않았어?”
“당연하지.”
“혹시 평소 읽는 만화책이 있냐?”
“그럼. 유리가면도 좋아하고. 캔디도 좋아해.”
평범하잖아.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튀어나와?
뭔가 메인이 되는 캐릭터의 행동이 종잡을 수 없다.
앞으로의 전개는 정말로 예상하기 힘들고, 납득이 되지 않는 주인공의 주절거림이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거기다 제일 적응하기 힘든 건 절대 예측할 수 없는 뜬금없는 전개다.
“이 타이밍에 왜 우는 거야?”
“감동적이잖아.”
“어디가?”
“어? 앞에 설명 나오잖아.”
“그러니까 이 설명이 왜 감동적이냐고?”
“감동적인데.”
“너만 감동한 거지.”
“······.”
당황스럽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다 이상한 건 아니다.
친구3이 정상이다.
“그래도 이 녀석은 그나마 정상이네.”
그나저나 친구3이 뭐야? 이름도 안 지었어?
“이게 포인트야. 정상이라고 생각되겠지만, 진짜 이상한 건 이 친구3이지. 이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정상인 거지?”
“그런 거야?”
갑자기 경희의 정신세계가 의심스럽다.
평소에 밝은 아이고, 지극히 평범한 아이인데.
머릿속에는 이런 것이 들어있었나 싶은 생각 때문에.
“캐릭터가 중간에 읊는 이 시는 뭐야?”
물론 시는 멀쩡하다 다만 상황과 너무 안 어울릴 뿐이지.
“내가 좋아하는 시를 몇 개 합쳐서 만든 건데. 묘하게 이야기와 어울려서.”
“······이거 완전히 판박이다.”
“뭐랑?”
“······.”
멋지다 마사루가 부르는 기괴한 노래와 비슷한 느낌이다.
나에겐 이런 병맛 감성이 없어서 솔직히 어디서 재미를 느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뭔가 주인공이 ‘원츄’를 외칠 것 같은 느낌.
혼란하다, 혼란해.
폭력, 그리고 섹시코만도가 빠진 마사루 같은 전개의 이야기.
개인적으로 솔직히 말하라면 이건 겁나게 재미가 없다.
어디서 감동을 받아야 할지, 웃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애초에 난 병맛 개그를 좋아하지 않으니 이게 어떤 수준의 이야기인지도 판단하기 어렵기도 하고.
그런데 박상식도 내 표정을 보고 어느 정도 눈치를 챘는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다.
“오빠, 정말 이상해?”
엄청나게 이상하지.
너무 이상해서 감당이 안 될 정도로.
하지만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 애한테 대놓고 말하기는 좀 그렇다.
“갑자기 등장하는 이 장면의 의미가 도대체 뭐냐?”
“잘 물어봐 줬어.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어. 그러니까······.”
뭔가를 설명하는데, 솔직히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 구조다.
전에 대사를 실감나게 쓰는 재주가 있었던 경희였는데, 의외로 스스로 만든 이야기는 묘한 사차원의 느낌이라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경희에게 이런 재능, 아니 이걸 뭐로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런 이야기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됐어. 돌려줘.”
경희가 내 손에서 노트를 뺏어간다.
아무튼 내 반응이 시원찮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다. 그래서 이번엔 선희에게 콘티노트를 가져가 보여준다.
그리고 한창 데생 중이던 선희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선희야. 이거, 시간나면 그림으로 그려주면 안 돼?”
그 말에 작업을 중단한 선희가 노트를 스르륵 훑어보더니 다시 원고 작업에 열중한다.
“그려 줄 거지?”
“싫어. 이거 너무 이상해.”
“아니야, 이거 고민 많이 하고 쓴 거야. 자세히 읽어보면······.”
“자세히 읽기 싫어. 주인공이 미친 것 같아.”
그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경희가 입을 떡 벌리며 말한다.
“······너무하네.”
그리고는 곧 실망했는지,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다른 어시들이 그런 경희의 모습이 측은했는지 콘티를 읽어본다. 그리고 모두 선희처럼 경희를 외면했다.
그 때문에 경희가 더 울상이 되었다.
“모두 너무하잖아. 힝.”
당연하지.
그나마 미래라면 모를까, 지금은 그런 얘기를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아니, 미래라고 해서 다 이런 병맛 개그가 무조건 통한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래도 분야 자체가 미묘한 구석이 있으니까.
늦은 오후에 두 명의 화실사람을 데리고 온 이대봉이 우연히 경희의 콘티를 읽고는 웃었다.
“와하하하하, 우리 경희에게 이런 센스가 있었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꽤나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런 반응에 용기를 얻었는지 경희가 이대봉에게 물었다.
“정말? 오빠는 재밌어?”
“아니.”
여전히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 젓는 이대봉을 보며 경희가 주둥이를 툭 내밀며 투덜거렸다.
“뭐야? 방금 센스가 있다며?”
“맞아. 센스는 좋아. 그런데 재미는 없어.”
“히잉.”
경희가 다시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역시 이대봉에게도 그렇게 보이는구나.
나도 혹시나 하긴 했는데.
병맛 개그라는 것이 아직은 이른모양인지 아니면 그 센스의 핀트가 묘하게 빗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경희의 묘한 재능(?)에 좀 놀라기는 했다.
경희는 가끔 뜬금없는 능력을 보여주는 탓에 날 헷갈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그나저나 이대봉, 이 인간은 사람을 데려와 놓고 왜 경희의 콘티를 보고 있는 거야?
“아, 미안. 너희들을 잊고 있었네.”
그제야 생각났는지 데려온 남녀, 이대봉은 그 둘에게 미안하다며 웃는다.
두 사람은 평범한 외모로 남자는 김기철, 올해 20세. 여자는 차미정, 21세다.
두 남녀가 자신이 이제껏 그려왔던 그림들을 꺼내놓았다.
그림들을 살펴보니 이대봉의 말대로 준수한 배경 실력을 가지고 있다.
속도도 평균적이라고 하니 이정도면 곧 파시엔시아의 외주를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두 사람에게 작업용 책상을 지정해 주고 일은 내일부터 시작하기로 정했다.
한동안은 파시엔시아의 배경을 똑같이 그리면서 이쪽 배경에 익숙해지게 할 예정이다.
배경이라고 해도 사람마다 그리는 방식이 다르고, 두 사람이 파시엔시아의 배경을 그려야 하는 상황이니 그림체도 맞출 필요가 있다.
이 두 사람이 어느 정도 제 역할을 해준다면 이젠 화실 자체의 능력만으로 두 작품을 완벽하게 커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음날, 점심시간.
엄마가 어시들의 식사준비를 하고, 여자 어시들 몇 명도 반찬준비를 같이 한다.
엄마는 굳이 안 해도 된다는데도 식사준비가 즐겁다며 꼭 점심은 직접 차려주신다.
아들, 딸을 돕기 위해 온 사람들이니 음식이라도 꼭 당신이 직접 차려주시고 싶다고.
새 화실의 부엌에 있는 커다란 식탁은 화실 식구들이 모두 둘러앉아도 자리가 남을 정도로 크다.
예전 이 집주인은 뭐하던 사람이었을까.
아무튼 덕분에 모든 것이 널찍하니 편하고 좋긴 하지만.
식사를 끝내고 쉬는 시간.
화실식구 모두가 마당에 나와 9월의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수다를 떤다.
예전과 달리 나무가 몇 그루 심겨져 있는 작은 잔디마당이라도 있으니 기분전환하기엔 안성맞춤인 듯하다.
실버는 나무 밑에 자리를 깔고 낮잠을 자고 있다.
박상식은 점심을 먹고 서점가를 찾아갔다.
파시엔시아와 삼사라의 콘티는 이제 슬슬 선희가 도맡아 하기 시작했고, 전상길 화실에서 작업 중인 평발 스트라이크의 경우 작업 시간이 길지 않아 박
상식도 여유가 생겼다.
덕분에 예전에 작업하던 곰탱이시리즈를 다시 기획하는 모양이다.
곰탱이 시리즈에 대한 권리문제 때문에 이야기를 좀 바꾸고 곰탱이라는 캐릭터의 이름도 바꿀 모양이다.
그래서 열심히 자료조사도 하고 가끔 나와 스토리도 같이 의논하며 만들고 있다.
위층 베란다 쪽을 올려다보니 그곳에는 선희가 백설기를 쓰다듬으며 책을 읽고 있다.
고양이 녀석은 평소처럼 팔자 좋게 축 늘어진 채 잠들어 있다.
새롭게 합류한 두 사람 중 차미정도 어시들 사이에 끼어 수다를 떨고 있다.
여자 어시들 중 가장 어리긴 하지만 나름 붙임성이 좋아서 잘 어울리는 모양이다.
그런데 아직은 이런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한 김기철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낸다.
수줍음이 많은 타입인가?
뭐 여자가 많은 화실이라 아직은 어울리는 것이 어색하기도 하겠지.
그나마 남자들도 모두 제각각이고, 특히나 실버는 대화 자체를 그다지 즐기지 않은 타입이라 접근하기가 쉽지도 않을 테니까.
그나저나 뭘 그리는 거지?
아직 배경연습중인가?
슬쩍 다가가 바라보니 그리고 있는 것이 배경은 맞는데······, 뭔가 느낌이 다르다.
그러고 보니 배경을 펜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붓으로 그리고 있다.
붓?
배경을 붓으로 그린다고?
물론 배경을 붓으로 그리는 만화가가 없는 건 아니다.
보통 시대극 만화를 그리는 원로 만화가들 중에서 붓으로 배경을 그리는 사람이 좀 있기는 하지만, 그 조차도 많지는 않다.
붓이라는 도구는 결코 배경을 그리기에 적합한 도구가 아니니까.
그런데 김기철은 이 붓으로 현대배경을 그리고 있다.
붓의 특성상 자를 사용하지 않음에도 전체적으로 선이 깔끔하고 특유의 강약으로 인해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내가 다가온 것도 모른 채 배경에 심취해 있던 김기철이 기척을 느꼈는지 깜짝 놀란다.
“어? 서, 선생님.”
“이런 재주가 있었네요? 왜 어젠 얘기 안했어요?”
“아, 제가 어리니까 말씀 놓으셔도 돼요.”
“그럴까? 알았어.”
그렇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미리 말하지 그랬어. 대봉이 형은 알고 있어?”
내 질문에 김기철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인다.
“네. 제임스 형님은 알고 계셨어요.”
“그런데 그 인간은 왜 내게 말 안한 거지?”
“제가 부탁했어요.”
“네가? 왜?”
“이제까지 화실 세 곳에서 일했는데, 제 스타일의 배경을 원하는 곳이 없었거든요. 오히려 이런 그림을 그리는 걸 거북해해서. 배경이 너무 튄다고.”
하긴 그렇겠지. 일반적인 만화에 이런 배경이라면.
하지만 그건 사용하기 나름이다.
그림에 개성을 부여해 나름 독특한 특징으로 사용한다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는 스타일이다. 거기다 방금 작업하는 모습을 보니 속도도 빠르다.
일단 자를 사용하지 않는 덕분에 기계처럼 딱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은 아니지만, 붓만이 가진 멋과 느낌이 있다.
“그거 나 줘 볼래?”
“이 그림요?”
“응. 잠시만 줘봐.”
“네.”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김기철이 내게 그림을 내밀자 그것을 받아 서둘러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 한쪽 편에 있는 나무 밑에서 코까지 골며 늘어지게 자고 있는 실버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가 실버를 깨웠다.
“실버 형, 일어나봐.”
“크윽, 컥, 뭐야, 벌써 시간 됐어?”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러자 빼꼼 눈을 뜨며 일어나던 실버가 다시 벌러덩 누웠다.
“뭐야, 진짜. 아, 졸려. 시간되면 깨워줘. 나 다시 잘 거야.”
“일어나 보라니까. 이것 좀 봐봐.”
“아, 그 자식. 화실 대장이라고 너무하네, 진짜.”
그렇게 투덜거리며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몸을 일으킨다.
내가 실버에게 김기철이 그렸던 배경그림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찡그린 얼굴로 그림을 받아 내려다본다.
그러더니 곧 눈이 커지며 날 바라봤다.
“이거 뭔데?”
“괜찮지?”
“나쁘지 않네.”
뭔가 재밌는 것을 봤다고 생각했는지 입 꼬리까지 슬쩍 끌어올린다.
“혹시 파시엔시아에 이런 스타일의 배경은 어때? 펜선이 배경에 잡아먹힐까?”
붓으로 그린 배경의 인상이 강하다. 일반적인 펜선으로 그린 그림이라면 저 말대로 될지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펜선괴물이 아닌가?
역시 내 말을 들은 실버가 코웃음을 친다.
“너, 날 무시 하냐?”
< 뉴타입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