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크 프린세스 (1) >
“······아슬아슬했지만 그래도 원고는 제때 도착했다고 하더군요.”
지로가 엊그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 난리 법석을 하며 완성한 데생원고를 또다시 밤샘작업을 통해 아슬아슬하게 어떻게 시간에는 맞춘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키도도 엄청난 괴물이다.
이곳에서 밤샘작업하고 건너가자마자 다시 밤샘작업이라니.
물론, 그 때문에 갈려나가는 사람들이 생기는 게 문제기는 하지만.
어시들을 위해 짧은 시간이나마 묵념.
아무튼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내가 입을 열었다.
“그 형은 정말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지로가 웃었다.
“담당인 테고시 씨도 그렇지만, 듣기론 어시 분들이 제일 고생이 심하다고 하더군요.”
“그렇겠죠. 유별난 만화가 밑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겠어요.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할 정도라니까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 만큼 강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에요. 어시 중 한명은 그 바쁜 와중에도 단편을 편집부로 들고 왔더라니까요. 기본 실력도
탄탄해서 반년 안에 데뷔할 수 있을 거라는 얘기도 들었고요.”
“뭐, 노예생활이 너무 힘들어 탈출하려는 건지도.”
그 말에 지로가 크게 웃었다.
“하하, 설마요. 키도 선생님이 데뷔에 가장 적극적으로 도우셨다던데요.”
“그래요?”
내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되물었다가고 곧 피식 웃었다.
하기야, 키도는 의리파니까.
“아, 그런데 이번에 연재하신 삼사라의 분위기가 조금 변했던데요.”
“그래요? 칼파나 때문인가?”
“네. 이제까지는 철저하게 주인공 중심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분위기였는데, 빌런인 칼파나 이야기가 묘하게 끌리더군요,”
“빌런도 나름 입장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리고 애정이 생겼거든요.”
“애정요?”
그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되묻는다.
하긴 나도 처음엔 내가 만든 이야기 속 빌런에게 애정을 갖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네.”
그렇게 대답하고는 곧바로 선희에게 전에 작업한 단편원고를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선희가 그 원고를 내게 가져다주고는 다시 돌아가 원고에 집중한다.
내가 선희에게 받은 원고를 지로에게 내밀었다.
“이거 한번 보실래요?”
“신작······ 인가요?”
지로가 약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뭘 걱정하는 지는 알만하다.
이미 두 개의 연재만화를 그리고 있다.
이제 슬슬 이야기가 불이 붙기 시작하는 시점이니 혹시라도 삼사라나 파시엔시아 중 하나를 완결시키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 그를 보며 내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신작은 아니고요. 짧은 외전단편이에요. 주인공은 칼파나고.”
“칼파나요? 이번에 새로 등장한 악당 아니에요?”
지로가 놀란 눈을 한 채 원고를 받아들었다.
“네. 맞아요.”
“그럼, 악당을 주인공으로 한 새로운 시리즈를 혹시 계획중이신건······.”
“아뇨. 그냥 재미로 만든 거니까, 가볍게 봐 주세요.”
“아, 재미로요.”
지로가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원고를 보더니 곧 첫 장을 살펴봤다.
그런데 이내 그의 표정이 바뀌었다.
“이거, 느낌이······.”
“네. 펜선용 원고는 아니에요. 연필로 완벽하게 마무리가 된 겁니다.”
“연필로 완전히요?”
“네.”
내 대답을 들은 지로가 다시 원고를 읽어나간다.
짧은 12페이지짜리라 스토리와 함께 그림도 꼼꼼히 살핀다.
연필로 완성했지만, 펜 그림 이상의 퀄리티로 완성한 것이 특징이라 지로가 흥미롭다는 표정이다. 그런데 모두 다 보고나서는 나를 보며 커진 눈으로
말했다.
“살아있군요.”
“그렇죠?”
“애정이 생겼다는 말씀, 완전히 이해가 되네요.”
“네. 멋대로 생명을 얻어버린 거죠. 이젠 무조건 가지고 가야하는 중요한 캐릭터가 되었어요.”
“그렇군요. 이런 캐릭터는 쉽게 못 버리게 되죠.”
납득했다는 듯 머리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다시 원고를 살피며 뭔가 생각하는 모습이다.
뭘 생각하는 거지?
잠시 후 지로가 원고를 테이블에 올려두고는 내게 말했다.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묵히기엔 아까운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저번처럼 단행본에만 따로 넣는 건 어떨까요?”
“흐음······.”
나는 대답대신 턱을 긁으며 달력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지로에게 물었다.
“코미케가 언제죠?”
“코미케요?”
“네. 코믹마켓.”
“······아.”
이제야 이해한 듯 지로가 머리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편집부 내에서 이번 코미케에 출판사 파트 부스를 하나 마련해서 홍보차원에서 참가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런데 갑자기 코
미케는 왜······?”
“선희야. 잠시만 이리 와볼래?”
선희가 다시 작업을 멈추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너, 이거 코미케 쪽에서 판매해 보는 건 어떻게 생각해?”
선희도 코미케에 대한 사정은 내게 몇 번 들어봤으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내 질문에 특별히 고민도 없이 단번에 대답한다.
“거기라면 괜찮아.”
그 말에 지로가 놀란 표정으로 날 본다.
“설마, 이걸 코미케에서 판다는 겁니까?”
“네. 다른 아마추어 동인지 처럼요.”
“하지만 이만한 작품이라면 단행본 쪽이 훨씬 낫지 않을까요? 그리고 금전적으로도 훨씬 이익이 될 테고.”
“아뇨. 선희가 이걸 만화잡지나 단행본으로 내려는 건 내키지 않아 해서요.”
“네? 그럼······.”
안 그래도 며칠 전 단편이 완성되고 나서 내가 물어봤었다.
그랬더니 선희는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주고 싶어.’ 라고 대답했다.
삼사라를 진짜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다는 게 선희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말은 했어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은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가 알아보겠다고 대충 대답을 해두긴 했는데, 문득 지금이 8월이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코미케가 떠오른 것이다.
코미케는 1년에 8월과 12월 이렇게 두 번이 열린다.
내가 살던 시절(미래)에는 도쿄 빅사이트에서 열리고 있었지만, 지금은 도쿄 국제견본시 회장에서 열리고 있을 것이다.
“단편만으로는 너무 얇으니까, 단편과 최근 선희가 그렸던 설정용 스케치들을 모아 싸게 판매를 하는 건 어떨까 해서요. 삼사라 홍보 차원에서도 나쁘
지 않을 것 같고.”
최근 삼사라의 단행본은 꾸준히 판매되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판매량이 줄어들 테니, 그것을 생각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
다.
“홍보차원이라······. 그렇겠군요. 써니 선생님께서 굳이 단행본에 내는 것을 내켜하시지 않는다면. 거기다 운이 좋아 홍보가 더 잘된다면 단행본 판매
에도 더 도움이 될지 모르고요.”
“홍보도 홍보지만 정확하게는 삼사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살 거니까. 그런 사람들을 위한 이벤트 같은 성격이 강할 테지만요.”
“네.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솔직히 출판사에선 조금 형식적으로 참가한다는 입장이라 직원도 이번에 들어온 신입사원들과 선임자 한명 정도로
구성된 조촐한 인원이었는데. 이걸 위해서라도 제가 짧게나마 직접 참여하겠다고 보고해야겠습니다.”
“아, 그럼. 더 좋겠죠.”
“네. 그런데 몇 부정도 찍는 게 좋을까요?”
“뭐, 500부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요즘 삼사라가 많이 팔려 아는 사람이 많이 늘었다고 해도······. 거기다 삼일동안 팔려봐야 얼마나 팔리겠어요.”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그냥 홍보용 팸플릿이랑 잡지만 가져다 홍보하는 게 좀 그랬는데. 이참에 이걸 팔면서 삼사라가 어느 정도 주목을 받는지 확
인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요.”
“네. 그럼 수고해주세요.”
***
도쿄 국제견본시 회장.
이곳에선 제 26회 코미케(코믹마켓)가 열리고 있었다.
더운 여름이었음에도 엄청난 인파가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대다수가 일반인 참가자인 부스 한 쪽 편엔 만화출판사 부스가 따로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출판사부스라고 해서 다 같은 부스가 아니다.
유명 출판사의 부스는 확 보기에도 화려하고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그런 출판사 몇 곳을 제외하면 다른 곳은 출판사라고 부르기 초라한 느낌
이다.
덕분에 대부분의 출판사들은 형식적으로 참석한 거나 다름없다.
사실, 나름 번듯하게 돈을 들여 참여해도 큰 출판사의 들러리에 불과할 뿐일 테니까. 하지만 일부러 참여하는 이유는 소수의 인기작을 홍보하기 위함
이었다.
아직은 규모가 작은 미쯔다쇼텐의 경우도 그나마 요즘 선전해주고 있는 주간소년 히어로와 청년지인 주간영 히어로 정도만 참여했을 뿐이다.
직원도 대다수가 신입사원.
아무튼 예상대로 부스는 가끔 들르는 사람들로 인해 썰렁하기만 했다.
“아, 역시 이름값은 무시 못 하겠네. 저쪽을 봐. 사람들이 득실거리잖아.”
“맞아. 특히 요즘엔 소년점프 인기가 최고라 그런지 슈에이사 쪽은 인산인해네.”
“소년매거진의 고단샤는 어떻고. ‘공태랑 나가신다’로 요즘 인기 엄청 좋잖아.”
“와, 역시 거대출판사. 부스가 엄청나게 화려해. 그런데 그에 비해 우리는······.”
“모두 뭐하는 거야? 할 일 없으면 이거라도 좀 날라.”
모여드는 사람이 없어 썰렁한 탓에 신입들끼리 모여 수다를 떨고 있자 선배직원이 잔소리를 했다.
“넵!”
“네!”
신입들이 부산스럽게 각종 팸플릿과 잡지들을 이리저리 옮긴다.
그때 부스 쪽으로 짐수레를 끌고 오는 이가 보인다. 신입들은 대부분 알아보지 못했지만 선임 직원은 그를 알아보고는 서둘러 다가갔다.
“아카기 씨. 여긴 어쩐 일로?”
짐수레에 얇은 책자를 잔뜩 묶어 쌓은 채 끌고 오던 지로가 이마에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이번 행사에 저도 하루만 참가할겁니다.”
“어? 파시엔시아랑 삼사라 때문에 바쁘실 텐데.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그런데 주변에서 물건을 이리저리 옮기던 신입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귀를 쫑긋 세웠다.
“파시엔시아, 삼사라의 담당이라고?”
“나도 그렇게 들었어.”
“와, 인기작 두 개를 담당하는 편집자라는 건가?”
“부럽다.”
그렇게 신입이 수군거리는 것을 힐끔거리던 선임 직원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자 모두가 다시 바쁘게 움직인다.
“이건 뭐죠?”
“아, 네. 이번에 써니 작가님의 부탁으로 만들게 된 특별판 책입니다. 뭐, 책이라고 하기엔 좀 많이 얇습니다만.”
“써니 작가님이요?”
“네.”
선임 직원도 궁금한 표정으로 기웃거린다. 하지만, 완벽하게 포장되어 묶인 상태라 확인할 방법은 없다.
곧 그가 신입 몇 명을 불렀다.
“어이, 거기 두 사람 아카기 씨가 가져온 책들 부스 쪽으로 옮겨.”
“네.”
두 사람이 서둘러 책뭉치들을 들어 나르기 시작한다.
지로도 그들 사이에서 같이 나르며 준비를 했다.
잠시 후 모든 짐을 부스 안쪽으로 옮기고 뭉치 하나를 풀어 테이블위에 올렸다.
그리고 책자를 꺼내 정리를 하자 몇몇 사람이 주변을 기웃거리다 책자를 보고 관심을 가지며 다가온다.
표지는 푸른색 계통의 컬러로 만들어져 있지만 그림은 흑백으로 되어있어 조금 허술해 보인다.
제목은 ‘다크 프린세스’라 적혀있다.
“다크 프린세스? 뭐지 이 만화?”
“모르지. 소년 히어로에서 새로 연재하는 건가?”
“이거 읽어봐도 되죠?”
“네. 여기 보기용 책자가 있으니까 이걸 보시면 됩니다.”
“아, 네.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한 남자가 책을 펼친다.
“어? 연필로 그린 그림인가?”
“그러네. 그런데 이거 그림이 익숙한데?”
“맞네. 이거 삼사라 느낌이잖아.”
“잠깐만······, 이거 칼파나 아니야?”
“어? 정말?”
< 다크 프린세스 (1) > 끝