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09화 (109/425)
  • < 다크 프린세스 (5) >

    “월간지인 빅 히어로요?”

    - 네. 빅 히어로 쪽에서라면 나중에라도 문제가 크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같은 출판사라도 잡지가 다르니까요. 그런데 선생님 생각은 어떠신지.

    별로 크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부분은 따로 있었다.

    “흐음, 단편이니까 그런 건 상관없는데. 잡지가 바뀌면 담당편집자가 바뀌게 될 게 아닌가요?”

    - 네. 아무래도 편집부가 다르니까요. 하지만, 그 문제는 저희 편집장님이 선생님의 의견을 최대한 받아들여서 결정하게끔 하시겠답니다.

    “제 의견요?”

    - 어차피 다크 프린세스는 삼사라의 외전격인 만화기 때문에 같은 만화나 다름없으니까 담당이 바뀌는 것이 좋을 리는 없다는 거죠. 그러니까 다른 분

    이 불편하시면 제가 그냥 담당하는 것도 괜찮다고 하십니다.

    그런 걸 소년 히어로 편집장이 마음대로 결정해도 되는 건가? 하기야, 출판사 내 사정은 내가 정확히 모르니까.

    “그럼, 저야 편하고 좋지만. 그렇게 되면 아카기 씨가 여러모로 귀찮고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 전 괜찮습니다. 사실은 제가 했으면 좋겠다는 입장이고요. 하하.

    지로가 크게 웃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편집부가 다른 이상 불편한 점이 많을 텐데.

    그렇다고 담당을 바꾸는 문제는 나도 별로고.

    아무래도 개인적으로 작품 내용에 대해 가끔 의논을 하기도 하고, 성향도 나와 맞는 편이라 담당이 바뀐다는 건 어쨌건 껄끄럽긴 하니까.

    “아카기 씨가 계속 제 담당이 되어주신다면야 저로서도 편하고 좋죠. 된다면 그렇게 해 주세요.”

    -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다크 프린세스, 연재도 생각하고 계십니까?

    질문이 조금 조심스럽다.

    담당으로서 궁금할 테니 굳이 숨길 이유는 없었다.

    “일단은 단편 반응을 보고요.”

    - 그렇다는 건, 역시······.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어요. 물론 화실 작업의 여력도 있어야하고요.”

    - 네. 그렇겠군요. 그럼 단편은 빅 히어로에서 들어가는 걸로 보고 하겠습니다. 참, 그리고 이번 단편 완성 기간은 얼마나 걸릴까요?

    “빅 히어로 이번 원고 마감이 언제까지입니까?”

    - 오늘까지 해서······, 정확히 16일 남았습니다.

    “그럼 이번 마감까지 완성하도록 하죠. 페이지는 45페이지로요.”

    - 그럼 며칠 후에 발간될 빅 히어로에 홍보를 바로 넣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건 뭐 알아서 해주시면 되고요.”

    - 잘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네.”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지로의 음성이 묘하게 들뜬 것 거처럼 들린다.

    “오빠, 계속하자.”

    “아, 그래.”

    전화를 끊자마자 날 빤히 쳐다보던 선희가 내 앞에서 그림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다크 프린세스에 짧게 등장했던 소마와 바유에 대한 디테일한 일러스트와 그 외 배경이 될 만한 공간의 설정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물론 자료가 될 만한 각종 애니메이션이나 외국 신화의 일러스트도 구해와 그것을 참고하고 있었다. 선희도 이런 저런 자료들을 융합하며 작품의 배경

    이 되는 ‘림보’를 현실감 있게 만들어 내며 이번 ‘다크 프린세스’에 열정을 보였다.

    화실 어시들도 호기심 때문에 가끔씩 선희가 그리는 설정그림을 힐끔거리며 구경하기도 한다.

    “소마는 날카로운 눈매를 강조해봐.”

    “이렇게?”

    “눈이 좀 더 찢어져도 괜찮을 것 같아. 하지만 전체적인 얼굴형은 미남 스타일이고 몸도 날렵해. 나중에 삼사라 주인공 켄을 궁지까지 몰고 갈 빌런이니

    까, 강한 느낌이 들게끔 그려봐.”

    “알았어.”

    선희는 상체가 드러난 날씬하지만 근육질의 소마 몸에 각종 문신을 새겨 넣자 악당의 느낌이 더욱 살아났다.

    “그래. 이정도면 훨씬 좋아.”

    “바유는?”

    “바유는 약간 둔해 보이지만 파워가 강한 타입이니까 전에 그렸던 단편보다는 근육과 상처 같은 것을 좀 더 부각시켜보는 건 어때?”

    “알았어.”

    그렇게 말하며 챔피언 보디빌더의 몸 서너 개는 합쳐진 듯한 가공할 근육질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무시무시한 대각선의 상처 몇 개를 만들어낸다.

    “뭐야? 이소룡 상처 같네?”

    “맞아.”

    그렇게 말하며 상처를 계속 만들어 넣는다.

    그런데 상처가 생각보다 많다.

    “그거 상처 모양, 위치 다 외울 수 있겠냐?”

    “외울 수 있어.”

    하긴, 선희 정도의 능력에 상처 위치 몇 개 외우는 거야 일도 아닐 테지.

    이정도면 단편에 등장할 주 캐릭터의 설정을 대강 끝났다.

    배경인 림보도 거의 마무리 된 상태다.

    대략 이정도면 당장은 충분하다.

    물론, 이것들은 언젠가 삼사라에 한번은 등장해야 할 곳이기 때문에 시간이 되는대로 좀 더 디테일하게 만들어볼 생각이다.

    문제는 남은 보름 정도의 시간 만에 45페이지나 되는 만화를 완성해야하는데 화실 인력에 여력이 별로 없다.

    선희가 데생을 하는 동안 어떻게 할까 고민에 빠졌다.

    선희가 모든 작업을 다 하는데 무리야 없겠지만, 그래도 어린 애를 무리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어차피 슬슬 파시엔시아 때문에라도 화실 식구는 최소한 두 명 이상 늘려야 하는 입장이니 이대봉에게 부탁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 고민을 눈치 챘는지 갑자기 실버가 내게 말했다.

    “그 단편, 이번엔 나에게 인물 펜터치를 맡겨볼 생각 없어?”

    “형이 하려고?”

    “그래. 화실에서 선희 빼고는 내가 제일 여유만만이잖아.”

    그건 실버의 말 대로였다.

    실버는 그야말로 펜선 능력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의 속도와 노련함을 가지고 있다. 파시엔시아 일주일 연재분량도 보통 하루, 길어봐야 이

    틀이면 끝나버린다.

    그래서 남는 시간은 성준희랑 뒤처리를 하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를 보며 새로운 펜선을 구상하는데 시간을 보낸다.

    이 인간은 그냥 펜선 장인이다.

    그런 실버가 펜터치를 하겠다니.

    처음부터 파시엔시아에 한정해서 작업하면 그의 할 일은 모두 끝나는 걸로 이야기가 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그 역시도 남는 시간엔 자신이 하고 싶은 그

    림을 그리는데 보내겠다고 했으니 따로 일을 더 시킬 생각은 없었는데.

    “솔직히 삼사라 만화도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미자 씨가 하고 있으니까. 외전이라도 내가 해보면 안 될까?”

    그렇게 말하며 정미자의 눈치를 살짝 본다.

    그런 실버의 말에 정미자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다.

    “형이 도와준다면 환영이지.”

    “그럼 배경은 저희들도 조금씩 도울게요.”

    구자희와 박소미가 나서며 말했다.

    정미자도 성준희와 함께 뒤처리를 돕겠단다.

    이것으로 대충 단편 다크 프린세스에 대한 작업 계획은 완성이 되었다. 스토리, 콘티도 오늘 중으로 마무리 될 테니 내일부터 선희가 데생작업에 들어

    갈 것이다.

    그런데 어째 오늘 날씨가 심상치 않다.

    “어? 비 온다.”

    박소미가 창문 쪽을 돌아보며 말한다.

    성준희가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슬쩍 열어보더니 깜짝 놀랐다.

    “비가 많이 오네.”

    그 말에 다른 어시들이 창가로 다가갔다.

    “어머, 정말이네. 무슨 비가 이렇게 많이 와?”

    “일기예보에선 별다른 얘기가 없었는데?”

    “태풍 ‘준’인가 뭔가 온다고 하는 모양이던데. 예보에서 비는 별로 많이 안 올 것처럼 얘기했잖아요.”

    “나도 그렇게 들었어. 뭐, 잠시 이렇게 퍼붓다 말겠지.”

    “그렇겠죠?”

    하지만 어시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며칠 동안 비는 정말 엄청나게 쏟아졌고, 모두 화실에서 며칠간 발을 동동 구르며 집밖으로 나가지도 못한 채 전화를 이리저리 걸며 걱정스러운 날을 보

    냈다.

    그리고 비가 완전히 그치고 난 뒤.

    [8월 31일부터 9월4일까지 내린 집중 폭우로 속초 653.9mm, 춘천 380.5mm, 서울 334.4mm, 인천 323.9mm의 강수량을 기록하면서 서울 강원 경

    기 지방이 크게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서울지역의 경우, 한강물 역류로 건물 2만 채가 침수되고, 9만 명이 긴급대피를 했습니다. 나흘간 내린 집중 호

    우로 전국 사망 189명, 실종 150명, 부상 103명, 재산피해 2,502억 원, 이재민 23만 명······.]

    그야말로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엄청나게 비가 퍼부었다.

    방송에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탓인지 그 피해가 더욱 커졌던 모양이다.

    그마나 다행이라면 우리 집이나 화실 식구들의 동네엔 피해가 적었다는 점이다. 비가 그칠 때까지 화실에서 계속 걱정하다 비가 그치고 나자 모두 집으

    로 돌아갔고, 하루 만에 다시 모두 다시 출근했다.

    모두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니 다행이었다.

    아무튼 이 시대로 온 이후 처음으로 자연재해 공포를 제대로 체험했다.

    아, 진짜 이럴 땐 만화밖에 몰랐던 내 지식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게 한심스럽다.

    그런데 며칠 후 커다란 박스 여러 개가 집으로 배달되었다.

    “윤환아 이거 일본에서 온 건데?”

    집배원이 전해준 박스를 받은 성준희의 말에 살펴보니 보낸 사람이 키도다.

    “어? 이 형이 갑자기 뭘 보낸 거지?”

    박스를 열어봤더니, 황당하게도 담요 여러 장과 의약품, 그리고 라면이나 기타 음식품들이 주류를 이뤘다.

    “뭐야, 이게? 이런걸 왜 보내?”

    그리고 저녁때쯤 키도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 형이다. 그래 구호품은 잘 받았느냐?

    “구호품? 갑자기 그걸 왜 보내?”

    - 뉴스 이미 봤다. 피해가 컸다는 거 잘 알고 있다. 가까이 있었으면 뭔가 많이 보낼텐데 그러지 못해 이 형의 마음이 아프구나.

    “아니, 그러니까 왜······.”

    - 힘 내거라, 아우야! 일본도 늘 이런 일이 많아서 그 마음 잘 알고 있단다. 그럼 이만 끊으마.

    딸깍!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끊······. 아우! 진짜!”

    ***

    오래되고 낡은 아파트의 1층 실내.

    그곳엔 각종 기괴한 코스튬 복장들이나 만화책, 비디오테이프와 카메라 등이 잔뜩 비치되어 있다.

    방 한가운데엔 여러 명의 사람들이 둘러앉아 떠들고 있었다.

    “짠. 표지만 보여주마.”

    통통한 남자가 투명한 비닐 속에 잘 보관되어있는 책자 한권을 꺼내 모두에게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보여준다.

    그러자 둘러앉아 있던 사람들이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그것에 집중했다.

    “그게? 코미케에서 구입한 한정판 다크 프린세스?”

    “장장 거금 2천 엔을 주고 산, 책이야.”

    “그럼, 나한테 3천 엔에 팔아.”

    “헛소리하려면 돌려주던가.”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남자가 손을 뻗자 통통한 남자가 서둘러 몸을 싹 빼며 피해버렸다.

    주변에 있던 친구들이 그들을 보며 한마디씩 했다.

    “야, 4천 엔에 팔라고 해도 안 파는데, 3천 엔? 자식이 거저먹으려고.”

    “부럽다 정말. 혼자 코미케에 가서는 저런 걸 구해왔으니.”

    “정말 우연이었다니까. 친구 녀석이 코스프레 한다고 그거 보러 갔다가 우연히 걸려든 거니까.”

    “아, 좋겠다. 그런데 그거 안 보여줄 거냐?”

    “미쳤어? 이거 한정판이야. 앞으로 더 안 찍는다고.”

    “야, 그렇다고 그 내용 너만 보겠다는 거야? 너무 하는데?”

    “자자, 그래서 내가 준비한 게 있지.”

    그렇게 말하며 비닐 포장지에 쌓인 다크 프린세스 책을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고는 곧바로 A4용지를 꺼내더니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게 뭔데?”

    “뭐긴 복사본이지. 너희들이 이럴까봐 내가 따로 복사를 했다. 복사할 때도 문구점 아저씨한테 조심하라고 얼마나 부탁했는데. 딱 하나만 복사한 거니

    까 이거라도 봐.”

    “오케이! 좋아.”

    “나부터 보자.”

    “가위, 바위, 보로 정하자.”

    그렇게 요란을 떨더니 곧 한사람이 정해지고 서둘러 복사한 것을 읽기 시작한다.

    “아, 진짜. 복사가 이게 뭐야? 엉망이라서 섬세한 선은 보이지도 않네.”

    “투덜거릴 거면 보지 마.”

    “야야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렇게 말하며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복사의 질이 다소 떨어지긴 했지만 스토리를 확인하는 데는 별문제가 없다.

    그리고 12페이지의 단편과 설정그림들을 살펴보던 남자가 크게 혀를 내둘렀다.

    “스토리 엄청 재밌다. 어쩐지 켄보다 칼파나가 더 좋아지는 기분인데?”

    “다 봤으면 넘겨 인마.”

    “빨리 봐.”

    “알았어.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한명이 나가 문을 열어준다.

    그리고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며 잔소리를 했다.

    “야, 왜 이렇게 늦었어?”

    “아, 미안.”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오더니 모여 있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오늘 나온 빅 히어로 봤어?”

    “난 소년 히어로 밖에 안 봐. 미쯔다쇼텐에서 볼 건 그거밖에 없잖아.”

    “맞아. 애들이 보는 월간지.”

    그 말에 들어왔던 남자가 종이봉투에 들어있던 빅 히어로를 꺼냈다.

    그 모습을 본 친구들이 모두 눈살을 찌푸린다.

    “야, 넌 그걸 또 샀냐?”

    “저 한심한 녀석.”

    “야야, 우린 다크 프린세스나 보자. 너 빨리 좀 봐. 기다리는 사람 많잖아.”

    “시끄러. 이걸 어떻게 빨리 봐?”

    빅 히어로를 꺼냈던 남자가 복사본을 한 장씩 돌려보는 사람들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거 다크 프린세스 아니야?”

    “하하, 넌 가장 마지막이야. 그러게 빅 히어로 같은 쓸데없는데 신경 쓰니까 그렇지.”

    “나도 그거, 당장 보고 싶기는 하지만, 그보다 빅 히어로를 산 이유가 있어.”

    하지만 친구들은 그 말을 들은 채도 하지 않으며 자기들끼리 복사본을 돌려보며 떠들기만 했다.

    “야야, 다음 장 빨리 넘겨.”

    “조금만 있어봐.”

    “적당히 노려봐라, 종이에 구멍 나겠다!”

    그런 분위기를 말없이 바라보던 남자가 곧장 책 표지를 그들에게 들이밀었다.

    “이거 보이냐?”

    그제야 몇몇이 빅 히어로를 관심 없다는 눈으로 힐끔 돌아본다. 하지만 곧 그들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그거······ 뭐야?”

    “칼파나 같은데?”

    “칼파나? 어, 진짜네.”

    < 다크 프린세스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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