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크 프린세스 (3) >
결국 500권의 책은 모두 팔려버렸다.
그것도 삽시간에.
줄을 섰던 사람들이 더 책이 없냐고 문의를 하고 있었지만 더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처음부터 코미케만을 겨냥해 판매한 것이니 행사기간이 더 길었다
면 어떻게 추가로 더 찍어낼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니까.
어쨌건 덕분에 한적하기만 하던 소년 히어로의 부스엔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뤘고, 다른 출판사들의 주목까지 받았다.
소년점프나 소년매거진의 직원들도 이런 분위기에 호기심이 생겼는지 소년 히어로의 부스를 기웃거릴 정도였다.
그 중 몇몇은 이쪽 직원들에게 ‘다크 프린세스’에 대한 정보를 물어보기도 했지만, 신입들이야 자세히는 모르니 그저 아는 정도의 답변만 해줄 뿐이다.
그렇게 번잡하고 정신없었던 행사가 마무리 되어갈 즈음, 소년 히어로의 부스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행사에 참가했던 서클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소년 히어로 부스의 직원에게 다가가 가져온 책을 불쑥 내밀었다.
“이거 저희 동인지인데요. 선생님께 드리고 싶은데 괜찮나요?”
“네?”
“저희 서클은 삼사라 팬들이 모여서 만든 곳이라 동인지 전체가 삼사라 만화예요. 혹시 이거 선생님께 전달해 주실 수 있나 싶어서.”
“잠시 만요.”
그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지로를 발견했다.
“아카기 선배! 여기 좀 와 봐보세요!”
“······?”
지로가 멀뚱거리는 표정을 한 채 다가오자 직원이 대충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자 상황을 이해한 지로가 다가온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럼요. 제가 담당인데 반드시 전달해 드리죠.”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내민 책을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아뇨, 오히려 독자분의 이런 관심을 받은 저희가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때 다른 이들도 서둘러 자신들이 가져온 책들을 내밀었다.
“그럼, 저희들 것도요.”
“저희도요.”
여러 사람들이 나서며 자신들이 발행한 동인지 한권씩을 내민다.
대충 훑어보니, 그들의 말대로 삼사라의 패러디 만화가 대부분이었다.
좀비 코스프레를 봤을 때부터 내심 삼사라의 인기가 생각이상이구나 싶기는 했는데, 이렇게 많은 팬들이 삼사라 관련 동인지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놀
랄 수밖에 없었다.
지로가 감격한 얼굴로 그들에게 말했다.
“써니 작가님에게 반드시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감사해요.”
“써니 작가님, 만화 재밌게 보고 있다는 말씀도요.”
“네. 당연하죠.”
고등학생들부터 대학생, 일반인까지 다양한 팬 층이 만든 동인지를 보니 담당으로서 뿌듯한 기분마저 든다.
몇몇은 써니에 대한 궁금증을 물어보기도 했는데, 일반적인 질문은 아는 대로 말해줬지만, 개인 신상에 대한 건 미안하다는 말로 거절했다.
그렇게 조금은 요란한 행사가 마무리되고 부스를 정리하는 데 신입 중 한명이 약간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지로에게 다가와 말했다.
“밖에 좀 나가 보세요.”
“밖은 왜?”
“일단 직접 보시는 게.”
“······?”
의아한 표정의 지로가 대충 정리를 마무리하고 회장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주변이 어두워지고 있었고, 많은 이들이 흩어져 모두 돌아가는 분위기다.
이곳에서 뭘 봤기에, 저런 표정일까. 하는 생각을 하며 두리번거리는데, 그때 지로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돌아가는 사람들의 인파 사이로 보이는 네모난 종이, 그것을 들고 있는 사람이 몇 명 보인 것이다.
조금은 절박한 표정으로 “여기 좀 봐 주세요!”하며 소리치는 사람도 있다.
호기심에 그들 근처로 다가가서 종이에 적힌 글을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다크 프린세스’ 삽니다. 3,000엔 드릴게요.]
[다크 프린세스 4,000엔에 살게요.]
[다크 프린세스 제발 저에게 파세요.]
그 모습을 본 지로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
***
“하루 만에 다 팔려요?”
- 네. 제가 실수로 가격을 2천 엔으로 책정했는데도 금방 다 팔려버렸습니다.
“2천 엔요?”
아무리 실수라도 2천 엔은 좀 심한데.
- 네. 실은······.
지로에게 2천 엔으로 팔게 된 경위를 들으니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잘못 붙여진 스티커로 인해 엉뚱한 가격이 붙여졌다니.
그래도 상당한 가격인데 그걸 사람들이 샀다니, 지금의 오타쿠들도 장난이 아니구나 싶었다.
- 전 500권으로 3일을 예상하고 있다가, 알고 보니까 하루라서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솔직히 3일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거든요.
“하루요? 전 3일인 줄 알았는데.”
“아, 역시 3일이라고 말씀하셨군요. 잘못들은 건 아니었구나.”
전화기 너머로 지로의 안심한 한숨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좀 놀랐다.
코미케의 기간이 단 하루였다니.
나도 몇 번 일본 코미케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여름에 가서 엄청난 개고생을 하며 각종 동인지와 굿즈들을 삼일동안 엄청나게 구입했던 경험도 있었다.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판매하는 것도 달라서 이것저것 사느라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무튼 그렇게 3일간의 행사를 경험했었던 덕분에 당연히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지인으로부터도 3일이 된 게 꽤 오래전부터라고 해서 그냥 지금
도 비슷할 거라 생각했는데, 1984년의 코미케는 단 하루였다는 걸 처음 알았다.
어쨌거나 자세한 건 몰라도, 이 시절의 코미케는 내가 있던 시절처럼 상업적인 성격이 별로 없던 때다. 참가한 대부분의 클럽도 판매가 목적이라기보다
는 말 그대로 ‘동인’,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동인지를 내는 것이었고 판매는 그 다음 책을 내기위한 최소한의 수익만으로도 만족했다고 알고 있다.
그런 코미케에서 하루 만에 그것도 2천 엔이라는 고가의 책이 500권이나 판매했다는 건 내 예상을 월등히 뛰어넘은 인기다.
- 다크 프린세스를 추가로 찍어 판매해 줄 수 없겠냐는 독자 분들의 현장 의견도 있었습니다만, 일단 그 부분은 써니 선생님의 뜻에 반한다는 이유를 거
절을 했습니다.
“네. 잘하셨어요.”
다크 프린세스는 정식 출간을 예정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선희의 요청에 의해 거의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다.
물론 개인적으로 다크 프린세스의 이야기는 마음에 들었고, 언제 기회가 된다면 따로 스토리를 짜 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인 단편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이야기 이상을 선희가 표현한 덕분에 그자체로 캐릭터가 생명을 얻어버렸고, 결국 앞으로 삼사라의 이야기에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이번 코미케를 통해서 삼사라가 어느 정도로 인기 있는지 실감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 아, 그리고 추가로 증쇄한 삼사라 10만부의 판매 속도가 줄어들고 있어서 아마 추가 증쇄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25만부라니, 엄청나네요.”
- 네. 결정이 나는 대로 다음에 갈 때 영수증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삼사라 동인지도 함께요.
“네. 알겠어요.”
그건 나도 기대된다.
우리 만화가 일본 동인지로 나오다니.
-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내가 전화를 끊고 나자 화실식구들이 나를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쳐다본다.
코미케에서 일어난 일을 자세히 설명하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하는 수 없이 지로에게 들은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하자 모두가 환호했다.
“와, 2천 엔이면 우리 돈으로 얼마에요?”
박소미가 흥분한 채로 묻자 내가 대답했다.
“지금 환율로 보면 대충 8천원조금 안될 겁니다.”
내 말에 화들짝 놀랐다.
“8천 원요? 그 얇은 책이요?”
“네.”
“일본 사람들 정말 부자네요.”
“아니요. 그 사람들에게도 큰돈이에요.”
“그래도 일본사람들은 부자잖아요.”
그때 펜선에 열중하던 실버가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2,300불 정도고, 일본은 10,500불정도 될 겁니다.”
“와, 심봉 씨, 그런 것도 다 아세요?”
“별건 아닙니다. 그냥 취미입니다. 취미.”
별거 아니라는 듯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계속 그림에 몰두한다.
그런데 옆자리에 있던 정미자가 실버에게 묘한 눈빛을 보낸다.
뭔가 자랑스럽다는 느낌?
그런 정미자를 힐끔거리며 실버가 얼굴을 살짝 붉힌다.
어? 뭐지?
설마, 내 착각인가?
하지만 두 사람의 그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소미가 말을 이어갔다.
“어쨌건 일본에서 삼사라의 인기가 그만큼 높다는 뜻이잖아요.”
“그렇겠죠.”
“앞으로 칼파나의 비중이 늘어나겠죠?”
“아직 정해진 건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긴 해요.”
“한국에 있는 덕분에 삼사라의 인기를 실감하긴 어렵지만, 어쩐지 뿌듯하네요. 우리가 그린 만화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박소미가 감격한 표정으로 떠들었다. 그리고는 넌지시 선희가 있는 쪽을 바라본다.
“작은 선생님은 정말 너무 새침 하시다니까, 이럴 땐 좀 기쁜 티라도 좀 내시지.”
그러자 입을 다문 채 그림에 열중하던 선희가 멍한 눈빛으로 머리를 쳐들고는 입을 열었다.
“기뻐요. 많이.”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머리를 숙여 작업에 몰두한다.
“아······. 그러시구나.”
박소미가 어색하게 웃으며 목을 긁적인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날 보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다크 프린세스 만화는 혹시 더 나올 계획이 있나요?”
“칼파나 주인공 만화를 말인가요?”
“네. 개인적으론 굉장히 마음에 들었거든요. 차가우면서도 매력이 있어서 이 만화가 더 나와 줬으면 좋겠던데.”
“저도요.”
이제까지 가만히 있던 구자희까지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도 꼭 보고 싶어요. 삼사라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캐릭터고, 이번 단편은 짧지만 너무 좋았어요.”
“나도 그런데.”
이번엔 성준희까지.
칼파나의 어떤 매력이 여자들에게 통하는 건 이해가 된다.
솔직히 삼사라는 타임루프라는 걸 제외하면 호러만화다. 그러다보니 매니악 한 경향이 강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소년만화답
게 성장, 액션 쪽에도 무게를 두고 있었다. 그러다 이번에 새롭게 등장한 빌런이 화려한 여성 캐릭터인 칼파나였으니까.
물론 거기까지 만이라면 칼파나에 대한 매력이 그다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단편 작으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기본뼈대인 스토리를 내가 짜긴 했어도, 선희의 감정이 실려 내 생각과는 다른 형태가 되었으니 온전하게 내가 만든 캐릭터는 아니다.
어쩌면 선희가 섬세한 감정을 채워 여자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르고.
솔직히 화실 여자어시들은 삼사라나 파시엔시아를 작업하고 있지만, 자신들이 좋아하는 만화는 따로 있는 편이었다.
대부분 유명한 순정만화를 좋아하는 어쩌면 평범한 여자만화 팬에 가깝다. 그런 그녀들이 다크 프린세스를 읽고 나서는 좀 변한감이 있었다고 생각하
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빠져 있으리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나도.”
이 와중에 선희도 슬쩍 끼어들었다.
“역시 작은 선생님도 그러셨구나.”
“하긴, 데생에 그렇게 공을 들이신 걸 보고는 대충 짐작했지.”
구자희와 박소미가 기대어린 눈빛으로 떠들자 곁에서 듣던 정미자가 끼어들었다.
“팬으로서 그렇게 생각할 수는 있어도, 연재를 하려면 작업할 사람이 있어야지. 지금은 파시엔시아도 감당 못해서 배경과 마무리는 다른 화실에 외주
를 주는 형편인데.”
“그렇지, 참.”
정미자의 말대로다.
단편도 애초에 선희가 연필데생만으로 작업한 만화다. 그러다보니 실험적으로 적은 부수만 찍은 것이고.
그런데 이번엔 박상식이 끼어들었다.
“그럼, 단편으로는 어때?”
“단편?”
“어.”
“이미 그린 게 단편인데.”
“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짧아 좀 많이 아쉽더라고. 그래서 제대로 된 단편으로. 전에 아카기 씨에게 듣기론 40페이지 정도의 단편도 가끔 들어가는 모양
이던데.”
40페이지짜리 단편이라······.
솔직히 나 역시 완성된 다크 프린세스를 보고 나서 아쉽다는 생각을 했었다.
처음에야 가벼운 느낌으로 만든 짧은 단편이었지만, 선희가 그것을 업그레이드 시켜버린 탓에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나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선희야, 혹시 단편······.”
“하고 싶어.”
“······아. 그러냐?”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답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다크 프린세스 데생만 봐도 기존에 그리던 삼사라와는 전혀 느낌이 다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걸로 끝난 건 아니다.
곧바로 편집부 지로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소년 히어로 편집부, 아카기입니다.
“아카기 씨, 저 윤환입니다.”
< 다크 프린세스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