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타입 (1) >
“선생님, 사 왔어요.”
“그래. 얼른 가져와 봐.”
키도가 그리던 그림을 중단하고 어시가 사온 빅 히어로를 받아 얼른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원하는 페이지를 찾았다.
“오, 이거군.”
빅 히어로에 단편으로 실린 써니의 ‘다크 프린세스’다.
어시들도 키도 주위에 모여들어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만화를 살핀다.
첫 표지부터 굉장한 힘을 느끼게 하는 펜선이 그들을 압도했다.
“우와, 이거 펜선이 엄청난데?”
“펜선이 그림을 이렇게 돋보이게 할 수도 있군요. 놀랐어요.”
“파시엔시아의 펜선도 엄청났는데. 이쪽은 더하네.”
“맞아요. 파시엔시아를 능가하는 펜선이라니.”
한 사람은 자신의 팔 부위의 피부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이거 봐 나 소름 돋았어.”
이곳 어시들은 써니와 텐겐이 같은 사람들의 작품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저 이쪽 사람들과 알게 모르게 키도가 연관이 있다는 정
도만 알뿐이다.
키도가 자세한 사정을 알리지 않은 탓이다.
만화를 보던 키도는 곧바로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실버로군.”
“실버요?”
“실버? 보물섬?”
“요즘엔 명견 실버가 더 유명하지.”
하지만 키도는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고 페이지를 넘기며 낄낄거렸다.
“그래. 그녀석이야. 정말, 괴물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날 흥분시키다니.”
내용도 소름끼칠 정도로 캐릭터에 대한 감정이 전해져 온다.
스토리, 데생, 거기다 놀라울 정도의 펜선까지 더해지니 입은 웃고 있어도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소름끼친다.
하지만, 이런 작품은 오히려 가슴에 불을 지피는 법.
모두 읽고 나자 곧바로 키도가 소리쳤다.
“그래, 나도 지지 않겠다!”
그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원고를 꺼내 연필데생을 시작했다.
그의 연필이 종이 위를 평소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며 돌아다닌다.
“그래, 좋아. 물러서지 않는다. 큭큭”
키도가 기괴한 소리를 지르며 데생에 열중하는 중에도 어시들은 다크 프린세스를 돌려보며 ‘오오’ 하는 감탄소리를 내면서 본다.
“삼사라보다 더 재밌네.”
“다크 프린세스도 연재가 되는 걸까?”
“설마? 이정도 퀄리티로 또 연재를 하면 작가가 죽을 걸?”
“어시가 더 죽어나가겠지.”
“그렇겠네.”
모두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인다.
남의일 같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이 찹잡해 질 정도다.
그런 와중에 키도의 아내 목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왔다.
“식사 준비되었어요! 어서 드세요!”
그 말에 어시들이 빅 히어로를 들고 서둘러 거실 쪽으로 후다닥 빠져나갔다.
하지만 키도는 데생에 열중할 뿐이었다.
지금은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할 시점.
이 불타는 감정을 원고에서 폭발시켜야 한다.
밥 한 끼 정도 굶는다고 어떻게 되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그런데.
그의 코를 스치는 냄새.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다.
그때 거실 쪽에서 부인의 처연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머, 우리 선생님은 야키소바가 싫으신 걸까요?”
그때 키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아니오! 그건 오해요! 그 야키소바, 내가 지금 먹으러 가겠소!”
그렇게 말하고는 들고 있던 연필을 던져버리고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
추석(이 시대엔 하루만 쉬는 날)이 지나고 며칠 후.
다크 프린세스가 실린 월간지 빅 히어로가 발매되었다는 연락을 지로로부터 받았다.
판매부수는 8만부.
그런데 첫날부터 생각이상으로 많이 판매가 되었다는데, 분위기로 보면 조만간 증쇄할 지도 모른다고 한다.
빅 히어로 편집장도 기분이 좋은 탓인지 내게 안부 인사를 전해달라고 했단다.
연재에 대해 묘한 뉘앙스로 묻긴 했지만, 확실한 답변은 피했다.
아직은 하는 일도 많으니 천천히 생각해 볼 작정이다. 거기다 선희도 요즘 학교생활로 바쁠 테니 굳이 무리를 시킬 생각도 없다.
물론 선희의 데생 능력이면 충분하기도 하고, 본인에게 물어보면 당연히 하겠다고 할 테지만.
월간지라는 특징 때문에 부담이 적다고는 해도 좀 더 지켜보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다.
토요일 오후, 전상길의 화실에 가져다줄 원고를 들고 성준희가 화실을 나선다.
“다녀올게.”
“어, 그래 조심해서 다녀와.”
“응. 준모도 누나들이랑 잘 놀고 있어. 말 잘 듣고. 알겠지?”
“알았어. 누나.”
조그만 녀석이 또랑또랑 잘도 대답한다.
성준희가 밖으로 나가자 곧 경희가 준모에게 다가갔다.
“누나랑 저기로 가서 로봇 장난감 가지고 놀까?”
“응.”
준모가 그렇게 대답하더니 곧장 백설기를 안아들고는 경희랑 함께 한쪽 공간으로 이동한다.
백설기가 그리 큰 고양이는 아니지만 준모가 워낙 꼬마라 가슴에 꼭 안고 어기적거리며 걷는 모습이 우습다.
그런데 백설기는 만사가 귀찮은지 준모에게 끌려가면서도 별다른 반항도 없이 축 늘어져 있다.
아마도 방금 배를 가득 채운 탓이겠지.
저 놈은 눈만 뜨면 주구장창 먹기만 하던 고양이 탈을 쓴 돼지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요즘 성준희는 일주일에 한두 번꼴로 준모를 데리고 출근하는데, 이 꼬마 녀석은 얌전해서 혼자 잘 논다. 어쩌다 백설기가 있는 날은 녀석을 하루 종일
안고 살다시피 할 정도로 좋아하는 모양이고. 물론 그런 준모를 백설기는 그리 귀찮아하는 눈치는 아니다.
그 때문에 준모는 고양이를 특별히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고양이는 무서워서 다가가지도 않는 걸 보면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런데 그때였다.
냐아아아앙!
부엌에서 들려오는 백설기의 처절한 비명소리.
보나마나 준모가 백설기를 어설프게 안고 가다가 넘어졌을 거다. 물론 백설기를 에어백 삼아서.
백설기는 매번 저렇게 당하면서도 잘도 준모에게 끌려 다니는 걸 보면 둘이 뭔가 잘 맞는 모양인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변태고양이 일지도.
늦은 오후, 근처 학교 앞 문구점이랑 이곳저곳 들렀다가 화실로 돌아왔더니 사람들이 우르르 TV앞에 모여 있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모두 일찍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더니.
“오늘 TV에 뭐 재미있는 거 해요?”
내 물음에 화실 식구들이 나를 돌아본다.
그런데 왜 모두 숟가락을 들고 있지?
“뭐, 맛있는 거 먹어요?”
내 물음에 박소미가 손을 휘적거리며 웃는다.
“아뇨. 지금 텔레비에서 초능력자가 나오거든요.”
이게 무슨 소리야? 초능력자라니.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모두를 바라보자, 경희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며 내게 설명했다.
“오빠, 유리겔라야. 유리겔라. 몰라?”
“유리겔라?”
이 이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인터넷에서 본거였나?
내가 머리를 갸웃거리자 경희가 가재미눈을 한 채로 날 바라본다.
“어휴, 똑똑한 오빠도 가끔 보면 저렇게 맹한 구석이 있어요. 초능력자 유리겔라 말이야. 요즘 제일 유명한 초능력자. 지금 생방송으로 나오고 있어.”
“초능력자? 그것도 생방송으로? 그게 뭐라고 생방송을 해?”
“왜 그래, 시대에 뒤떨어지게.”
경희가 날 보며 콧방귀를 뀐다.
내가 1984년에서 저런 말을 들을 줄이야.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TV화면을 들여다봤다.
TV속에 등장한 남자, 마른 체형의 외국남자가 사람들 앞에서 뭔가를 떠들고, 곁에 있는 사람이 그것을 통역해 주고 있다.
숟가락의 목 부위를 만지작거리는 시늉을 하자 그것이 우그러진다.
그러자 TV를 보던 화실 식구들도 “와, 신기해.”를 외치며 열심히 숟가락을 문지른다.
이거 무슨 상황이지?
단체로 모두 화면 속에 빠진 듯 똑같은 행동을 하며 신기해한다.
그리고 그것을 보다 유튜브를 통해 보았던 영상이 떠올랐다.
과거 한국을 찾아왔었다는 초능력자의 이야기.
자세한 사정은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엄청난 사회적 이슈였다고 했는데······. 결국 외국에서 초능력이 아니라고 결론이 났다던 그거 아닌가?
내가 살던 시절에는 그냥 마술사 생활을 한다고 했던 거 같기도 하지만 자세한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런 남자가 지금 전국적인 관심을 끌며 초능력 쇼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방송국에서 저런 걸 실시간 생방송까지 해가며 보여줄 정도인가 싶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것들도 하나의 오락거리라 생
각하면 뭐.
그런 사람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때 TV를 시청하던 화실식구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와, 이거 봐. 내 숟가락 휘어졌다!”
“착각이야, 착각. 안 휘어졌어.”
“자세히 봐봐 조금 휘어졌지.”
“아닌 것 같은데.”
“잘 보라니까.”
평소 말이 별로 없던 구자희까지 저렇게 흥분하다니.
도대체 숟가락 구부리는 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기에.
방송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숟가락을 들고 있는 장면이 비춰진다.
숟가락이 부러지는 장면, 여러 사람이 손가락 한 개씩만 사용해 사람을 들어 올리는 장면, 그리고 유리겔라의 말을 통역하는 여자.
그런데······, 내용이.
[저 숟가락을 움직이는 건 의미가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 그게 중요한 겁니다. 그리고 핵
무기를 방지할 수도······.]
뭐야? 무슨 사이비종교의 교주 같잖아.
이 시절 사람들은 너무 순진한 구석이 있었던 걸까.
방송을 보는 내내 헛웃음만 나온다.
방송이 끝나고 나서도 그 흥분은 가라앉지가 않았다.
모두 초능력이 실재하는 거라는 둥, 사람의 힘은 아직 다 개발이 되지 않았다는 둥하며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이 열띤 토론은 저녁을 먹은 뒤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대화의 내용은 좀 황당하긴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서로 이만큼 친해졌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사실, 화실 식구들이 이렇게 서로 친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폭염이 있던 8월에 한동안 합숙한 덕분이다.
같이 먹고 자고 생활을 같이 하다 보니 은연중에 각자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더욱 친밀하게 된 것이다.
좋은 점은 이거긴 한데, 문제는 너무 친해져서 조금 시끄러워졌다는 단점도 생겼다.
뭐, 그래도 화실이 평소에도 밝으니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긴 하지만.
아무튼 약간은 들뜬 듯한 분위기에서 이대봉이 화실에 찾아왔다.
“나, 왔어요오~.”
“왔어?”
손을 흔들면 들어왔던 이대봉이 TV앞에 잔뜩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며 놀란 얼굴로 말했다.
“어? 여기도 이거 보고 있네?”
“오빠 왔어?”
“오빠도 이거 봐. 굉장히 신기하고 재미있어.”
“됐어. 난 그런 이상한 건 관심 없어.”
그렇게 말하며 창가 쪽에 앉아있는 내게로 다가왔다.
“저게 다 뭐래니? 전국이 죄다 저 외국인에게 정신이 빠진 것 같아.”
“형도 그렇게 보여?”
“그래. 좀 신기하긴 하겠지만. 난 좀 거북해.”
“나도.”
“흐응, 역시 우리 윤환이는 나랑 마음이 통한다니까.”
“그런 말만 안하면 참 좋을 텐데.”
“응? 어떤 말?”
“······휴우, 관두자.”
눈알을 데굴거리며 의아한 표정을 짓던 이대봉이 곧 뭔가 생각났는지 박수를 짝 하고 쳤다.
“맞다. 전에 네가 화실인원 부족하다고 부탁한 거 있지?”
“구했어?”
“얼마 전에 문 닫은 화실이 있는데, 거기 두 명이 갈 곳이 없다고 하더라고.”
“배경맨이야?”
“응. 남자 한명이랑 여자 한명. 실력은 준수한 편이고 성실해서 같이 일하기는 괜찮을 거야.”
그 정도면 된다.
이미 화실에 있는 두 명의 배경맨들이 실력이 좋아서 그들에게 배우면서 하면 되니까. 물론 어려운 부분은 구자희나 박소미가 커버하면 될 거고.
“두 명 더 오면 화실이 좀 비좁기는 하겠네.”
< 뉴타입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